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4.0-wmf.4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페이지:허인전 상권.djvu/5 250 55230 345335 345290 2024-11-19T12:27:22Z ZornsLemon 15531 34533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사용자111"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무종 거간ᄒᆞ고 허운을 방츌하다 화셜이라 텬하 ᄃᆡ셰 치란이 무상하야 혹 합이 부분하며 혹 슈이 망국ᄒᆞ니 차는 텬야아 운야아 왈 그러치 아니하다 사람의게 잇슴인가 하노라 셕에 하걸과 상쥬는 보텬지하에 쳑지도 막비기유며 일민도 막비기신이니 뉘 감히 텬명과 운슈를 밧지 못하엿다 이르리오마는 이목지소호와 즁심지소락으로 사람 주김을 이기지 못할가 져어ᄒᆞ야 하걸은 관룡방을 쥬기고 이윤을 쓰지 아니하며 상쥬는 비간을 쥬기고 ᄐᆡ공을 쓰지 아니한고로 텬하 졔후 반하야 셩탕 쥬무의게 도라감이오 ᄯᅩ ᄃᆡ명 ᄐᆡ죠는 문셩무신하시고 여일즁텬하샤 ᄇᆡᆨ셩이 락업하고 사이 함복하야 만셰 무궁지엄을 일웟더니 무종 황졔에 이르러는 충언을 불쳥하고 흉젹 류경복의게 미혹하샤 졔왕읕 삼은 후 인심이 흉흉하고 괴변이 ᄇᆡᆨ츌하야 쥬씨의 종샤 ᄭᅳᆫ어지게 되엿더니 슉종 황졔 경복의 란을 형쥬로 피하샤 근어졍령하고 임현사통하야 명실을 회복하엿스니 이런 고로 ᄆᆡᆼᄌᆡ 가라사ᄃᆡ 텬시와 지리 불여인화라 ᄒᆞ시고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oif7crgrcfvwyy957bu7o3bypfj5tf3 페이지:허인전 상권.djvu/6 250 58730 345336 308975 2024-11-19T12:35:24Z ZornsLemon 15531 34533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사용자111"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ᄯᅩ 텬작얼은 유가위언이와 자작얼은 불가활이라 하시니 이졔 무종과 슉종의 일을 기록하야 후셰에 텬슈와 운슈를 밋고 인샤를 다치 아닌 사람으로쎠 ᄭᆡ닷게 하노라 ○ 원ᄅᆡ 무종황졔 졍덕 초에 북젹이 강셩하야 즁국을 범하는 고로 상이 ᄃᆡ병을 발하샤 상셔 허운 등으로 더부러 북젹을 물이치니 그 후로부터 은위병시하고 병졍량족ᄒᆞ야 문관은 됵히 나라를 편히 하고 무장은 됵히 도젹을 방어하야 국ᄐᆡ민안하더니 졍덕 오년 오월 망일에 상이 션릉에 거동하시고 도라오실ᄉᆡ 문득 바라보니 큰 나무 아ᄅᆡ로 셔긔 령롱하거날 상이 괴이히 너겨 군마를 머츄우고 시신 사오인을 다리고 그 나무 아ᄅᆡ 이르니 사면이 젹요한ᄃᆡ 한 어린 아히 그늘 속에 잠드러거날 시신을 명하사 그 아히를 다려오라 한ᄃᆡ 그 아히 시신을 ᄯᆞ라 어젼에 이르거늘 상이 문왈 어ᄃᆡ 살며 셩명은 무엇이뇨 그 아히 복지 쥬왈 쳔신의 거쥬는 황셩이옵고 셩명은 류경복이로소이다 상이 놀ᄂᆡ며 왈 네 엇지 신이라 칭하는요 경복이 ᄃᆡ왈 신이 일즉 가형의게 드른 말이 잇슴으로 폐ᄒᆞ의 룡톄와 의관을 보고 아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0az7lizlbayafavzmbhrh2lt7f4r9dl 페이지:허인전 상권.djvu/7 250 58731 345337 308985 2024-11-19T13:53:30Z ZornsLemon 15531 34533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사용자111" /></noinclude>{{옛한글쪽 시작}} 나니다 상이 쳐음 그 얼골을 보ᄆᆡ 긔화요초러니 ᄯᅩ 그 말을 드른즉 어린 아히 갓지 아니한지라 마음에 긔이히 너기사 다시 문왈 네의 년녕은 몃치며 부명은 무엇이뇨 ᄃᆡ왈 쳔신의 나흔 구셰옵고 아비의 일홈은 츙이옵더니 부모 구몰하옵고 형졔 삼인이 셔로 의지ᄒᆞ야 잇나니다 상이 그 고혈함을 칙은히 너기샤 왈 네 짐을 ᄯᆞ라 궁에 드러가 잇슴이 엇더하뇨 경복이 긔 복쥬 왈 폐하의 홍은이 이에 밋치시니 신이 엇지 감히 샤양하오릿가 상이 긔특히 너기샤 가기를 명하신ᄃᆡ 경복이 협랑에 지필을 ᄂᆡ여 십여자 글을 쓰더니 남기에 부치거늘 본즉 졍덕 오년 오월 십오일에 류경복이 텬자를 모시고 궁에 드러가다 하엿거날 상이 그 ᄯᅳᆺ슬 무르니 ᄃᆡ왈 신의 형이 신의 거쳐를 아지 못할가 념려함이로소이다 상이 어린 아히의 도량이 이갓함을 보시고 더욱 아람다히 너기샤 경복을 다리고 환궁ᄒᆞ시니라 (이로 인ᄒᆞ야 텬하 ᄃᆡ란하고 사직이 위ᄐᆡ함은 무종 황졔의 지인지감이 부됵함이 아닌가) 각셜 경복이 입궁한 후로 슈년을 지ᄂᆡᄆᆡ 긔골이 준슈하고 언됵이 식비하야 텬자와 후비 {{옛한글쪽 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hpdrm4hgofo3n1vq3ea20qf0d78r8go 저자:차상찬 100 72813 345385 280682 2024-11-20T08:21:41Z Sangjinhwa 1322 345385 wikitext text/x-wiki {{글쓴이 |이름 = 차상찬 |다른 표기 = 車相瓉 |이름 첫 글자 = ㅊ |국적 = 일제 강점기 |탄생 연도 = 1887년 |사망 연도 = 1946년 |설명 = 호는 청오(靑吾). 『개벽』, 『별건곤(別乾坤)』, 『신여성(新女性)』, 『농민(農民)』, 『학생(學生)』 등의 주간, 기자, 편집인으로 일한 시인, 수필가, 언론인이다. |그림 = |그림 크기 = |위키백과 링크 = 차상찬 |위키인용집 링크 = |공용 링크 = |정렬 = 차상찬 }} ==저서== ===역사/야사 모음집=== * [[해동염사]] * [[한국 야담 사화 전집 (차상찬)|한국 야담 사화 전집]] * [[조선 사천년 비사]] ===수필/평론=== * [[주국헌법]] * [[경성잡화]] ===한시=== * [[경주회고]] * [[남한산성 (차상찬)|남한산성]] ==라이선스== {{PD-old-70}} ne67wopgkara8kt90rht6monezmpu0t 사용자:Blahhmosh 2 84136 345342 322166 2024-11-19T18:04:09Z Blahhmosh 13019 /* 滿文朝鮮文作品 */ 345342 wikitext text/x-wiki ===滿文朝鮮文作品=== *小兒論 **https://kyudb.snu.ac.kr/book/view.do?book_cd=GK03234_00 *八歲兒 **https://kyudb.snu.ac.kr/book/view.do?book_cd=GK01471_00 *三譯總解 **https://nl.go.kr/NL/contents/search.do?srchTarget=total&pageNum=1&pageSize=10&kwd=삼역총해 *康明花實記 *俄領實記 桂奉瑀 Unfinished: *시의전서 **http://www.davincimap.co.kr/davBase/Source/davSource.jsp?Job=Body&SourID=SOUR002602 2g7lij76faxvv64gqh88kva9147j7cv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문헌목록 4 84433 345344 345334 2024-11-20T01:21:09Z Motoko C. K. 4287 345344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 완성된 문헌 == {| class="wikitable" ! 색인 !! 위키문헌 문서 !! 후처리 |- |[[색인:(正本)集註周易.djvu]]||[[집주주역]] || {{완료}} |- |[[색인:東國歷史 제2책.djvu]]||[[동국역사]] || {{완료}} |- |[[색인:詩經諺解 제1책.djvu]]||[[시경언해/제1책]] || {{완료}} |- |[[색인:論語諺解 권3.djvu]]||[[논어언해/권3]] || {{작업 중}}<!-- 50페이지까지 --> |- |[[색인:論語諺解 권4.djvu]]||[[논어언해/권4]] || |- |[[색인:쥬역언해 제2책.djvu]]||[[주역언해/제2책]] || {{완료}} |- |[[색인:안졋슨사적.djvu]]||[[안졋슨사적]] || {{완료}} |- |[[색인:셔사건국지.djvu]]||[[서사건국지]] || {{완료}} |- |[[색인:화산최씨내훈.djvu]]||[[화산최씨내훈]] || {{완료}} |- |[[색인:신찬가정학.djvu]]||[[신찬가정학]] || {{완료}} |- |[[색인:이언 권2.djvu]]||[[이언/권2]] || |- |[[색인:(의용무쌍)텬뎡가연.djvu]]||[[천정가연]] || {{완료}} |- |[[색인:숙녀지긔.djvu]]||[[숙녀지기]] || |- |[[색인:소상강.djvu]]||[[소상강]] || |- |[[색인:삼션긔.djvu]]||[[삼선기]] || {{완료}} |- |[[색인:언간독.djvu]]||[[언간독]] || |- |[[색인: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 || |} == 작업할 문헌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class="wikitable" |- ! 난이도 !! 문헌 이름 !! 분야 !! 원문 파일 !! 선택 여부 |- | 상 || (정본)집주주역 || 유교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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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 완성된 문헌 */ 345367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 완성된 문헌 == {| class="wikitable" ! 색인 !! 위키문헌 문서 !! 후처리 |- |[[색인:(正本)集註周易.djvu]]||[[집주주역]] || {{완료}} |- |[[색인:東國歷史 제2책.djvu]]||[[동국역사]] || {{완료}} |- |[[색인:詩經諺解 제1책.djvu]]||[[시경언해/제1책]] || {{완료}} |- |[[색인:論語諺解 권3.djvu]]||[[논어언해/권3]] || {{작업 중}}<!-- 50페이지까지 --> |- |[[색인:論語諺解 권4.djvu]]||[[논어언해/권4]] || |- |[[색인:쥬역언해 제2책.djvu]]||[[주역언해/제2책]] || {{완료}} |- |[[색인:안졋슨사적.djvu]]||[[안졋슨사적]] || {{완료}} |- |[[색인:셔사건국지.djvu]]||[[서사건국지]] || {{완료}} |- |[[색인:화산최씨내훈.djvu]]||[[화산최씨내훈]] || {{완료}} |- |[[색인:신찬가정학.djvu]]||[[신찬가정학]] || {{완료}} |- |[[색인:이언 권2.djvu]]||[[이언/권2]] || |- |[[색인:(의용무쌍)텬뎡가연.djvu]]||[[천정가연]] || {{완료}} |- |[[색인:숙녀지긔.djvu]]||[[숙녀지기]] || |- |[[색인:소상강.djvu]]||[[소상강]] || |- |[[색인:삼션긔.djvu]]||[[삼선기]] || {{완료}} |- |[[색인:언간독.djvu]]||[[언간독]] || |- |[[색인: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 [[삼강오륜언해동몽초학]] ||{{작업 중}} |} == 작업할 문헌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class="wikitable" |- ! 난이도 !! 문헌 이름 !! 분야 !! 원문 파일 !!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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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aaxwhzpu4grbg73npeot54uor6eevyy 345378 345377 2024-11-20T02:49:01Z Thomas Dongsob Ahn 16640 22 345378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기본 원칙과 체계(綱目)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if13vhnl0l3bsugbgn0n30lmtuxnktb 345379 345378 2024-11-20T02:51:59Z Thomas Dongsob Ahn 16640 345379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ref>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ref>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ref>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ref>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na92eff92ozebppqybc2p4k25h5vqpy 345380 345379 2024-11-20T03:50:03Z Thomas Dongsob Ahn 16640 24~26 작업중 345380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ref>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ref>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ref>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ref>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질문: 대학이라는 책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모두 수신에 속한 일입니다.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대답: 이 네 가지로 수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신에서 미루어나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춘(椿)의 기록.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치지(致知)<ref>팔조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이치의 인식을 확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단계를 말한다.</ref>와 격물(格物)은 '대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ref>대학 전 3장.</ref>는 등등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은 소학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었다. 설마하니 소학의 단계에서 (배우는 이가 이러한 이치를) 전혀 배우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비록 '인(仁)에 멈추고, 경(敬)에 멈춘다'고는 해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는지 모른다. 인(仁)에는 인이 되기 위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경(敬)에는 경이 되기 위한 이유가 있어야 하므로, '대학'에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통해 끝까지 연구하고 가르칩니다. 마치 서원(書院)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서원 문 안에만 도달한 것도 도달한 것이며, 이를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물격지지(物格知至)가 아닙니다 순(㽦)의 기록.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사람들은 많은 경우 실천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표준을 세워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어떤 자질이 좋은 사람들은 이치에 대한 깊은 이해나 격물, 치지가 필요 없습니다. 성인이 '대학'을 만든 것은 사람들을 성인의 경지로 함께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대학'에 실린 것은 단지 제목일 뿐입니다. 반드시 스스로 노력하여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bd56067zfrqtx02zfmevog16ofixl8v 345381 345380 2024-11-20T04:46:31Z Thomas Dongsob Ahn 16640 345381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ref>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ref>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ref>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ref>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질문: 대학이라는 책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모두 수신에 속한 일입니다.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대답: 이 네 가지로 수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신에서 미루어나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춘(椿)의 기록.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치지(致知)<ref>팔조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이치의 인식을 확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단계를 말한다.</ref>와 격물(格物)은 '대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ref>대학 전 3장.</ref>는 등등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은 소학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었다. 설마하니 소학의 단계에서 (다음에서 언급할 것들을) 전혀 안 배우지는 않겠지만, 비록 '인(仁)에 멈추고, 경(敬)에 멈춘다'고는 해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인(仁)에는 반드시 인인 이유가 있고, 경(敬)에는 반드시 경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대학에 와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통해 끝까지 남김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마치 서원(書院)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서원의 정문 안쪽에만 도달한 것도 도달한 것이니 역시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추구했다(致知)'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서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사물에 나아갔고 앎이 지극해졌다(物格知至)'는 아닌 것이다. 순(㽦)의 기록.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사람들은 많은 경우 실천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표준을 세워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어떤 자질이 좋은 사람들은 이치에 대한 깊은 이해나 격물, 치지가 필요 없습니다. 성인이 '대학'을 만든 것은 사람들을 성인의 경지로 함께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대학'에 실린 것은 단지 제목일 뿐입니다. 반드시 스스로 노력하여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bp4ox8wm0u3cl435wj4e5f0dxu3jy46 345390 345381 2024-11-20T10:32:21Z Thomas Dongsob Ahn 16640 26까지 345390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ref>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ref>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ref>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ref>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질문: 대학이라는 책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모두 수신에 속한 일입니다.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대답: 이 네 가지로 수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신에서 미루어나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춘(椿)의 기록.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치지(致知)<ref>팔조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이치의 인식을 확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단계를 말한다.</ref>와 격물(格物)은 '대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ref>대학 전 3장.</ref>는 등등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은 소학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었다. 설마하니 소학의 단계에서 (다음에서 언급할 것들을) 전혀 안 배우지는 않겠지만, 비록 '인(仁)에 멈추고, 경(敬)에 멈춘다'고는 해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인(仁)에는 반드시 인인 이유가 있고, 경(敬)에는 반드시 경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대학에 와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통해 끝까지 남김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마치 서원(書院)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서원의 정문 안쪽에만 도달한 것도 도달한 것이니 역시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추구했다(致知)'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서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사물에 나아갔고 앎이 지극해졌다(物格知至)'는 아닌 것이다. 순(㽦)의 기록.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사람들이 많이들 실천을 가르치는데 모두다 스스로 표준을 세워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질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자연히 궁리(窮理), 격물(格物), 치지(致知)가 필요 없다. 성인이 '대학'을 만든 것은 (자질이 좋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함께 성인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간(榦)의 기록.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 '대학'이 담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가이드라인 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스스로 힘써 해나가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敬仲.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izcnyzhh18i9g0ks3to4skipvwysldc 345391 345390 2024-11-20T10:59:41Z Thomas Dongsob Ahn 16640 29까지 345391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주자어류 권14 | 부제 = 대학1 | 저자 = 주희 문인 다수 | 설명 = 번역한 이후 번역자가 누구인지 표시를 남겨두는 것을 권장하나 필수는 아님. }} 大學一 대학1 *   綱領 '''가이드라인 *  14:1 學問須以大學爲先, 次論語, 次孟子, 次中庸. 中庸工夫密, 規模大. 德明(44이후). '''학문은 [[예기/대학|대학]]부터 해야 한다. 다음은 [[번역:논어|논어]], 그 다음은 [[번역:맹자|맹자]], 그 다음이 [[예기/중용|중용]]이다. 중용은 공부(工夫)가 세밀하고<ref>일역판은 '책 안에서 말한 실천내용이 치밀하다'라고 번역했다. 공부는 기본적으로 시간과 정력을 어떤 것에 투여하는 행위 및 그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는 아마도 중용이 독자에게 직접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정신수양의 방법과 내용, 이론적 근거 등이 매우 자세해서 일견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보인다.</ref> 규모가 크다<ref>스케일이 크다는 뜻이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  14:2 讀書, 且從易曉易解處去讀. 如大學中庸語孟四書, 道理粲然. 人只是不去看. 若理會得此四書, 何書不可讀! 何理不可究! 何事不可處! 蓋卿(65때). '''독서는 이해하기 쉬운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예기/대학|대학]], 중용, 논어, 맹자 이 네 편의 책 같은 경우는 도리가 선명(粲然)<ref>일역판은 명료명백하다고 하였다.</ref>하다. 그저 사람들이 보려 하지 않을 뿐, 이 네 서책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무슨 책이든 읽지 못할까? 무슨 이치든 파고들지 못할까? 무슨 일이든 대처하지 못할까? *  14:3 某要人先讀大學, 以定其規模; 次讀論語, 以立其根本; 次讀孟子, 以觀其發越; 次讀中庸, 以求古人之微妙處. 大學一篇有等級次第, 總作一處, 易曉, 宜先看. 論語卻實, 但言語散見, 初看亦難. 孟子有感激興發人心處. 中庸亦難讀, 看三書後, 方宜讀之. 㝢(61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예기/대학|대학]]부터 읽어서 (배움의) 규모를 확정하고, 다음으로 논어를 읽어서 뿌리를 세우고, 다음으로 맹자를 읽어서 (사람 마음을) 격발(發越)시킴을 보게 하고<ref>미우라구니오는 '정신이 고양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본 조목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고양'은 너무 얌전한 감이 있다. 맹자를 읽으면 고양된다기 보다는 흥분되는 경향이 있다.</ref>, 마지막으로 중용을 읽어서 고대인들의 (사유의) 미묘한 지점을 탐구하게 한다. 대학은 여러 단계와 순서가 모두 모여 한 곳에 있어 이해하기 쉬우니 먼저 읽어야 한다. 반면에 논어는 충실하긴<ref>실질적이고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이다.</ref> 하지만 말이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어 처음 보았을 땐 역시 어렵다. 맹자는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발시키는 데가 있다. 중용 역시 읽기 어렵다. 응당 세 책을 본 후에 읽어야 한다. *  14:4 先看大學, 次語孟, 次中庸. 果然下工夫, 句句字字, 涵泳切己, 看得透徹, 一生受用不盡. 只怕人不下工, 雖多讀古人書, 無益. 書只是明得道理, 卻要人做出書中所說聖賢工夫來. 若果看此數書, 他書可一見而決矣. 謙(65때). '''먼저 대학을 보고 그 다음 논어와 맹자를 보고 그 다음에 중용을 본다. 진실로 대학에 공을 들여(下工夫) 구구절절 깊이 침잠하여 자기 자신에게 절실하도록(切己)<ref>'절기'란 오늘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상황, 시대 상황, 국제 정세와 긴밀히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텍스트를 독해하는 태도를 말한다. 종종 친절유미(親切有味: 텍스트가 친근하고 절실하여 맛이 있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되는 태도는, 말하자면, 텍스트를 독자 자신과 무관한 모종의 객관적 사물로 취급하여 냉정하고 무심하게 다루는 것이다.</ref> 익히고 투철하게 이해한다면 일평생 그 쓸모가 끝이 없을 것이다. 그저 사람들이 공을 들이지 않아서 아무리 고대인의 책을 많이 읽어도 도움이 안 될 것을 걱정할 뿐이다. 책은 도리를 밝힐 수 있을 뿐이요, 독자는 나아가 책 속에서 말하는 성현의 공부(工夫)<ref>일역판은 여기서도 '실천'으로 풀이했다.</ref>를 몸소 해내야 한다.<ref>직역하자면 1. 책은 도리를 밝히고 2. 책은 독자에게 요구하기를 '책 속에서 말한 성현공부를 해내라'고 한다. 가 된다.</ref> 만약 진실로 이 몇 권의 서책을 이해한다면 그 밖의 책들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14:5 論孟中庸, 待大學貫通浹洽, 無可得看後方看, 乃佳. 道學不明, 元來不是上面欠卻工夫, 乃是下面元無根脚. 若信得及, 脚踏實地, 如此做去, 良心自然不放, 踐履自然純熟. 非但讀書一事也. '''논어, 맹자, 중용은 대학을 완전히 꿰뚫어서 그것이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이제는 더 파악할 것이 남지 않은 뒤에야 보면 좋다. (오늘날) 도를 배우는 일(道學)이 분명하지<ref>도학불명(道學不明)은 도학자들의 상투어이다. 주로 '도학이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한다. 다만 이것이 도를 배운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참여자들의 이해가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는 뜻인지(도학의 본질에 대한 컨센서스의 문제), 혹은 도를 배우는 것을 표방한 일종의 학파가 광범위한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지(프로모션과 설득의 문제) 잘 모르겠다.</ref> 못한 까닭은 본래 저 위쪽 부분에서의 노력(工夫)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래쪽에 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이다.<ref>위쪽이란 고담준론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상'의 영역이다. 아래쪽은 일상적인 실천윤리의 영역, 성리학 용어로 '형이하'의 영역이다.</ref> 만약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실천적인 영역에 발을 딛고서 해 나아간다면 자연스레 인간 본연의 좋은 마음(良心)을 상실하지 않고 자연스레 (일상적인 도리의) 실천이 익숙해질 것이니 (이로 인한 파급효과의 범위가) 독서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  14:6 “人之爲學, 先讀大學, 次讀論語. 大學是箇大坯模. 大學譬如買田契, 論語如田畝闊狹去處, 逐段子耕將去.” ''' 학문은 우선 대학을 읽고 그 다음 논어를 읽어야 한다. 대학은 비유하자면 하나의 큰 틀(mould)이다.<ref>쇳물을 부어서 금속제품을 주조해내는 틀을 말한다.</ref> 대학은 (또 비유하자면) 농지 매매 계약서(買田契)이고 논어는 그 농지 각 부분의 넓고 좁은 사정에 맞춰 하나하나 경작해나가는 것과 같다. 或曰: “亦在乎熟之而已.” '''누군가의 발언: '역시 익숙해지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ref>맹자6A:19. 맹자는 훌륭한 오곡과 훌륭하지 않은 피를 구분한다. 오곡이 아무리 훌륭해도 익지 않으면 피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인(仁) 또한 익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ref> 曰: “然.” 去僞(46때). 人傑同. '''대답: 그렇다. 거위(去僞)의 기록. 인걸(人傑)도 같은 기록. *  14:7 問: “欲專看一書, 以何爲先?” '''질문: 전적으로 한 권만 보고자 한다면 무슨 책을 먼저 볼까요? 曰: “先讀大學, 可見古人爲學首末次第. 且就實處理會卻好, 不消得專去無形影處理會.” 淳(61·70때). '''대답: 먼저 대학을 읽으면 고대인의 학문의 처음과 끝과 그 사이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실질적인 지점에서 이해해야 좋으니 형체도 없는 지점에만 전적으로 매달려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8 可將大學用數月工夫看去. 此書前後相因, 互相發明, 讀之可見, 不比他書. 他書非一時所言, 非一人所記. 惟此書首尾具備, 易以推尋也. 力行(62때). '''대학 하나를 가지고 몇 달 힘껏 읽어볼 만하다. 이 책은 앞뒤로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면서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ref>일역본에서 지적한 것처럼 이 부분은 몇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책 자체가 난이도가 낮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읽어보면 (내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바로 알 거다 정도의 의미일 수도 있다.</ref> 다른 책들이 비벼볼 수 없다. 다른 책들은 특정 시점의 언설도 아니고 특정인의 기록도 아니다.<ref>논어나 맹자를 생각해보라. 공자 일평생의 말을 여러 사람이 기록한 관계로 논어는 체계랄 게 없다.</ref> 유독 이 책은 머리와 꼬리를 완비했기 때문에<ref>서두부터 결말까지 체계를 갖추었다는 뜻이다.</ref> 의미를 추론하고 찾아내기 쉽다. *  14:9 今且須熟究大學作間架, 卻以他書塡補去. 如此看得一兩書, 便是占得分數多, 後卻易爲力. 聖賢之言難精. 難者旣精, 則後面粗者卻易曉. 大雅(49이후). '''지금은 우선 대학을 차분히 연구하여 뼈대를 세운 다음 다른 책을 가지고 살을 채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한 두 권을 읽으면 상당 부분을 채울 수 있고, 그 후에는 힘을 쓰기가 쉬워진다. 성인과 현인의 말은 정밀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부분을 정밀하게 이해하고 나면 그 뒤의 덜 정밀한<ref>직역하면 '거친'이다.</ref> 것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아(大雅)의 기록. *  14:10 亞夫問大學大意. '''아부가 대학의 대의를 물었다. 曰: “大學是修身治人底規模. 如人起屋相似, 須先打箇地盤. 地盤旣成, 則可擧而行之矣.” 時擧(64이후). '''대답: 대학은 수기치인의 골격이다. 집을 짓는 것과 비슷하다. 먼저 지반을 다져야 한다. 지반 공사가 끝나고 나면 (그 다음 공사를) 거행할 수 있다. 시거(時擧)의 기록. *  14:11 或問: “大學之書, 卽是聖人做天下根本?” '''누군가의 질문: 대학이란 책은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ref>일역판에 의하면 做天下는 爲天下와 같으니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다.</ref> 근본입니까? 曰: “此譬如人起屋, 是畫一箇大地盤在這裏. 理會得這箇了, 他日若有材料, 卻依此起將去, 只此一箇道理. 明此以南面, 堯之爲君也; 明此以北面, 舜之爲臣也.” '''대답: 이는 집짓기로 비유하자면 여기다<ref>일역판은 在這裏를 '확실하게' '명확하게' 정도의 의미로 풀었다. 하지만 이 구문이 주자어류에서 빈출하며 많은 경우 방향지시의 의미를 간직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굳이 저렇게 의역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ref> 큰 지반을 획정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잘 처리해둘(理會) 수 있으면 나중에 건자재가 생겼을 때 이 기초를 따라 집을 지어나갈 수 있다. 그저 이 하나의 도리 뿐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남면(南面)<ref>임금의 옥좌는 전통적으로 정남향이다. 그래서 '남쪽을 바라본다'고 하면 왕으로 재위한다는 뜻.</ref>한 것이 요(堯)의 임금노릇이다. 이 도리 하나를 밝혀서 북면한 것이 순(舜)의 신하노릇이다. *  14:12 大學一書, 如行程相似. 自某處到某處幾里, 自某處到某處幾里. 識得行程, 須便行始得. 若只讀得空殼子, 亦無益也. 履孫(65때). '''대학이란 책은 여행가이드북<ref>行程은 네비 상에서 표시되는 '~까지 가는데 걸리는 거리'이다. 다만 여기서는 바로 아래 조목 13을 참조하여 그러한 거리들을 기록해 둔 가이드북으로 풀이했다.</ref>과 비슷하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어디에서 어디까지 가는데 몇 리. 그런데 여정의 거리를 알았으면 실제로 길을 가야만 한다. 빈껍데기<ref>가이드북은 가이딩만 하지 사람을 실제로 목적지에 데려다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빈껍데기에 비유한 것이다.</ref>만 읽고 만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리손(履孫)의 기록. *  14:13 大學如一部行程曆, 皆有節次. 今人看了, 須是行去. 今日行得到何處, 明日行得到何處, 方可漸到那田地. 若只把在手裏翻來覆去, 欲望之燕, 之越, 豈有是理! 自修(65때). '''대학은 여행가이드북과 같아서 모두 잘 정해진 절차가 있다. 독자가 이걸 읽었으면 이제는 직접 여행을 떠나야 한다. 오늘 이동해서 어디에 도착하고 다음날 이동해서 저기에 도착하고, 그래야 점차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저 가이드북을 손 위에 올려놓고 뒤적거리기만 하면서 연(燕)나라에 가고 월(越)나라에 가기를 바란다면<ref>연나라는 오늘날 북경(北京) 및 그 위쪽 지역으로 중화세계의 최북단이다. 반대로 월나라는 최남단이다. </ref>,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자수(自修)의 기록. *  14:14 大學是一箇腔子, 而今卻要去塡敎實著. 如他說格物, 自家是去格物後, 塡敎實著; 如他說誠意, 自家須是去誠意後, 亦塡敎實著. 節(64이후). '''대학은 빈 뱃속이니 이제 (음식물을 가지고)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격물(格物)<ref>대학 팔조목의 첫 번째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과 사태에 직접 접촉하여 지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ref>을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격물을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대학에서 성의(誠意)<ref>팔조목 가운데 세 번째이다. 도덕실천에 있어서 의도의 순수성을 확보하라는 말이다.</ref>를 설명했으면 자신은 스스로 성의를 실천하여 메꿔서 채워야 한다. 절(節)의 기록. *  14:15 大學重處都在前面. 後面工夫漸漸輕了, 只是揩磨在. 士毅(미상). '''대학의 무거운 부분은 모두 앞부분에 있다.<ref>앞부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일역판은 15:115 등을 근거로 성의까지가 앞부분 나머지가 뒷부분이라고 보았다. 고문해의는 수신까지를 앞부분, 제가 이하를 뒷부분으로 보았다.</ref> 뒷부분 공부는 점점 가벼워진다. 갈고 닦기만하면 된다.<ref>해마(揩磨)는 목재나 석재 기물을 만든 뒤 표면을 갈고 닦는(=연마하는) 마무리 작업이다. 문장 말미의 재(在)는 단정하는 어조를 나타낸다.</ref> <廣錄云: “後面其失漸輕, 亦是下揩磨底工夫在.”> '''<광록의 기록: 뒷부분은 공부<ref>원문은 其失(그 잃음)이다. 현존하는 다른 판본에서도 其失이다. 하지만 일역판에서는 이 두 글자가 '工夫'의 오기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문맥상 타당하다고 보아 여기서는 일역판의 추정을 따랐다. </ref>가 점점 가벼워지지만 그래도 역시 갈고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  14:16 看大學前面初起許多, 且見安排在這裏. 如今食次冊相似, 都且如此呈說後, 方是可喫處. 初間也要識許多模樣. 賀孫(62이후). '''대학을 보면 앞부분에서 다양한 것들을 대략적으로 거론하니 (책 전체의) 배치구도를 여기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오늘날 식사매뉴얼(食次冊)과 비슷하니 모두 우선 이렇게 개괄한 후에야 먹을 것들이 나온다. 초반에는 역시 전체적인 구도(模樣)를 알아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17 大學一字不胡亂下, 亦是古人見得這道理熟. 信口所說, 便都是這裏. 淳(61·70때). '''대학은 한 글자도 허투루 쓰지 않았으니 고대인은 역시 이 도리를 익숙하게 알았던 것이다. (편안하게) 나오는 대로 다 말해도<ref>信口는 입에 맡겨두고 말한다는 뜻이다. 신중한 고려 없이 나오는대로 말하는 것이다.</ref> 모두 도리에 맞았다. 순(淳)의 기록. *  14:18 大學總說了, 又逐段更說許多道理. 聖賢怕有些子照管不到, 節節覺察將去, 到這裏有恁地病, 到那裏有恁地病. 節(64이후). '''대학은 총체적으로 설명한 후에 다시 단락을 따라 한번 더 여러 도리를 설명한다. 성인과 현인들은 (단계마다)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ref>照管不到의 照管은 유심히 잘 살펴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다.</ref> 이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절목마다 여기서는 이런 병통이 있을 수 있고 저기서는 저런 병통이 있을 수 있다고 점검하고 드러낸 것이다.<ref>覺察은 찾아내어 깨닫고 밝혀서 아는 것이다. 마치 숨어있는 범인을 찾아내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의 행위와 같다.</ref> 절(節)의 기록. *  14:19 明德, 如八窗玲瓏, 致知格物, 各從其所明處去.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始, 使端慤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椿(59때). '''명덕(明德)은 마치 팔방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창문 같고,<ref>당나라 시인 노륜의 시 '부득팽조루송양종덕귀서주막(賦得彭祖樓送楊宗德歸徐州幕)'을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의 각주를 참조하였다. 일역판에서는 여덟 개의 창문을 통해 바깥에서 태양빛이 쏟아져 들어와 방이 밝은 상태로 이해했다. 그러나 주희가 이해하는 명덕(明德)은 빛을 받아들인다기보다는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의 이미지에 가깝다.</ref> 치지격물(致知格物)은 명덕의 빛이 밝혀주는 지점에서 수행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학(小學) 공부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대학(大學)을 배우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노력할 지점이 없다.<ref>소학은 평상시 윤리적 덕목의 실천을 통해 도덕률이 몸에 배도록 하는 일련의 훈육 프로그램이다. 이러한 훈육 프로그램으로 단련된 몸과 마음으로 각각의 도덕률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격물치지이다. 전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어른이 된 현재 단계에서 격물치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ref> 지금 일단 지경(持敬)부터 시작해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평온하게 통일된 상태를 만든 다음에야 치지격물을 할 수 있다.<ref>지경(持敬)은 일종의 명상법이다. 주희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어서 소학의 공부를 뒤늦게 벌충해주는 검정고시 같은 역할을 한다.</ref> 춘(椿)의 기록. *  14:20 而今無法. 嘗欲作一說, 敎人只將大學一日去讀一遍, 看他如何是大人之學, 如何是小學, 如何是明明德, 如何是新民, 如何是止於至善. 日日如是讀, 月去日來, 自見所謂溫故而知新. 須是知新, 日日看得新方得. 卻不是道理解新, 但自家這箇意思長長地新. 義剛(64이후). '''무슨 특별한 비법 같은 건 없다.<ref>무법(無法)은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정공법 밖에 없으니 큰 길로 가라는 충고를 하고 싶을 적에 주희가 꺼내는 말이다.</ref> 전에 한번은 이렇게 주장하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단지 『대학』을 하루에 한 번 읽게 시켜서 무엇이 어른의 학문인지, 무엇이 아이의 학문인지, 무엇이 명명덕(明明德)인지, 무엇이 신민(新民)인지, 무엇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지 알게 하는 것이다. 매일 이렇게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이른바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溫故而知新)"는 것이<ref>논어 2:11</ref>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새 것을 알아야 한다. 매일 새롭게 이해해야만 한다. 도리가 새로워질 수<ref>解는 '할 수 있다'는 뜻이다.</ref>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해가 항상<ref>장장지는 항상, 늘상 그렇다는 뜻이다.</ref> 새로워지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  14:21 才仲問大學. '''재중이 대학에 관하여 질문. 曰: “人心有明處, 於其間得一二分, 卽節節推上去.” '''대답: 사람의 마음에는 밝은 곳이 있다. 그 속에서 한두 가지를 얻어 순서대로 밀고 나아가는 것이다. 又問: “小學·大學如何?” '''재질문: 소학과 대학은 어떻게 다릅니까? 曰: “小學涵養此性, 大學則所以實其理也. 忠信孝弟之類, 須於小學中出. 然正心·誠意之類, 小學如何知得. 須其有識後, 以此實之. 大抵大學一節一節恢廓展布將去, 然必到於此而後進. 旣到而不進, 固不可; 未到而求進, 亦不可. 且如國旣治, 又卻絜矩, 則又欲其四方皆準之也. 此一卷書甚分明, 不是滾作一塊物事.” 可學(62때). '''대답: 소학은 이 본성(性)을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대학은 그 이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입니다.<ref>실기리'實其理'는 번역하기 어렵다. 영역판은 substantiate the principles라고 하였다. 일역판은 '실천'으로 풀었다. 주자학대계판은 '충실하게 하다' 혹은 '채우다'로 풀었다. 56:38에서 주희는 여조겸의 말을 인용하며 실(實)에 세 가지 뜻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명'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명실'의 '실'이다(有對名而言者, 謂名實之實). 이치와 짝이 되는 개념일 때도 있는데 이 경우 '사실'의 '실'이다(有對理而言者, 謂事實之實). 꽃과 짝이 되는 개념으로 사용될 수도 있는데 이 경우 '화실'의 '실'이다(有對華而言者, 謂華實之實). 세 경우 모두 추상성에 대비되는 구체성과 현실성, 마지막으로 실용성의 의미가 있다.</ref> 충신(忠信), 효제(孝弟)와 같은 덕목은 소학에서 나와야 한다. 그러나 정심(正心), 성의(誠意)와 같은 것은 소학에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반드시 (충신과 효제 등에 대하여 초보적인) 앎이 생긴 후에 (대학의 정심 성의와 같은) 이것을 활용해서 실제로 구현해야 합니다. 대체로 대학은 정해진 단계를 따라 확장되어 나아간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단계에 이른 후에야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이미 이 단계에 도달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야 당연히 불가하지만, 아직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는데도 다음 단계로 진입하길 원하는 것도 안 된다. 예를 들어 나라가 이미 잘 다스려졌는데도 다시 혈구(絜矩)<ref>대학 전10장에 나온다. '구'는 직각자, '혈'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구)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동일한 마음을 식별하는(혈) 것을 말한다. 자기 안에 있는 심성 속에서 만민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확인하고 실천하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인식하고 실천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자기 아이를 사랑하도록 인도하고 싶어지는 것과 같다. 주희는 이런식으로 동일한 도덕적 인식과 실천이 확산되면 온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고, 더 나아가 온 세상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6:212를 보라.</ref>하는 것은 천하 사방이 모두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한 권의 책은 (단계와 절차가) 매우 분명하다. (이리저리 불분명하게) 뒤섞인 한 덩어리가 아니다. 가학(可學)의 기록. *  14:22 大學是爲學綱目. 先通大學, 立定綱領, 其他經皆雜說在裏許. 通得大學了, 去看他經, 方見得此是格物·致知事; 此是正心·誠意事; 此是修身事; 此是齊家·治國·平天下事. '''대학은 학문의 개요(綱目)<ref>Gardner(2022)는 'outline'이라고 번역했는데 적절하다.</ref>를 담고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전체적인 가이드라인(綱領)<ref>영역판(2018)의 번역어 선택을 따랐다.</ref>을 정립하면 그 밖의 다른 경서들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이 안에 넣을 수 있다. 먼저 대학을 완전히 마스터하고(通) 나서 다른 경서를 보면 그제서야 비로소 이것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일이고, 이것이 '정심성의(正心誠意)'의 일이며, 이것이 '수신(修身)'의 일이고, 이것이 '제가치국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14:23 問: “大學一書, 皆以修身爲本. 正心·誠意·致知·格物, 皆是修身內事.” '''질문: 대학이라는 책은 모두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정심(正心), 성의(誠意), 치지(致知), 격물(格物)은 모두 수신에 속한 일입니다. 曰: “此四者成就那修身. 修身推出, 做許多事.” 椿(59때). '''대답: 이 네 가지로 수신을 성취하는 것이다. 수신에서 미루어나가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춘(椿)의 기록. *  14:24 致知·格物, 大學中所說, 不過“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之類. 古人小學時都曾理會來. 不成小學全不曾知得. 然而雖是“止於仁, 止於敬”, 其間卻有多少事. 如仁必有所以爲仁者, 敬必有所以爲敬者, 故又來大學致知·格物上窮究敎盡. 如入書院, 只到書院門裏, 亦是到來, 亦喚做格物·致知得. 然卻不曾到書院築底處, 終不是物格·知至. 㽦(59때). '''치지(致知)<ref>팔조목 가운데 두 번째이다. 이치의 인식을 확실하고 치밀하게 하는 단계를 말한다.</ref>와 격물(格物)은 '대학'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ref>대학 전 3장.</ref>는 등등에 불과하다. 고대인들은 소학에서 이미 이것을 다루었다. 설마하니 소학의 단계에서 (다음에서 언급할 것들을) 전혀 안 배우지는 않겠지만, 비록 '인(仁)에 멈추고, 경(敬)에 멈춘다'고는 해도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인가? 예를 들어 인(仁)에는 반드시 인인 이유가 있고, 경(敬)에는 반드시 경인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다시 대학에 와서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을 통해 끝까지 남김없이 파고드는 것이다. 마치 서원(書院)에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서원의 정문 안쪽에만 도달한 것도 도달한 것이니 역시 '사물에 나아가(格物) 앎을 추구했다(致知)'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러나 서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지 못하면 결국 '사물에 나아갔고 앎이 지극해졌다(物格知至)'는 아닌 것이다. 순(㽦)의 기록. *  14:25 人多敎踐履, 皆是自立標置去敎人. 自有一般資質好底人, 便不須窮理·格物·致知. 此聖人作今大學, 便要使人齊入於聖人之域. 榦(미상). '''사람들이 많이들 실천을 가르치는데 모두다 스스로 표준을 세워 남을 가르치는 것이다. 자질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자연히 궁리(窮理), 격물(格物), 치지(致知)가 필요 없다. 성인이 '대학'을 만든 것은 (자질이 좋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함께 성인의 경지로 이끌기 위해서이다. 간(榦)의 기록. *  14:26 大學所載, 只是箇題目如此. 要須自用工夫做將去. 賀孫(62이후). ''' '대학'이 담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가이드라인 뿐이다. 그러니 반드시 스스로 힘써 해나가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27 大學敎人, 先要理會得箇道理. 若不理會得, 見聖人許多言語都是硬將人制縛, 剩許多工夫. 若見得了, 見得許多道理, 都是天生自然鐵定底道理, 更移易分毫不得. 而今讀大學, 須是句句就自家身上看過. 少間自理會得, 不待解說. 如語孟六經, 亦須就自家身上看, 便如自家與人對說一般, 如何不長進! 聖賢便可得而至也. 賀孫(62이후). ''' '대학'은 사람들에게 먼저 도리를 이해하도록 가르친다. 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성인의 많은 말씀은 모두 억지로 사람을 제약하고 속박하는 것으로, 쓸데없이 애만 많이 쓰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도리를 이해하게 되면 그 많은 도리가 모두 하늘이 낳아 자연히 무쇠처럼 확정된(天生自然鐵定) 도리여서 조금도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제 '대학'을 읽을 때에 반드시 한 문장 한 문장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얼마 후 스스로 이해하게 되어 해설이 필요 없을 것이다. '논어', '맹자', '육경'도 역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과 같아질 것이니 어찌 발전하지 않겠나! 성현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손(賀孫)의 기록. *  14:28 今人都是爲人而學. 某所以敎諸公讀大學, 且看古人爲學是如何, 是理會甚事. 諸公願爲古人之學乎?願爲今人之學乎? 敬仲. '''요즘 사람들은 모두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대학'을 읽게 하는 이유는 우선 옛사람들의 배움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이해하려 했는지를 보게 하기 위함이다. 여러분은 옛사람의 학문을 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요즘 사람의 학문을 하고자 하는가? 경중(敬仲)의 기록. *  14:29 讀大學, 且逐段捱. 看這段時, 似得無後面底. 看第二段, 卻思量前段, 令文意聯屬, 卻不妨. 榦(미상). ''' '대학'을 읽을 때는 각 단락과 차례대로 씨름해야 한다. 첫 단락을 볼 때는 뒷부분이 없는 것처럼 하고, 두 번째 단락을 볼 때는 앞 단락을 생각하여 글의 의미가 연결되도록 해야만 한다. 간(榦)의 기록. *  14:30 看大學, 固是著逐句看去. 也須先統讀傳文敎熟, 方好從頭仔細看. 若全不識傳文大意, 便看前頭亦難. 賀孫(62이후). *  14:31 或問讀大學. 曰: “讀後去, 須更溫前面, 不可只恁地茫茫看. 須‘溫故而知新’. 須是溫故, 方能知新. 若不溫故, 便要求知新, 則新不可得而知, 亦不可得而求矣.” 賀孫(62이후). *  14:32 讀大學, 初間也只如此讀, 後來也只如此讀. 只是初間讀得, 似不與自家相關; 後來看熟, 見許多說話須著如此做, 不如此做自不得. 賀孫(62이후). *  14:33 謂任道弟讀大學, 云: “須逐段讀敎透, 黙自記得, 使心口相應. 古時無多書, 人只是專心暗誦. 且以竹簡寫之, 尋常人如何辦得竹簡如此多. 所以人皆暗誦而後已. 伏生亦只是口授尙書二十餘篇. 黃霸就獄, 夏侯勝受尙書於獄中, 又豈得本子. 只被他讀得透徹. 後來著述, 諸公皆以名聞. 漢之經學所以有用.” 賀孫(62이후). *  14:34 或問大學. 曰: “大槪是如此. 只是更要熟讀, 熟時, 滋味自別. 且如喫果子, 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熟時將來喫, 也是喫這果子, 只是滋味別.” 胡泳(69때). *  14:35 問賀孫: “讀大學如何?” 曰: “稍通, 方要讀論語.” 曰: “且未要讀論語. 大學稍通, 正好著心精讀. 前日讀時, 見得前未見得後面, 見得後未接得前面. 今識得大綱統體, 正好熟看. 如喫果實相似, 初只恁地硬咬嚼. 待嚼來嚼去, 得滋味, 如何便住卻! 讀此書功深, 則用博. 昔和靖見伊川, 半年方得大學西銘看. 今人半年要讀多少書, 某且要人讀此, 是如何? 緣此書卻不多, 而規模周備. 凡讀書, 初一項須著十分工夫了, 第二項只費得九分工夫, 第三項便只費六七分工夫. 少刻讀漸多, 自貫通他書, 自不著得多工夫.” 賀孫(62이후). *  14:36 諸生看大學未曉, 而輒欲看論語者, 責之曰: “公如喫飯一般, 未曾有顆粒到口, 如何又要喫這般, 喫那般! 這都是不曾好生去讀書. 某嘗謂人看文字曉不得, 只是未曾著心. 文字在眼前, 他心不曾著上面, 只是恁地略綽將過, 這心元不曾伏殺在這裏. 看他只自恁地豹跳, 不肯在這裏理會, 又自思量做別處去. 這事未了, 又要尋一事做, 這如何要理會得! 今之學者看文字, 且須壓這心在文字上. 逐字看了, 又逐句看; 逐句看了, 又逐段看, 未有曉不得者.” 賀孫(62이후). *  14:37 子淵說大學. 曰: “公看文字, 不似味道只就本子上看, 看來看去, 久之浹洽, 自應有得. 公便要去上面生意, 只討頭不見. 某所成章句或問之書, 已是傷多了. 當初只怕人曉不得, 故說許多. 今人看, 反曉不得. 此一書之間, 要緊只在‘格物’兩字, 認得這裏看, 則許多說自是閑了. 初看須用這本子, 認得要害處, 本子自無可用. 某說十句在裏面, 看得了, 只做一句說了方好. 某或問中已說多了, 卻不說到這般處. 看這一書, 又自與看語孟不同. 語孟中只一項事是一箇道理. 如孟子說仁義處, 只就仁義上說道理; 孔子答顔淵以‘克己復禮’, 只就‘克己復禮’上說道理. 若大學, 卻只統說. 論其功用之極, 至於平天下. 然天下所以平, 卻先須治國; 國之所以治, 卻先須齊家; 家之所以齊, 卻先須修身; 身之所以修, 卻先須正心; 心之所以正, 卻先須誠意; 意之所以誠, 卻先須致知; 知之所以至, 卻先須格物. 本領全只在這兩字上. 又須知如何是格物. 許多道理, 自家從來合有, 不合有. 定是合有. 定是人人都有. 人之心便具許多道理: 見之於身, 便見身上有許多道理; 行之於家, 便是一家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國, 便是一國之中有許多道理; 施之於天下, 便是天下有許多道理. ‘格物’兩字, 只是指箇路頭, 須是自去格那物始得. 只就紙上說千千萬萬, 不濟事.” 賀孫(62이후). *  14:38 答林子淵說大學, 曰: “聖人之書, 做一樣看不得. 有只說一箇下工夫規模, 有首尾只說道理. 如中庸之書, 劈初頭便說‘天命之謂性’. 若是這般書, 全著得思量義理. 如大學, 只說箇做工夫之節目, 自不消得大段思量, 纔看過, 便自曉得. 只是做工夫全在自家身心上, 卻不在文字上. 文字已不著得思量. 說窮理, 只就自家身上求之, 都無別物事. 只有箇仁義禮智, 看如何千變萬化, 也離這四箇不得. 公且自看, 日用之間如何離得這四箇. 如信者, 只是有此四者, 故謂之信. 信, 實也, 實是有此. 論其體, 則實是有仁義禮智; 論其用, 則實是有惻隱·羞惡·恭敬·是非, 更假僞不得. 試看天下豈有假做得仁, 假做得義, 假做得禮, 假做得智! 所以說信者, 以言其實有而非僞也. 更自一身推之於家, 實是有父子, 有夫婦, 有兄弟; 推之天地之間, 實是有君臣, 有朋友. 都不是待後人旋安排, 是合下元有此. 又如一身之中, 裏面有五臟六腑, 外面有耳目口鼻四肢, 這是人人都如此. 存之爲仁義禮智, 發出來爲惻隱·羞惡·恭敬·是非. 人人都有此. 以至父子兄弟夫婦朋友君臣, 亦莫不皆然. 至於物, 亦莫不然. 但其拘於形, 拘於氣而不變. 然亦就他一角子有發見處: 看他也自有父子之親; 有牝牡, 便是有夫婦; 有大小, 便是有兄弟; 就他同類中各有群衆, 便是有朋友; 亦有主腦, 便是有君臣. 只緣本來都是天地所生, 共這根蔕, 所以大率多同. 聖賢出來撫臨萬物, 各因其性而導之. 如昆蟲草木, 未嘗不順其性, 如取之以時, 用之有節: 當春生時‘不殀夭, 不覆巢, 不殺胎; 草木零落, 然後入山林; 獺祭魚, 然後虞人入澤梁; 豺祭獸, 然後田獵’. 所以能使萬物各得其所者, 惟是先知得天地本來生生之意.” 賀孫(62이후). *  14:39 問大學. 曰: “看聖賢說話, 所謂坦然若大路然. 緣後來人說得崎嶇, 所以聖賢意思難見.” 賀孫(62이후). *  14:40 聖賢形之於言, 所以發其意. 後人多因言而失其意, 又因注解而失其主. 凡觀書, 且先求其意, 有不可曉, 然後以注通之. 如看大學, 先看前後經亦自分明, 然後看傳. 可學(62때). *  14:41 大學諸傳, 有解經處, 有只引經傳贊揚處. 其意只是提起一事, 使人讀著常惺惺地. 道夫(60이후). *  14:42 伊川舊日敎人先看大學, 那時未有解說, 想也看得鶻突. 而今看注解, 覺大段分曉了, 只在子細去看. 賀孫(62이후). *  14:43 “看大學, 且逐章理會. 須先讀本文, 念得, 次將章句來解本文, 又將或問來參章句. 須逐一令記得, 反覆尋究, 待他浹洽. 旣逐段曉得, 將來統看溫尋過, 這方始是. 須是靠他這心, 若一向靠寫底, 如何得.” 又曰: “只要熟, 不要貪多.” 道夫(60이후). *  14:44 聖人不令人懸空窮理, 須要格物者, 是要人就那上見得道理破, 便實. 只如大學一書, 有正經, 有注解, 有或問. 看來看去, 不用或問, 只看注解便了; 久之, 又只看正經便了; 又久之, 自有一部大學在我胸中, 而正經亦不用矣. 然不用某許多工夫, 亦看某底不出; 不用聖賢許多工夫, 亦看聖賢底不出. 大雅(49이후). *  14:45 或問: “大學解已定否?” 曰: “據某而今自謂穩矣. 只恐數年後又見不穩, 這箇不由自家.” 問中庸解. 曰: “此書難看. 大學本文未詳者, 某於或問則詳之. 此書在章句, 其或問中皆是辨諸家說理未必是. 有疑處, 皆以‘蓋’言之.” 淳(61·70때). *  14:46 大學章句次第得皆明白易曉, 不必或問. 但致知·格物與誠意較難理會, 不得不明辨之耳. 人傑(51이후). *  14:47 子淵問大學或問. 曰: “且從頭逐句理會, 到不通處, 卻看章句. 或問乃注脚之注脚, 亦不必深理會.” 賀孫(62이후). *  14:48 “學者且去熟讀大學正文了, 又子細看章句. 或問未要看, 俟有疑處, 方可去看.” 又曰: “某解書不合太多. 又先准備學者, 爲他設疑說了. 他未曾疑到這上, 先與說了, 所以致得學者看得容易了. 聖人云: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 須是敎他疑三朝五日了, 方始與說他, 便通透. 更與從前所疑慮, 也會因此觸發, 工夫都在許多思慮不透處. 而今卻是看見成解底, 都無疑了. 吾儒與老莊學皆無傳, 惟有釋氏常有人. 蓋他一切辦得不說, 都待別人自去敲磕, 自有箇通透處. 只是吾儒又無這不說底, 若如此, 少間差異了.” 又曰: “解文字, 下字最難. 某解書所以未定, 常常更改者, 只爲無那恰好底字子. 把來看, 又見不穩當, 又著改幾字. 所以橫渠說命辭爲難.” 賀孫(62이후). *  14:49 某作或問, 恐人有疑, 所以設此, 要他通曉. 而今學者未有疑, 卻反被這箇生出疑! 賀孫(62이후). *  14:50 或問朱敬之: “有異聞乎?” 曰: “平常只是在外面聽朋友問答, 或時裏面亦只說某病痛處得.” 一日, 敎看大學, 曰: “我平生精力盡在此書. 先須通此, 方可讀書.” 賀孫(62이후). *  14:51 某於大學用工甚多. 溫公作通鑑, 言: “臣平生精力, 盡在此書.” 某於大學亦然. 論孟中庸, 卻不費力. 友仁(69때). *  14:52 大學一日只看二三段時, 便有許多修處. 若一向看去, 便少. 不是少, 只是看得草草. *  14:53 某解注書, 不引後面說來證前說, 卻引前說去證後說. 蓋學者方看此, 有未曉處, 又引他處, 只見難曉. 大學都是如此. 僩(69이후). *  14:54 說大學啓蒙畢, 因言: “某一生只看得這兩件文字透, 見得前賢所未到處. 若使天假之年, 庶幾將許多書逐件看得恁地, 煞有工夫.” 賀孫(62이후). * *    序 *  14:55 亞夫問: “大學序云: ‘旣與之以仁義禮智之性, 又有氣質之稟.’ 所謂氣質, 便是剛柔·强弱·明快·遲鈍等否?” 曰: “然.” 又云: “氣, 是那初稟底; 質, 是成這模樣了底. 如金之礦, 木之萌芽相似.” 又云: “只是一箇陰陽五行之氣, 滾在天地中, 精英者爲人, 渣滓者爲物; 精英之中又精英者, 爲聖, 爲賢; 精英之中渣滓者, 爲愚, 爲不肖.” 恪(64때). *  14:56 問: “‘一有聰明睿智能盡其性者, 則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何處見得天命處?” 曰: “此也如何知得. 只是才生得一箇恁地底人, 定是爲億兆之君師, 便是天命之也. 他旣有許多氣魄才德, 決不但已, 必統御億兆之衆, 人亦自是歸他. 如三代已前聖人都是如此. 及至孔子, 方不然. 然雖不爲帝王, 也閑他不得, 也做出許多事來, 以敎天下後世, 是亦天命也.” 僩(69이후). *  14:57 問: “‘天必命之以爲億兆之君師’, 天如何命之?” 曰: “只人心歸之, 便是命.” 問: “孔子如何不得命?” 曰: “中庸云: ‘大德必得其位’, 孔子卻不得. 氣數之差至此極, 故不能反.” 可學(62때). *  14:58 問“繼天立極.” 曰: “天只生得許多人物, 與你許多道理. 然天卻自做不得, 所以生得聖人爲之修道立敎, 以敎化百姓, 所謂‘裁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是也. 蓋天做不得底, 卻須聖人爲他做也.” 僩(69이후). *  14:59 問: “‘各俛焉以盡其力.’ 下此‘俛’字何謂?” 曰: “‘俛’字者, 乃是刺著頭, 只管做將去底意思.” 友仁(69때). *  14:60 問: “外有以極其規模之大, 內有以盡其節目之詳.” 曰: “這个須先識得外面一个規模如此大了, 而內做工夫以實之. 所謂規模之大, 凡人爲學, 便當以‘明明德, 新民, 止於至善’, 及‘明明德於天下’爲事, 不成只要獨善其身便了. 須是志於天下, 所謂‘志伊尹之所志, 學顔子之所學也’. 所以大學第二句便說‘在新民’.” 僩(69이후). *  14:61 明德, 新民, 便是節目; 止於至善, 便是規模之大. 道夫(60이후). *  14:62 仁甫問: “釋氏之學, 何以說爲‘高過於大學而無用?’ ”曰: “吾儒更著讀書, 逐一就事物上理會道理. 他便都掃了這个, 他便恁地空空寂寂, 恁地便道事都了. 只是無用. 德行道藝, 藝是一介至末事, 然亦皆有用. 釋氏若將些子事付之, 便都沒奈何.” 又曰: “古人志道, 據德, 而游於藝: 禮樂射御書數, 數尤爲最末事. 若而今行經界, 則算法亦甚有用. 若時文整篇整卷, 要作何用耶! 徒然壞了許多士子精神.” 賀孫(62이후). * *    經上 *  14:63 大學首三句說一箇體統, 用力處卻在致知·格物. 端蒙(50이후). *  14:64 天之賦於人物者謂之命, 人與物受之者謂之性, 主於一身者謂之心, 有得於天而光明正大者謂之明德. 敬仲(62때). <以下明明德.> *  14:65 或問: “明德便是仁義禮智之性否?” 曰: “便是.” *  14:66 或問: “所謂仁義禮智是性, 明德是主於心而言?” 曰: “這个道理在心裏光明照徹, 無一毫不明.” *  14:67 明德是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  14:68 “明明德”, 明只是提撕也. 士毅(미상). *  14:69 學者須是爲己. 聖人敎人, 只在大學第一句“明明德”上. 以此立心, 則如今端己斂容, 亦爲己也; 讀書窮理, 亦爲己也; 做得一件事是實, 亦爲己也. 聖人敎人持敬, 只是須著從這裏說起. 其實若知爲己後, 卽自然著敬. 方子(59이후). *  14:70 “明明德”乃是爲己工夫. 那个事不是分內事? 明德在人, 非是從外面請入來底. 蓋卿(65때). *  14:71 爲學只“在明明德”一句. 君子存之, 存此而已; 小人去之, 去此而已. 一念竦然, 自覺其非, 便是明之之端. 儒用(70때). *  14:72 大學“在明明德”一句, 當常常提撕. 能如此, 便有進步處. 蓋其原自此發見. 人只一心爲本. 存得此心, 於事物方知有脈絡貫通處. 季札(47·66때). *  14:73 “在明明德”, 須是自家見得這物事光明燦爛, 常在目前, 始得. 如今都不曾見得. 須是勇猛著起精神, 拔出心肝與它看, 始得! 正如人跌落大水, 浩無津涯, 須是勇猛奮起這身, 要得出來, 始得! 而今都只汎汎聽他流將去. *  14:74 或以“明明德”譬之磨鏡. 曰: “鏡猶磨而後明. 若人之明德, 則未嘗不明. 雖其昏蔽之極, 而其善端之發, 終不可絶. 但當於其所發之端, 而接續光明之, 令其不昧, 則其全體大用可以盡明. 且如人知己德之不明而欲明之. 只這知其不明而欲明之者, 便是明德, 就這裏便明將去.” 僩(69이후). *  14:75 “明明德”, 如人自云, 天之所與我, 未嘗昏. 只知道不昏, 便不昏矣. 僩(69이후). *  14:76 “明明德”, 是明此明德, 只見一點明, 便於此明去. 正如人醉醒, 初間少醒, 至於大醒, 亦只是一醒. 學者貴復其初, 至於已到地位, 則不著个“復”字. 可學(62때). *  14:77 問“明明德”. 曰: “人皆有个明處, 但爲物欲所蔽, 剔撥去了. 只就明處漸明將去. 然須致知·格物, 方有進步處, 識得本來是甚麽物.” 季札(47·66때). *  14:78 明德未嘗息, 時時發見於日用之間. 如見非義而羞惡, 見孺子入井而惻隱, 見尊賢而恭敬, 見善事而歎慕, 皆明德之發見也. 如此推之, 極多. 但當因其所發而推廣之. 僩(69이후). *  14:79 明德, 謂得之於己, 至明而不昧者也. 如父子則有親, 君臣則有義, 夫婦則有別, 長幼則有序, 朋友則有信, 初未嘗差也. 苟或差焉, 則其所得者昏, 而非固有之明矣. 履孫(65때). *  14:80 人本來皆具此明德, 德內便有此仁義禮智四者. 只被外物汨沒了不明, 便都壞了. 所以大學之道, 必先明此明德. 若能學, 則能知覺此明德, 常自存得, 便去刮剔, 不爲物欲所蔽. 推而事父孝, 事君忠, 推而齊家·治國·平天下, 皆只此理. 大學一書, 若理會得這一句, 便可迎刃而解. 椿(59때). *  14:81 明德, 也且就切近易見處理會, 也且慢慢自見得. 如何一日便都要識得! 如出必是告, 反必是面, 昏定晨省, 必是昏定晨省, 這易見. “徐行後長者謂之弟, 疾行先長者謂之不弟”, 這也易見, 有甚不分明. 如“九族旣睦”, 是堯一家之明德; “百姓昭明”, 是堯一國之明德; “黎民於變時雍”, 是堯天下之明德. 如“博弈好飮酒, 不顧父母之養”, 是不孝; 到能昏定晨省, 冬溫夏凊, 可以爲孝. 然而“從父之令”, 今看孔子說, 卻是不孝. 須是知父之命當從, 也有不可從處. 蓋“與其得罪於鄕黨州閭, 甯熟諫”. “諭父母於道”, 方是孝. 賀孫(62이후). *  14:82 曾興宗問: “如何是‘明明德’?” 曰: “明德是自家心中具許多道理在這裏. 本是个明底物事, 初無暗昧, 人得之則爲德. 如惻隱·羞惡·辭讓·是非, 是從自家心裏出來, 觸著那物, 便是那个物出來, 何嘗不明. 緣爲物欲所蔽, 故其明易昏. 如鏡本明, 被外物點汙, 則不明了. 少間磨起, 則其明又能照物.” 又云: “人心惟定則明. 所謂定者, 非是定於這裏, 全不修習, 待他自明. 惟是定後, 卻好去學. 看來看去, 久後自然徹.” 又有人問: “自覺胸中甚昧.” 曰: “這明德亦不甚昧. 如適來說惻隱·羞惡·辭遜·是非等, 此是心中元有此等物. 發而爲惻隱, 這便是仁; 發而爲羞惡, 這便是義; 發而爲辭遜·是非, 便是禮·智. 看來這个亦不是甚昧, 但恐於義理差互處有似是而非者, 未能分別耳. 且如冬溫夏凊爲孝, 人能冬溫夏凊, 這便是孝. 至如子從父之令, 本似孝, 孔子卻以爲不孝. 與其得罪於鄕閭, 不若且諫父之過, 使不陷於不義, 這處方是孝. 恐似此處, 未能大故分別得出, 方昧. 且如齊宣王見牛之觳觫, 便有不忍之心, 欲以羊易之. 這便見惻隱處, 只是見不完全. 及到‘興甲兵, 危士臣’處, 便欲快意爲之. 是見不精確, 不能推愛牛之心而愛百姓. 只是心中所見所好如此, 且恁地做去. 又如胡侍郎讀史管見, 其爲文字與所見處甚好, 到他自做處全相反. 不知是如何, 卻似是兩人做事一般, 前日所見是一人, 今日所行又是一人. 是見不眞確, 致得如此.” 卓(미상). *  14:83 或問: “‘明明德’, 是於靜中本心發見, 學者因其發見處從而窮究之否?” 曰: “不特是靜, 雖動中亦發見. 孟子將孺子將入井處來明這道理. 蓋赤子入井, 人所共見, 能於此發端處推明, 便是明. 蓋人心至靈, 有什麽事不知, 有什麽事不曉, 有什麽道理不具在這裏. 何緣有不明? 爲是氣稟之偏, 又爲物欲所亂. 如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 四肢之於安佚, 所以不明. 然而其德本是至明物事, 終是遮不得, 必有時發見. 便敎至惡之人, 亦時乎有善念之發. 學者便當因其明處下工夫, 一向明將去. 致知·格物, 皆是事也. 且如今人做得一件事不是, 有時都不知, 便是昏處; 然有時知得不是, 這个便是明處. 孟子發明赤子入井. 蓋赤子入井出於倉猝, 人都主張不得, 見之者莫不有怵惕惻隱之心.” 又曰: “人心莫不有知, 所以不知者, 但氣稟有偏, 故知之有不能盡. 所謂致知者, 只是敎他展開使盡.” 又曰: “看大學, 先將經文看敎貫通. 如看或問, 須全段相參酌, 看敎他貫通, 如看了隻手, 將起便有五指頭, 始得. 今看或問, 只逐些子看, 都不貫通, 如何得.” 子蒙(미상). *  14:84 或問“明明德”云云. 曰: “不消如此說, 他那注得自分曉了. 只要你實去體察, 行之於身. 須是眞个明得這明德是怎生地明, 是如何了得它虛靈不昧. 須是眞个不昧, 具得衆理, 應得萬事. 只恁地說, 不濟得事.” 又曰: “如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五者, 皆‘明明德’事. 格物·致知, 便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便是要行得分明. 若是格物·致知有所未盡, 便是知得這明德未分明; 意未盡誠, 便是這德有所未明; 心有不正, 則德有所未明; 身有不修, 則德有所未明. 須是意不可有頃刻之不誠, 心不可有頃刻之不正, 身不可有頃刻之不修, 這明德方常明.” 問: “所謂明德, 工夫也只在讀書上?” 曰: “固是在讀書上. 然亦不專是讀書, 事上也要理會. 書之所載者, 固要逐件理會. 也有書所不載, 而事上合當理會者; 也有古所未有底事, 而今之所有當理會者極多端.” 僩(69이후). 燾錄別出. *  14:85 問: “或謂‘虛靈不昧’, 是精靈底物事; ‘具衆理’, 是精靈中有許多條理; ‘應萬事’, 是那條理發見出來底.” 曰: “不消如此解說. 但要識得這明德是甚物事, 便切身做工夫, 去其氣稟物欲之蔽. 能存得自家個虛靈不昧之心, 足以具衆理, 可以應萬事, 便是明得自家明德了. 若只是解說‘虛靈不昧’是如何, ‘具衆理’是如何, ‘應萬事’又是如何, 卻濟得甚事!” 又問: “明之之功, 莫須讀書爲要否?” 曰: “固是要讀書. 然書上有底, 便可就書理會; 若書上無底, 便著就事上理會; 若古時無底, 便著就而今理會. 蓋所謂明德者, 只是一個光明底物事. 如人與我一把火, 將此火照物, 則無不燭. 自家若滅息著, 便是暗了明德; 能吹得著時, 又是明其明德. 所謂明之者,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 皆明之之事, 五者不可闕一. 若闕一, 則德有所不明. 蓋致知·格物, 是要知得分明; 誠意·正心·修身, 是要行得分明. 然旣明其明德, 又要功夫無間斷, 使無時而不明, 方得. 若知有一之不盡, 物有一之未窮, 意有頃刻之不誠, 心有頃刻之不正, 身有頃刻之不修, 則明德又暗了. 惟知無不盡, 物無不格, 意無不誠, 心無不正, 身無不修, 卽是盡明明德之功夫也.” 燾(70때). *  14:86 問: “大學注言: ‘其體虛靈而不昧; 其用鑒照而不遺.’ 此二句是說心, 說德?” 曰: “心·德皆在其中, 更子細看.” 又問: “德是心中之理否?” 曰: “便是心中許多道理, 光明鑒照, 毫髮不差.” 㝢(61이후). 按: 注是舊本. *  14:87 “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禪家則但以虛靈不昧者爲性, 而無以具衆理以下之事. 僩(69이후). *  14:88 問: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是如何?” 曰: “人固有理會得處, 如孝於親, 友於弟; 如水之必寒, 火之必熱, 不可謂他不知. 但須去致極其知, 因那理會得底, 推之於理會不得底, 自淺以至深, 自近以至遠.” 又曰: “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 以求至乎其極.” 廣(65이후). *  14:89 問: “‘大學之道, 在明明德’. 此‘明德’, 莫是‘天生德於予’之‘德’?” 曰: “莫如此問, 只理會明德是我身上甚麽物事. 某若理會不得, 便應公‘是“天生德於予”之“德”’, 公便兩下都理會不得. 且只就身上理會, 莫又引一句來問. 如此, 只是紙上去討.” 又曰: “此明德是天之予我者, 莫令汙穢, 當常常有以明之.” 驤(60·65때). *  14:90 問: “‘明明德’意思, 以平旦驗之, 亦見得於天者未嘗不明.” 曰: “不要如此看. 且就明德上說, 如何又引別意思證? 讀書最不要如此.” 賀孫遂就明德上推說. 曰: “須是更仔細, 將心體驗. 不然, 皆是閑說.” 賀孫(62이후). *  14:91 傳敬子說“明明德”. 曰: “大綱也是如此. 只是說得恁地孤單, 也不得. 且去子細看. 聖人說這三句, 也且大槪恁地說, 到下面方說平天下至格物八者, 便是明德新民底工夫. 就此八者理會得透徹, 明德·新民都在這裏. 而今且去子細看, 都未要把自家言語意思去攙他底. 公說胸中有箇分曉底, 少間捉摸不著, 私意便從這裏生, 便去穿鑿. 而今且去熟看那解, 看得細字分曉了, 便曉得大字, 便與道理相近. 道理在那無字處自然見得. 而今且說格物這箇事理, 當初甚處得來?如今如何安頓它?逐一只是虛心去看萬物之理, 看日用常行之理, 看聖賢所言之理.” 蘷. *  14:92 明德, 謂本有此明德也. “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其良知·良能, 本自有之, 只爲私欲所蔽, 故暗而不明. 所謂“明明德”者, 求所以明之也. 譬如鏡焉: 本是箇明底物, 緣爲塵昏, 故不能照; 須是磨去塵垢, 然後鏡復明也. “在新民”, 明德而後能新民. 德明(44이후). 以下明德新民. *  14:93 或問: “明德新民, 還須自家德十分明後, 方可去新民?” 曰: “不是自家德未明, 便都不管著別人, 又不是硬要去新他. 若大段新民, 須是德十分明, 方能如此. 若小小效驗, 自是自家這裏如此, 他人便自觀感. ‘一家仁, 一國興仁; 一家讓, 一國興讓’, 自是如此.” 子蒙(미상). *  14:94 問: “明德新民, 在我有以新之. 至民之明其明德, 卻又在它?” 曰: “雖說是明己德, 新民德, 然其意自可參見. ‘明明德於天下’, 自新以新其民, 可知.” 㝢(61이후). *  14:95 蜚卿問: “新民, 莫是‘修道之謂敎’, 有以新之否?” '''비경의 질문: 신민(新民)이라는 것은,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를 가지고 새롭게 하는 것 아닙니까? 曰: “‘道之以德’, 是‘明明德’; ‘齊之以禮’, 是以禮新民, 也是‘修道之謂敎’. 有禮樂·法度·政刑, 使之去舊汙也.” 驤(60·65때). '''대답: '덕으로 인도하는 것'은 '명명덕'이며, '예로써 가지런하게 하는 것'은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요, 또한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예와 음악, 법도와 형정을 두어 백성들이 옛 더러움을 제거하도록 하는 것이다. {{글 숨김|제목=낱말풀이|내용= *蜚卿(비경): 사람 이름. 동비경. * 新民(신민): 백성을 새롭게 하다, 갱신하다. * 莫是(막시): ~이 아니겠는가? (의문을 나타내는 표현) * 修道之謂敎(수도지위교):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 有以新之否(유이신지부): 그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 * 道之以德(도지이덕): 덕으로 인도하다. * 明明德(명명덕): 밝은 덕을 밝히다. * 齊之以禮(제지이례): 예로써 다스리다. * 是以禮新民(시이례신민): 이는 예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 也是(야시): 이것 또한 ~이다. * 有禮樂(유예악): 예와 음악이 있다. * 法度(법도): 법도, 규칙이 있다. * 政刑(정형): 정치와 형벌이 있다. * 使之(사지): ~하게 하다. * 去舊汙也(거구오야): 옛 더러움을 제거하다. }} *  14:96 至善, 只是十分是處. 賀孫(62이후). '''지선(至善)은 100% 옳은 지점이다. <以下止至善.> '''<이 밑으로 지어지선에 관한 이야기> *  14:97 至善, 猶今人言極好. 方子(59이후). '''지선(至善)은 요즘 말로 '최고로 좋다(極好)' 같은 것이다. *  14:98 凡曰善者, 固是好. 然方是好事, 未是極好處. 必到極處, 便是道理十分盡頭, 無一毫不盡, 故曰至善. 僩(69이후). '''대개 선(善)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좋다'. 하지만 간신히 좋은 것<ref>方是는 '겨우'나 '조금'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간신히 '좋음'의 합격선을 넘은 정도라는 뜻이다.</ref>이지 아직 최고로 좋은 지점은 아니다. 반드시 최고로 좋은 지점에 도달해야 도리가 털끝만큼도 남김 없이 100% 완전해진다<ref>盡頭는 지극한 지점, 완전한 것의 의미이다. 18:94 참조.</ref>. 그래서 지선(至善)이라고 한다. *  14:99 至善是極好處. 且如孝: 冬溫夏凊, 昏定晨省, 雖然是孝底事, 然須是能‘聽於無聲, 視於無形’, 方始是盡得所謂孝. 履孫(65때). '''지선(至善)은 최고로 좋은 지점이다. 예컨대 효(孝)같은 경우 '겨울에 따숩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고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살피고 문안하는 것'<ref>예기 곡례상에서 효자의 태도를 형용하는 부분이다.</ref>이야 물론 효행이긴 하지만 반드시 '부모님 안계신 곳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리고 모습이 보일 지경(聽於無聲, 視於無形)'<ref>예기 곡례상</ref> 이어야 소위 효를 완전히 다하는 것이다. *  14:100 至善是个最好處. 若十件事做得九件是, 一件不盡, 亦不是至善. 震(65때). '''지선(至善)은 가장 좋은 지점이다. 열 건 가운데 아홉 건은 잘 하고 한 건을 미진하게 하면 역시 지선(至善)은 아닌 것이다. *  14:101 說一箇“止”字, 又說一箇“至”字, 直是要到那極至處而後止. 故曰: ‘君子無所不用其極’也. 德明(44이후). '''(지어지선에는) '머물다(止)'라는 글자와 '지극하다(至)'라는 글자가 있으니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모든 경우 최선(極)을 다한다'<ref>대학 본문에서 지어지선을 해설하는 말이다</ref>고 하였다. *  14:102 善, 須是至善始得. 如通書“純粹至善”, 亦是. 泳(66때). '''선은 지선이어야만 한다. 통서(通書)의 '순수지선(純粹至善)'도 같은 뜻이다.<ref>주돈이가 지은 [https://zh.wikisource.org/zh-hant/%E9%80%9A%E6%9B%B8_(%E9%99%84%E6%9C%B1%E7%86%B9%E8%A7%A3) 통서]의 성상(誠上)을 보라.</ref> *  14:103 問: “‘必至於是而不遷’, 如何?” '''질문: '반드시 여기에 이르러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ref>[https://zh.wikisource.org/zh-hant/%E5%9B%9B%E6%9B%B8%E7%AB%A0%E5%8F%A5%E9%9B%86%E8%A8%BB/%E5%A4%A7%E5%AD%B8%E7%AB%A0%E5%8F%A5 대학장구]를 보라.</ref>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曰: “未至其地, 則求其至; 旣至其地, 則不當遷動而之它也.” 德明(44이후). '''대답: 그 지점에 이르기 전에는 반드시 그 지점에 이르기를 추구하고 그 지점에 이른 뒤에는 다른 지점으로 옮겨 가서는 안 된다. *  14:104 問: “‘止於至善’, 向承敎, 以爲君止於仁, 臣止於敬, 各止其所而行其所止之道. 知此而能定. 今日先生語竇文卿, 又云: ‘“坐如尸”, 坐時止也; “立如齊”, 立時止也.’ 豈以自君臣父子推之於萬事, 無不各有其止?” '''질문: '지어지선'은 저번에 가르쳐주시기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 각각 (최선의) 자리에 머물러 그 머문 바 도리를 실천한다.이 것(머물 자리)을 알면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두문경에게 또 말씀하시기를 ' "시동(尸童)<ref>과거 제사를 지낼 적에 제사를 받는 귀신이 빙의할 몸 역할을 맡은 어린아이를 말한다.</ref>처럼 앉으라"는 것은 앉아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요 "제사 모시듯 서 있으라"<ref>좌여시 입여제는 모두 예기 곡례상의 인용이다.</ref>는 것은 서있을 때의 최선의 머물 지점(止)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임금과 신하, 아비와 자식의 관계에서부터 세상 만사로 미루어 보면 각각의 사태에 최선의 머물 지점이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까? 曰: “固然. ‘定公問君使臣, 臣事君. 子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君與臣, 是所止之處; 禮與忠, 是其所止之善. 又如‘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之屬, 無不皆然.” 德明(44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노나라 정공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법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예로 부리고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고 하였다.<ref>논어 팔일 19 (3.19)를 보라.</ref> '임금'과 '신하'는 멈춘 지점이다. '예'와 '충'은 머물러야 할 최선이다. 또 '볼 때는 밝게 보고자 하고 들을 때는 분명히 듣고자 하고 낯빛은 부드럽게 하고자 하고 용모는 공손히 하고자 한다'는 등이 모두 그러하다.<ref>논어 계씨편 10 (16.10)을 보라.</ref> *  14:105 問至善. '''지선(至善)에 대하여 물었다. 先生云: “事理當然之極也.” '''선생의 대답: 사리상 지극히 마땅한 것이다. “恐與伊川說‘艮其止, 止其所也’之義一同. 謂有物必有則, 如父止於慈, 子止於孝, 君止於仁, 臣止於敬, 萬物庶事莫不各有其所. 得其所則安, 失其所則悖. 所謂‘止其所’者, 卽止於至善之地也.” '''이천이 말한 '간기지(艮其止)라 함은 제자리에 머문다는 것이다'<ref>주역 간(艮)괘에 대한 이천역전의 주석이다.</ref>와 뜻이 일치하는 듯합니다. 어떤 사건/사물이 있으면 그 사건/사물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규칙이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는 자애로움에 머물고 자식은 효에 머물고 임금은 인에 머물고 신하는 경에 머무는 등 세상 모든 사건과 사물이 자기가 머물 '제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리를 얻으면 편안하고 제자리를 잃으면 어그러집니다. 이른바 '제자리에 머문다'라는 것은 최선의 자리에 머문다는 말입니다. 曰: “只是要如此.” 卓(미상). '''대답: 그저 그렇게 하면 된다. *  14:106 或問: “何謂明德?” '''누군가의 질문: 무엇을 명덕이라 합니까? 曰: “我之所得以生者, 有許多道理在裏, 其光明處, 乃所謂明德也. ‘明明德’者, 是直指全體之妙. 下面許多節目, 皆是靠明德做去.” '''대답: 우리가 그것을 얻어서 (그 덕분에)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수많은 도리가 그 안에 있어 밝게 빛나는 곳, 그것이 이른바 명덕이다. '명덕을 밝힌다'는 것은 전체(全體)의 묘(妙)를 직설적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 아래의 여러 절목들<ref>3강령 8조목 가운데 명명덕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말한다.</ref> 모두 명덕에 의지하여 해나가는 것들이다. 又問: “旣曰明德, 又曰至善, 何也?” '''재질문: 이미 명덕이라고 했으면서 다시 지선(至善)이라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明得一分, 便有一分; 明得十分, 便有十分; 明得二十分, 乃是極至處也.” '''대답: 10퍼센트를 밝히면 10퍼센트를 얻고 100퍼센트를 밝히면 100퍼센트를 얻는다. 200퍼센트 밝힌 것이 바로 지극한 지점이다. 又曰: “明德是下手做, 至善是行到極處.” '''다시 대답: 명덕은 착수한 것이고 지선은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이다. 又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於那極至處.” 銖(67이후). '''다시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반드시 저 지극한 곳에 도달하여 머물러야 한다. <以下明德止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07 大學只前面三句是綱領. 如“孩提之童, 無不知愛其親; 及其長也, 無不知敬其兄”, 此良心也. 良心便是明德, 止是事事各有个止處. 如“坐如尸, 立如齊”, 坐立上須得如此, 方止得. 又如“視思明”以下, 皆“止於至善”之意. 大學須自格物入, 格物從敬入最好. 只敬, 便能格物. 敬是個瑩徹底物事. 今人卻塊坐了, 相似昏倦, 要須提撕著. 提撕便敬; 昏倦便是肆, 肆便不敬. 德明(44이후). '''대학은 앞쪽 세 구문이 강령(綱領)이다. 예컨대 '어른 손 잡고 다닐 나이의 어린 아이 중에 자신의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 자라고 나서는 자신의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가 없다.'<ref>맹자 7A:15</ref>는 것은 착한 마음(良心)이다. 착한 마음이 곧 명덕(明德)이고, 머무르다(止)는 것은 사사건건 머무를 지점이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앉을 때는 시동(尸童)처럼, 설 때는 재계(齊戒)한 것 처럼'<ref>예기 곡례상. 시동은 제사 때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앉혀두는 어린 아이이다. 조상신이 강림해야 하므로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ref>의 경우 앉을 때나 서 있을 때는 응당 이렇게 해야만 머무를(止) 수 있다.<ref>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것은 어떠한 사태에 있어 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태도를 취함을 말한다. '앉기'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동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ref> 또 예를 들어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이하(의 아홉 항목의 '생각하며')는 모두 '가장 좋은 지점에 머무른다'는 의미이다.<ref>논어 계씨 10장을 언급한 것이다. 10장에서 공자는 '군자는 아홉 가지 생각함이 있다. 보는 것은 밝게 보기를 생각하며 듣는 것은 또렷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얼굴빛은 온화하게 하기를 생각하며 ... 소득이 있으면 의로움을 생각한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사태에서 최선의 자세는 무엇인지에 대한 말이다.</ref> 대학은 격물(格物)<ref>격물에 관해서는 다음 권(15)에 자세하다. 여기서는 우선 '사물과 사태에 직접 나아가 경험한다' 정도로 알아두고 넘어가도록 하겠다.</ref>로 들어가야 하고<ref>학문을 공간적으로 비유한 것이다. 대학이라는 경서를 매개로 하는 학문연마는 '격물'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는 것.</ref> 격물은 경(敬)으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ref>앞서와 같은 공간유비이다. 경(敬)이란 의식이 또렷하게 각성된 상태, 수습된 상태, 집중한 상태를 말한다. 번역자 본인은 이것이 명상상태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나 주희는 다르다고 주장한다.</ref> '경'하면 격물할 수 있다. 경은 형철(瑩徹: 밝고 맑고 투명)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반대로 뚱하니 앉아<ref>塊는 흙덩이처럼 티미하고 멍하니 내던져저 있는 모습이다</ref> 흐리멍텅(昏倦)하다. (그래서는 안 되고) 반드시 깨어있어야(提撕) 한다. 깨어있는 것이 곧 경이다. 흐리멍텅하면 사(肆)<ref>보통 '방사하다'고 풀이한다. 자기 단속 없이 축 풀어진 모습이다.</ref>이다. 사(肆)는 경(敬)의 정반대이다. *  14:108 問: “明德·至善, 莫是一个否?” '''질문: 명덕과 지선은 하나 아닙니까? 曰: “至善是明德中有此極至處. 如君止於仁, 臣止於敬, 父止於慈, 子止於孝, 與國人交止於信, 此所謂‘在止於至善’. 只是又當知如何而爲止於仁, 如何而止於敬, 如何而止於慈孝, 與國人交之信. 這裏便用究竟一个下工夫處.” '''대답: 지선은 명덕 안에 있는 지극한 지점이다. 예를 들어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아비는 자(慈)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은 신(信)에 머무는 등이 이른바 '지선에 머무는 데 있다'이다. 다만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인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경(敬)에 머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자(慈)나 효(孝)에 머물고 나라의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신(信)에 머물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곳이 결국 실제로 힘을 쓸 지점이다. 景紹曰: “止, 莫是止於此而不過否?” '''경소의 말: 지(止)는 그 지점에 멈추고 지나쳐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 아닙니까? 曰: “固是. 過與不及, 皆不濟事. 但仁敬慈孝, 誰能到得這裏? 聞有不及者矣, 未聞有過於此者也. 如舜之命契, 不過是欲使‘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只是此五者. 至於後來聖賢千言萬語, 只是欲明此而已. 這个道理, 本是天之所以與我者, 不爲聖賢而有餘, 不爲愚不肖而不足. 但其間節目, 須當講學以明之, 此所以讀聖賢之書, 須當知他下工夫處. 今人只據他說一兩字, 便認以爲聖賢之所以爲聖賢者止此而已, 都不窮究著實, 殊不濟事. 且如論語相似: 讀‘學而時習之’, 須求其所謂學者如何?如何謂之時習?旣時習, 如何便能說?‘有朋自遠方來’, 朋友因甚而來自遠方? 我又何自而樂? 須著一一與他考究. 似此用工, 初間雖覺得生受費力, 久後讀書甚易爲工, 卻亦濟事.” 道夫(60이후). '''대답: 물론 그렇다. 지나쳐 넘어가거나 도달하지 못하거나, 모두 해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인, 경, 효, 자의 경우 누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겠나?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들어봤어도 지나쳐 넘어간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순임금이 사도 설에게 명한 것도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하게끔 만드는 것, 이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ref>순임금은 설을 사도에 임명하는데, 사도는 백성의 교화를 담당한 직책이다. 오륜은 순이 설에게 기대한 백성 교화의 내용이다. 설은 상 땅에 봉해져 상나라의 시조가 된다.</ref> 후대 성인과 현인의 수많은 말들의 경우도 이 다섯 가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 뿐이다. 이 도리는 본래 하늘이 나에게 준 것으로 성인과 현인이라고 더 가지고 있지도 않고 어리석은이라고 부족하게 가지고 있지도 않다. 다만 그 도리 속의 구체적인 대목들은 반드시 강학하여 밝혀야 한다. 이것이 성인과 현인의 책을 읽을 때 반드시 그들이 힘써 노력한 지점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요즘 사람들은 그저 성인과 현인이 말한 한 두 글자 정도에 의거하여 성현이 성현인 이유가 단지 그것 뿐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리하여) 전혀 착실하게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성취가 전혀 없다. 논어의 사례를 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는 구절을 읽었으면 그 이른바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때로 익혔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때때로 익히고 나면 어째서 기쁜(說) 것인지 알려고 해야 한다.<ref>논어 학이편 첫 구절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를 말하는 것이다</ref> '친구가 멀리서 온다면'는 구절을 읽었으면 친구가 왜 멀리서 오는 것인지, 나는 또 왜 즐거운 것인지 반드시 하나하나 탐구해야 한다. 이렇게 노력하면 처음엔 비록 힘들게 느껴지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하고 나면 독서 공부가 매우 쉬워지고 성취가 있게 된다. *  14:109 “明明德”是知, “止於至善”是守. 夫子曰: “知及之, 仁能守之.” 聖賢未嘗不爲兩頭底說話. 如中庸所謂“擇善固執”, 擇善, 便是理會知之事; 固執便是理會守之事. 至書論堯之德, 便說‘欽明’, 舜便說‘濬哲文明, 溫恭允塞’. 欽, 是欽敬以自守; 明, 是其德之聰明. ‘濬哲文明’, 便有知底道理; ‘溫恭允塞’, 便有守底道理. 道夫(60이후). '''명명덕(明明德)은 앎(知)이요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킴(守)이다. 부자께서 '지(知)가 미치고 인(仁)이 지킬 수 있다'<ref>논어 위령공 32(15:32)를 보라</ref>고 하셨다. 성현은 늘 두 갈래로 말한다. 예컨대 중용에서 이른바 '선을 골라 굳게 잡는다(擇善固執)'<ref>중용 20장</ref>의 경우 '선을 골라'는 앎에 주목한 것이요 '굳게 잡는다'는 지킴에 주목한 것이다. 서경(書經)에서 요(堯)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흠명(欽明)'이라고 하였고 순(舜)에 대해서는 '준철문명, 온공윤색(濬哲文明, 溫恭允塞)'<ref>채침의 서집전의 해석에 따르면 준은 깊음, 철은 지혜, 문은 우아함, 명은 밝음이다. 온은 순수하고 온화함, 공은 경건하고 공손함, 윤은 신실하고 정성스러움, 색은 충실함이다.</ref>라고 하였다. '흠'은 경건히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 '명'은 그의 덕의 총명함이다. '준철문명'에는 앎의 도리가 있고 '온공윤색'에는 지킴의 도리가 있다. 양도부 (60이후) <此條所錄恐有誤.> '''<이 조목에는 오류가 있는 듯하다><ref>이러한 주석은 아마도 1270년판의 편집자인 여정덕이 달았을 것이다. 관련해서는 일역판의 주석을 보라.</ref> *  14:110 問: “新民如何止於至善?” '''질문: 신민(新民)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지어지선(止於至善)합니까? 曰: “事事皆有至善處.” '''대답: 일마다 모두 지극히 선한(至善) 지점이 있다. 又曰: “‘善’字輕, ‘至’字重.” 節(64이후). '''다시 대답: '선(善)'자는 가볍고 '지(至)'자는 무겁다.<ref>주희가 경전구문을 풀이할 적에 종종 쓰는 말투이다. '지극히 선한'이라는 구문에서 선하다는 파트보다는 지극하다는 파트가 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ref> 감절(64이후) <以下新民止至善.> '''<이 아래로 신민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1 問: “新民止於至善, 只是要民修身行己, 應事接物, 無不曲當?” '''질문: 신민의 영역에서의 지어지선은 백성들이 스스로를 갈고닦아 몸소 실천하게 하고, 사태에 응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있어서 두루 마땅하게끔 하려는 것 정도인가요? 曰: “雖不可使知之, 亦當使由之, 不出規矩準繩之外.” 節(64이후). '''대답: 비록 (백성들이 도리를) 알게끔 할 수는 없어도 (도리를) 따르고 실천하게 하여 <ref>논어 태백 9(8:9)를 보라.</ref> 선<ref>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모두 측량/제도기구이다. 지켜야 될 선을 그어주는 물건들이므로 자주 '법도' '준칙' 정도를 은유한다.</ref>을 넘지 않게 해야 한다. *  14:112 “止於至善”, 是包“在明明德, 在新民”. 己也要止於至善, 人也要止於至善. 蓋天下只是一个道理, 在他雖不能, 在我之所以望他者, 則不可不如是也. 道夫(60이후). '''지어지선은 명명덕과 신민을 포함한다. 자기 자신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하고 다른사람도 지극히 좋은 지점에 멈춰야 한다. 천하는 하나의 도리일 뿐이니 다른사람이 비록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다른사람에게 거는 기대는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양도부(60이후) <以下明德·新民·至善.> '''<이 아래로는 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관한 조목들> *  14:113 明德·新民, 二者皆要至於極處. 明德, 不是只略略地明德便了; 新民, 不是只略略地新得便休. 須是要止於極至處. 賀孫(62이후). '''명덕과 신민 둘 다 모두 지극한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명덕은 적당히 덕을 밝히고<ref>일역판은 다른 여러 판본을 참조하여 德을 得으로 고쳤다. 이렇게 교감하면 말이 더 부드럽고 뒤쪽 구문과도 통하여 좋아 보인다. 일단은 통행본 그대로(德) 번역하긴 했으나 참고를 위해 각주를 달아둔다.</ref> 마는 게 아니다. 신민은 적당히 백성을 새롭게하고 마는 게 아니다. 지극한 지점에 도달하여 머물도록 해야 한다. 섭하손(62이후) *  14:114 問: “至善, 不是明德外別有所謂善, 只就明德中到極處便是否?” '''질문: 지선(至善)은 명덕 바깥에 별도로 이른바 '선'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명덕 안에서 지극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입니까? 曰: “是. 明德中也有至善, 新民中也有至善, 皆要到那極處. 至善, 隨處皆有. 修身中也有至善, 必要到那盡處; 齊家中也有至善, 亦要到那盡處. 至善, 只是以其極言. 不特是理會到極處, 亦要做到極處. 如‘爲人君, 此於仁’, 固是一个仁, 然仁亦多般, 須是隨處看. 如這事合當如此, 是仁; 那一事又合當如彼, 亦是仁. 若不理會, 只管執一, 便成一邊去. 如‘爲人臣, 止於敬’, 敬亦有多少般, 不可只道擎跽曲拳便是敬. 如盡忠不欺, 陳善閉邪, 納君無過之地, 皆是敬, 皆當理會. 若只執一, 亦成一邊去, 安得謂之至善! 至善只是些子恰好處. 韓文公謂‘軻之死不得其傳’. 自秦漢以來豈無人! 亦只是無那至善, 見不到十分極好處, 做亦不做到十分極處.” 淳(61·70때). 寓同. '''대답: 그렇다. 명덕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고 신민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모두 그 지극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곳곳에 다 있다. 수신(修身)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반드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제가(齊家) 안에도 지선(至善)이 있으니 역시 그 남김없이 완전한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지선(至善)은 극단성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 극단적인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머리로) 이해하고 말 뿐이 아니라 역시 실제로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의 경우 물론 인(仁)의 하나이지만 인에도 여러 양상이 있으니 경우에 따라 달리 보아야 한다. 예컨대 이 일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고 저 경우는 또 저와 같아야 한다는 것도 인이다. 만약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만 고집한다면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문다.'의 경우에도, 경 역시 여러 양상이 있다. 홀(笏)을 높이 들고 무릎 꿇고 앉고 몸을 굽히는 것(擎跽曲拳)만<ref>장자 인간세 1장 참조</ref> 경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충심을 다하고 (임금을) 속이지 않고 선한 것을 말하여 (임금 마음 속의) 삿된 것을 막아서(陳善閉邪)<ref>맹자 이루상 1장(4A:1)</ref> 임금을 잘못 없는 경지로 인도하는 것<ref>춘추좌씨전 장공 19년</ref>이 모두 경(敬)이니 (이러한 여러 양상을) 모두 이해해야 한다. 만약 하나만 고집한다면 역시 한쪽 측면에 치우쳐버린다. (그렇게 되면) 어찌 지선(至善)이라고 할 수 있겠나? 지선(至善)은 꼭 맞는(恰好) 지점들일 뿐이다. 한문공(韓文公)<ref>당나라의 한유</ref>이 '맹가<ref>맹자</ref>가 죽은 후로 전승이 끊겼다'<ref>한유의 에세이 '원도'에 나오는 말이다.</ref>고 하였는데, 진한(秦漢) 이래 어찌 인재가 없었겠는가? 역시 저 지선(至善)이 없어서<ref>문세만 보면 '無那至善' 네 글자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번역해둔다.</ref>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했고 실천의 측면에서도 지극히 좋은 지점을 100퍼센트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진순의 기록(61세, 70세 때). 서우의 기록도 이와 같음. *  14:115 明德, 是我得之於天, 而方寸中光明底物事. 統而言之, 仁義禮智. 以其發見而言之, 如惻隱·羞惡之類; 以其見於實用言之, 如事親·從兄是也. 如此等德, 本不待自家明之. 但從來爲氣稟所拘, 物欲所蔽, 一向昏昧, 更不光明. 而今卻在挑剔揩磨出來, 以復向來得之於天者, 此便是“明明德”. 我旣是明得个明德, 見他人爲氣稟物欲所昏, 自家豈不惻然欲有以新之, 使之亦如我挑剔揩磨, 以革其向來氣稟物欲之昏而復其得之於天者. 此便是“新民”. 然明德·新民, 初非是人力私意所爲, 本自有一箇當然之則, 過之不可, 不及亦不可. 且以孝言之, 孝是明德, 然亦自有當然之則. 不及則固不是, 若是過其則, 必有刲股之事. 須是要到當然之則田地而不遷, 此方是“止於至善”. 泳(66때). '''명덕(明德)이란 하늘로부터 받아서 내 마음(方寸) 속에 빛나고 있는 물건이다. 통틀어 말하자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이다. 그것이 발현된 것으로 말하자면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과 같은 것이고, 실제 작용으로 드러난 것으로 말하자면 부모를 섬기거나 형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본래 스스로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여지껏 타고난 기질(氣稟)<ref>우리 몸과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은 모두 기인데, 이러한 기는 우리가 골라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어진 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품(稟)자를 쓴다. 이것을 소리나는 그대로 '기품'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럴 경우 현대 한국어에서 해당 음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단어인 기품(氣品) 때문에 말이 순하지 않게 된다. 주희에게 있어 기(氣)와 질(質)은 서로 다른 개념이므로 기품을 한국어로 옮길 적에 '기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는 약간의 위험이 있다. 본고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기록해둔다. </ref>에 구속되고 물욕에 가려져 한결같이 혼미하여 밝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것을 도려내고 갈고 닦아서(挑剔揩磨) 과거에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다. 내가 명덕을 밝히고 나면 다른 이가 기질과 물욕 때문에 혼미해진 것을 보았을 때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을 일신하여 그들 또한 나처럼 갈고 닦아 기질과 물욕의 혼미함을 벗고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회복하게 하고 싶어지지 않겠나? 이것이 바로 '신민(新民)'이다. 그러나 명덕(을 밝히는 일)과 신민은 애초에 인간의 힘이나 사적인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당연한 법칙(當然之則)이 있어서 그것을 지나쳐도 안 되고 그보다 부족해서도 안 된다. 예를 들어 효(孝)는 명덕이지만 여기에도 역시 당연한 법칙이 있다. 못 미치면 물론 안 되지만 그 법칙보다 지나치면 반드시 허벅지 살을 베는(刲股)<ref>전통적인 효자담에서 반복하여 등장하는 이벤트가 부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서 요리해 먹이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종류의 효행을 '선을 넘은 것'으로 단정하여 경계했지만 또 다른 조목에서는 긍정적으로 언급한다. 17:47, 17:48, 59:58, 59:59 등을 보라. 일역판(2007)의 해당부분 각주도 자세하다.</ref> 일이 생긴다. 반드시 당연한 법칙의 자리에 이른 뒤 옮겨가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  14:116 明德·新民, 皆當止於至善. 不及於止, 則是未當止而止; 當止而不止, 則是過其所止; 能止而不久, 則是失其所止. 僩(69이후).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선의 지점(至善)에 이르러 멈춰야 한다. 멈출 지점에 이르지 못했다면 이는 멈춰서는 안 되는 지점에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않았다면 이는 멈춰야 할 지점을 지나쳤다는 것이다. 멈추는 데 성공했으나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면 이는 머무를 자리를 잃은 것이다.<ref>止는 특정 스팟에 1)도달해서 2)멈추고 3)머무르는 일을 모두 지시할 수 있다. 그래서 번역하기 난처하다. 지어지선은 대체로 어떤 사태에 임하여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스탠스/포지션, 곧 '최선'의 지점을 취하여 그 자리를 고수한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좋은데 이는 止를 2)머무르다로 풀이한 것이다. 이 조목에서는 불행히도 주희가 止의 여러 의미를 혼용해서, 특히 '멈추다'의 의미를 적극 가져와 말을 만들고 있다. 이에 부득이하게 멈추다와 머무르다를 번갈아 써가며 번역하였다.</ref> *  14:117 “明德新民, 皆當止於極好處. 止之爲言, 未到此便住, 不可謂止; 到得此而不能守, 亦不可言止. 止者, 止於是而不遷之意.” '''밝은 덕을 밝히고(明德) 백성을 새롭게 하는(新民) 일은 모두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러 머물러야 한다. '머무르다(止)'라는 말에 대해서라면, 이 지점에 이르지 못했는데 그대로 머물러버리는(住)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고 이 지점에 이르렀는데 (그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것도 머무른다(止)고 할 수 없다. 머무른다(止)함은 이 자리에 그쳐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或問: “明明德是自己事, 可以做得到極好處. 若新民則在人, 如何得他到極好處?” '''누군가의 질문: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은 자기 일이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성공의 여부가 새로워지는 쪽인) 남에게 달렸으니 어떻게 그들이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까? 曰: “且敎自家先明得盡, 然後漸民以仁, 摩民以義. 如孟子所謂‘勞之, 來之, 匡之, 直之, 輔之, 翼之, 又從而振德之’. 如此變化他, 自然解到極好處.” 銖(67이후). '''대답: 우선 자신이 먼저 밝은 덕 밝히는 일을 완전하게 한 다음에 '백성들을 인으로 적셔주고 의로 연마해주'는 것이다.<ref>漸民以仁, 摩民以義는 한서 동중서전에 보인다. 안사고의 주석에 의하면 漸은 푹 적셔준다는 뜻이다.</ref> 맹자에서 이른바 '(수고하는 이를) 위로하고 (올 사람을) 불러오고 (삿된 자를) 바로잡아주고 (굽은 자를) 펴주고 부축하여 일으켜세워주고 보조해서 걷게 해주고 다시 이어서 깨우쳐주는 은덕을 베풀어준다'는 것과 같다.<ref>맹자 3A:4(등문공상 4)를 보라. 주희의 집주에 맞추어 번역하였다.</ref> 이렇게 그들을 변화시키면 자연히 최고로 좋은 지점에 이를 수 있다. <ref>解는 can의 뜻이다</ref> *  14:118 或問: “明德可以止於至善, 新民如何得他止於至善?” '''누군가의 질문: 명덕(明德)은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를 수 있는데, 신민(新民)은 어떻게 그들이 지어지선에 이르도록 할 수 있습니까?<ref>직전 조목과 같은 내용이다.</ref> 曰: “若是新民而未止於至善, 亦是自家有所未到. 若使聖人在上, 便自有个處置.” '''대답: 만약 신민이 지어지선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자기 자신(의 명명덕 공부)에게 미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만약 성인이 윗자리에 있었다면 (그에게는) 자연히 어떤 처치가 있었을 것이다. 又問: “夫子非不明德, 其歷諸國, 豈不欲春秋之民皆止於至善? 到他不從, 聖人也無可奈何.” '''재질문: 공자께서 명덕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분께서 여러 나라를 다니시면서 어찌 춘추 시대의 백성들이 모두 지어지선에 이르기를 원하지 않으셨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따르지 않으니 성인께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若使聖人得位, 則必須綏來動和.” '''대답: 만약 성인이 높은 자리를 얻어 재직했다면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멀리서도 찾아와 귀부하게 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고무시켜 화합하게 만드셨을 것이다<ref>논어 19:25 완(綏)은 편안하게 해주는 것, 래(來)는 그 편안함의 결과로 원방의 사람들이 귀부해옴을 말한다. 동(動)은 고무하고 진작하는 것, 화(和)는 그 고무진작의 결과로 백성들이 화평하게 변함을 말한다.</ref>. 又云: “此是說理, 理必須是如此. 且如‘致中和, 天地位, 萬物育’. 然堯有九年之水, 想有多少不育之物. 大德必得名位祿壽, 也豈箇箇如此! 只是理必如此.” 胡泳(69때). '''다시 대답함: 이것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ref>실제로는 변수가 많겠지만 이론상, 그리고 당위상 이러해야 한다는 말이다.</ref>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중화(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제자리를 잡고 만물이 자라난다'는 것과 같다.<ref>중용 제 1장.</ref> 그러나 요(堯) 임금 때는 9년간의 홍수가 있었으니, 생각해보면 제대로 자라지 못한 만물이 얼마나 많았겠나<ref>多少는 일역판(2007)과 왕샤오농의 영역판(2018)에서 공히 '多麽(얼마나)'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ref>. 큰 덕은 반드시 명예, 지위, 녹봉과 긴 수명을 얻어야 하지만, 어찌 모든 경우 다 그럴 것인가! 다만 그래도 이치는 반드시 이와 같아야 한다. *  14:119 明明德, 便要如湯之日新; 新民, 便要如文王之“周雖舊邦, 其命維新”. 各求止於至善之地而後止也. 德明(44이후). '''명명덕(明明德)은 탕(湯)임금이 매일 자신을 새롭게 한 것(日新)<ref>대학 전2장에서 인용하는 고사이다. 탕 임금의 욕조에 새긴 글에서 말하기를 '하루 새롭고자 하거든 하루하루 새롭게 하고 또 하루 새롭게 하라(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고 하였다.</ref>처럼 해야 하고<ref>사실 이 고사는 대학 본문에서 명명덕이 아니라 신민을 해석하는 부분이다.</ref> 신민(新民)은 문왕(文王)의 '주나라가 비록 오래된 나라이나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ref>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편(文王篇)의 한 구절이다. 앞부분과 마찬가지로 대학 전2장에서 '신민'을 해석하기 위해 인용하였다. 대학장구의 풀이를 옮기자면 주나라가 비록 연혁이 오래된 나라이지만 문왕의 대에 이르러 덕을 새롭게 하고 백성들에게 그 은택이 미친다면 천명을 새롭게 받아서 천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ref>처럼 해야 한다. 각각 최선(至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멈추었다. *  14:120 欲新民, 而不止於至善, 是“不以堯之所以治民者治民”也. 明明德, 是欲去長安; 止於至善, 是已到長安也. 拱壽(65때).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면서 최선의 지점에 도달하여 머무르려하지 않는 것은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고하지 않는 것'이다.<ref>[https://en.wikisource.org/wiki/The_Chinese_Classics/Volume_2/The_Works_of_Mencius/chapter07 맹자 이루상]을 참조하라.</ref> 명덕을 밝히는 것은 장안에 가려하는 것이고 최선의 지점에 머문다는 것은 이미 장안에 도착한 것이다.<ref>장안의 비유에서 암시하듯 주희는 자주 지어지선이 도덕률 실천의 성공까지를 포함하는 것처럼 말한다.</ref> *  14:121 劉源問“知止而後有定”. '''유원<ref>일역본의 주석에 의하면 이 사람은 여기 말고는 달리 언급되는 곳이 없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ref>이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질문했다.<ref>대학 본문은 "머물 곳을 알면(=최선의 지점을 알면) 의지가 확정되고, 의지가 확정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마음이 고요해지면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지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면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한다. 각각의 단계를 한 글자로 압축하면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이 된다. 여기서부터 권14의 끝까지 이 여섯 글자를 반복해서 논할 것이므로 잘 기억해두자.</ref> 曰: “此一節, 只是說大槪效驗如此.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卻是做工夫處.” 雉(미상). '''대답: 이 부분은 그저 체감되는 효과(效驗)가 대체로 이렇다는 말이다.<ref>14:166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그쪽을 참조하기 바란다.</ref> '(대학의 道는)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에 있다'가 바로 힘쓸 지점이다. -오치의 기록 <以下知止有定.> '''<이 아래로는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관한 조목> *  14:122 “在止於至善”. 至者, 天理人心之極致. 蓋其本於天理, 驗於人心, 卽事卽物而無所不在. 吾能各知其止, 則事事物物莫不各有定理, 而分位·界限爲不差矣. 端蒙(50이후).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데 있다는 말에서 '지극한(至)'이란 하늘의 섭리(天理)와 사람의 마음(人心)의 극치(極致)이다. 대개 최선의 지점은 하늘의 섭리에 뿌리를 두고 사람의 마음에서 실감할 수 있으며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있어 없는 경우가 없다. 스스로 그 각각의 최선의 지점을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눈에는)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고<ref>이 부분은 대학혹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의 지점을 '아는' 행위는 행위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설명이다. 그런데 그것의 결과라고 주희가 주장하는 '사사물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없는 경우가 없다'는 것은 객관도덕률에 대한 설명이다. 양자가 어째서 원인과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그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구문을 임의로 넣어서 이질감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관하여 14:166을 참조하라.</ref> 각각의 직분의 구분도 틀리지 않게 될<ref>직분(分位)의 경계선(界限)을 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확실치 않다. 더 나은 번역을 기다려본다.</ref> 것이다.<ref>이 조목은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찾아서 함께 읽어야 이해가 쉽다(그럼 의미에서 해당 부분을 각주처리해둔 일역판의 친절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에 확정불변의 이치가 있다는 것은 예컨대 임금이라는 사물에는 인(仁)이 그 확정불변의 이치요 지극히 선한 최선의 지점이다. 자신이 임금이 되었다고 치자. 그런 사태에 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인(仁)이라는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이 임금이라는 직분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확정불변의 이치이며 우리가 임금된 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최대치, 곧 '극치'이다. 이 이치의 출처는 하늘의 섭리이고 또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겪고 경험하고 체험함을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임금이란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인(仁)임을 알고 부모라는 직분의 최선의 지점이 자애(慈)임을 안다면 각각의 직분이 무엇이며 어떻게 상호 구분되는지에 대해서도 틀리지 않게 될 것이다.</ref> *  14:123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砥(61때). '''(각각의) 사물의 이치상 멈추어야/머물러야 마땅한 (최선의) 지점을 명명백백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확정될 수 있다.<ref>도덕률의 당위성에 대한 인식이 확고하고 명료하면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의지의 힘이 그에 비례해서 강해진다는 뜻이다.</ref> *  14:124 問: “‘知止而後有定’, 須是物格·知至以後, 方能如此. 若未能物格·知至, 只得且隨所知分量而守之否?” '''질문: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는 것은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 한(知至)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물/사건에 접근하여 앎을 지극하게 하지 못했다면 일단 아는 분량 만큼만 지켜낼 수 있을 뿐인 것입니까? 曰: “物格·知至也無頓斷.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 只這一事上知得盡, 則此一事便知得當止處. 無緣便要盡底都曉得了, 方知止有定. 不成知未到盡頭, 只恁地鶻突獃在這裏, 不知个做工夫處! 這箇各隨人淺深. 固是要知到盡處方好, 只是未能如此, 且隨你知得者, 只管定去. 如人行路, 今日行得這一條路, 則此一條路便知得熟了, 便有定了. 其它路皆要如此知得分明. 所以聖人之敎, 只要人只管理會將去.” '''대답: 사물/사건에 접근하여(物格) 앎을 지극하게(知至) 하는 일에는 중단(頓斷)이 없다.<ref>사물에 접근하여 앎을 추구하는 일이 계단식으로 분절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모든 앎이 완전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될 수 있다.<ref>이 부분의 해석은 만족스럽지 않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주희의 대답의 논조는 질문자가 제기한 포인트를 긍정하는 것이다. 완전히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그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우선은 아는 만큼만이라도 실천해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라는 명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만 하고 실제로 이어지는 뒷부분에서 그렇게 부정되고 있다. 그런데 부정사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앞부분의 '也無頓斷' 뿐이다. 따라서 뒷부분과의 일관성을 살려서 번역하기 위해서는 '也無頓斷'과 "都知到盡處了, 方能知止有定"을 한 문장으로 합쳐서 해석하고 부정서 '무'는 문장 전체에 걸리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은데 사기(辭氣)가 그런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선은 사기의 흐름을 존중하여 번역해둔다. 頓斷에 대해서는 75:114를 보라. 8:21은 본 조목과 논조가 일치할 뿐더러 문장구조도 흡사한데, 여기서는 "배우는 이가 공부를 할 적에 한 '덩어리(頓段)' 큰 항목의 공부가 완성되기를 기다린 후에야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당장 직면한 자잘한 것들을 좇아 쌓아 나가야 한다. (學者做工夫, 莫說道是要待一箇頓段大項目工夫後方做得, 卽今逐些零碎積累將去.)"라고 하였다. 여기서 頓段과 본 조목의 頓斷은 현대 중국어에서 동음이의어(성조까지 같다)이며 Baxter와 Sagart가 재구성한 중세음으로도 동음이의어이다. 본 번역자는 주희의 서로 다른 제자들이 이 부분을 받아적으며 두 단어를 혼동하지 않았을까 의심한다. 만약 頓斷이 頓段의 오기라고 한다면 이 조목의 번역은 8:21과 흡사한 방향으로 해야 옳을 것이다.</ref> 다만, 특정 사건에 대하여 앎이 완전해지면 그 사건에 있어서 마땅히 머물러야 할 지점을 알 수 있다. 모두 다 완전히 깨치고 나서야 머물 곳을 알고 심지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無緣). 설마하니(不成) 앎이 완전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저 이렇게 골돌(鶻突)히,<ref>바보같이 멍때리는 모습이다.</ref> 멍하니(獃) 여기서 기다리기만 하고 힘쓸(工夫) 지점은 하나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이건 사람마다 자신의 수준(淺深)에 따라야 한다. 모든 앎이 완전해져야만 된다는 자세는 물론 옳지만 이렇게 할 수 없을 뿐이다. 우선은 자네가 아는 것에 한해서 (심지를) 확정하라. 사람이 길을 갈 적에 오늘 이 길을 가면 이 길에 대해서 앎이 익숙해지고 (그 결과로) 심지가 확정된다. 다른 길들 모두 이렇게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인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뚜벅뚜벅 이해해 나가도록 할 뿐이다. 又曰: “這道理無它, 只怕人等待. 事到面前, 便理會得去做, 無有不得者. 只怕等待, 所以說: ‘需者, 事之賊也!’” '''다시 대답: 이 도리는 다른 건 없고 그저 사람들이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사태가 면전에 도달했을 때 바로 가서 부딪쳐주면 터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저 기다리려고 할까 걱정이다. 그래서 (좌전에서)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ref>춘추좌씨전 애공 14년</ref>고 한 것이다. 又曰: “‘需者, 事之賊也! ’若是等待, 終誤事去.” '''다시 대답: '기다림이 일을 해친다'. 이렇게 기다리기만 하면 끝내 일을 그르친다. 又曰: “事事要理會. 便是人說一句話, 也要思量他怎生如此說; 做一篇沒緊要文字, 也須思量他怎生如此做.” 僩(69이후). '''다시 대답: 사태마다 하나하나 이해해야 한다. 누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말 했을까' 생각해야 한다. 누가 별로 중요할 것 없는 글을 한 편 지었어도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썼을까' 생각해야 한다. *  14:125 “知止而後有定”, 須是事事物物都理會得盡, 而後有定. 若只理會得一事一物, 明日別有一件, 便理會不得. 這箇道理須是理會得五六分以上, 方見得這邊重, 那邊輕, 後面便也易了. 而今未理會到半截以上, 所以費力. 須是逐一理會, 少間多了, 漸會貫通, 兩箇合做一箇, 少間又七八箇合做一箇, 便都一齊通透了. 伊川說“貫通”字最妙. 若不是他自會如此, 如何說出這字! 賀孫(62이후). ''' '머물 곳을 알고나서 (심지가) 확정된다.'에 대하여. 사사물물을 모두 완전히 이해하고나서야 (심지가) 확정된다. 만약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사물에 대해서만 이해했는데 다음날 새로운 사건을 만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도리는 50~60% 이상 이해해야 무엇이 중한지 알 수 있어서 그 뒷부분도 쉬워진다. 지금 50% 이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이 드는 것이다. 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 머지 않아 그렇게 이해한 것이 많아지면 점차 (많은 것을) 관통하여 두 가지를 하나로 꿰고, 다시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7~8개를 하나로 꿰어 마침내 모든 것에 완전히 통하게 되는 것이다. 이천이 쓴 '관통'이라는 표현이 매우 훌륭하다. 만약 그가 몸소 이렇게 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겠나? *  14:126 “知止而後有定”, 必謂有定, 不謂能定, 故知是物有定說. 振(미상).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에 대하여. (경전에서) 꼭 '확정이 있다(有定)'고 하지 '확정할 수 있다(能定)'고는 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알 수 있다.<ref>이 부분은 긴 설명이 필요하다. 14:163을 보면 한 제자가 지적하기를 주희가 대학장구와 대학혹문에서 '定'자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대학장구의 주석에서는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志有定向)'고 해설하는 반면 대학혹문에서는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된다(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라고 해설한다. 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는 만큼 그러한 앎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동력인 의지력 또한 그에 비례하여 투철해진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도덕적 앎이 투철해지니 마음 속에서 도덕적 앎이 확실해졌다는 의미이다. 전자는 知止를 인지의 차원으로, 有定을 의욕의 차원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도 인지, 후자도 인지의 차원이다. 14:163에서 주희는 '그게 그거다'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있지만 현대인의 눈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 번역자는 이러한 두 주석서의 차이를 반영하여 주희가 대학장구식으로 해설하는 조목에서는 '심지가 확정된다'고 번역하고 대학혹문식으로 해설하는 듯하면 '확정적인 이치가 있다'고 번역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면 定說이 실은 定理의 오기가 아닐까 의심해볼 수 있다. 일역판의 역자들이 이러한 의심에 기반하여 정설을 정리로 번역했다. 여기서도 일역판의 선택을 따랐다. </ref> *  14:127 未知止, 固用做工夫,<ref>일역판의 교감에 의하면 이 다섯 글자는 다른 많은 이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ref> 但費把捉. 已知止, 則爲力也易. 僩(69이후). '''머물 곳을 알기 전에도 물론 실천(工夫)은 하는데, 다만 계속 수고롭게 붙잡고 있어야 할 뿐이다. 머물 곳을 안 후에는 힘이 덜 든다.<ref>실천하려는 노력(工夫)이야 도덕법칙에 대한 앎이 익기 전에도 하는 거고 익은 후에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앎이 익으면 힘이 덜 든다는 것.</ref> *  14:128 定亦自有淺深: 如學者思慮凝定, 亦是定; 如道理都見得徹, 各止其所, 亦是定. 只此地位已高. 端蒙(50이후). ''' 확정되는 데에도 당연히 깊이의 차이가 있다. 배우는 이의 생각이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도 '확정'이다. 도리를 모두 투철하게 인식하여 각각의 경우 머물러야 할 최선의 지점에 머무르는 것 역시 '확정'이다. 단지 후자쪽의 수준이 높을 뿐이다.<ref>전자는 대학장구식 해석, 후자는 대학혹문식 해석에 각각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14:126과 14:163을 참조하라.</ref> *  14:129 問“定而後能靜”. ''' '(마음 속으로 사사물물에 대하여) 확정적인 이치가 있게 되면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定, 是見得事事物物上千頭百緖皆有定理; 靜, 只就自家一箇心上說.” 賀孫(62이후). '''대답: '확정'이란 온갖 사건과 사물에 모두 확정적인 이치가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고요함'이란 자신의 마음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ref>전자는 대상쪽에 이치가 있다는 걸 아는 것이고 후자는 그런 앎을 얻음으로 인하여 내 마음의 불안이 가셔서 마음이 차분하고 조용해짐을 말한다. 17:34를 참조.</ref> <以下定靜.> '''<이 아래로는 '확정되면 고요하다'에 관한 조목들><ref>14:121을 참조하라.</ref> *  14:130 定以理言, 故曰有; 靜以心言, 故曰能. 義剛(64이후).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理)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있을 유(有)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有定'임을 기억하자. 14:126을 보라. </ref>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능(能)자를 썼다.<ref>대학에서의 워딩이 '定而後能靜'임을 기억하자.</ref> *  14:131 定是理, 靜在心. 旣定於理, 心便會靜. 若不定於理, 則此心只是東去西走. 泳(66때). '''확정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쪽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고 고요함은 (인식 하는 쪽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미 이치 쪽으로 (심지가) 확정되면 마음은 곧 고요해질 수 있다. 이치를 향하여 심지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은 그저 동분서주할 뿐이다.<ref>이 부분은 확정을 대학장구식으로 해석한 것이다.</ref> *  14:132 問: “章句云: ‘外物不能搖, 故靜.’ 舊說又有‘異端不能惑’之語. 竊謂將二句參看, 尤見得靜意.” '''질문: 대학장구에서는 '외물이 흔들지 못하므로 고요하다'고 하였는데 예전 버전에서는 또 '이단의 학설이 현혹시키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두 구문을 다 참고해서 보면 고요함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ref>고요함은 마음에 동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인용된 대학장구의 두 구절은 현행본 대학장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ref> 曰: “此皆外來意. 凡立說須寬, 方流轉, 不得局定.” 德明(44이후). '''대답: 둘 다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온다는 뜻이다. 무릇 학설을 세울 때는 품이 넉넉해야 하니 그래야 유동적으로 통한다. 국한되고 픽스되어서는 안 된다. *  14:133 問: “大學之靜與伊川‘靜中有動’之‘靜’, 同否?” '''질문: 대학에서 말한 고요함과 이천이 '고요함 가운데 움직임이 있다'라고 할 때의 '고요함'이 같은 고요함입니까? 曰: “未須如此說. 如此等處, 未到那裏, 不要理會. 少頃都打亂了, 和理會得處, 也理會不得去.” 士毅(미상). '''대답: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이러한 부분은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이해하려하지 말아라. (이해하려 하면) 머지않아 모두 혼란스럽게 되어 (기존에) 이해했던 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  14:134 問“靜而後能安”. '''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에 관한 질문. 曰: “安, 只是無臲卼之意. 才不紛擾, 便安.” '''대답: 편안함은 동요<ref>臲卼의 해석에 대해서는 주역 곤괘를 보라.</ref>가 없다는 뜻이다. 동요하지 않으니 편안하다. 問: “如此, 則靜與安無分別.” '''질문: 그렇다면 고요함과 편안함은 차이가 없습니다. 曰: “二字自有淺深.” 德明(44이후). '''대답: 두 글자에 깊이의 차이가 있다.<ref>당연하지만 편안함 쪽이 더 깊다는 말이다. 14:140을 보라.</ref> <以下靜安.> '''<이 아래로 '고요하면 편안하다'에 관한 조목들> *  14:135 問: “‘安, 謂所處而安.’ 莫是把捉得定時, 處事自不爲事物所移否?” '''질문: '편안함은 대처하는 것이 편안하다는 뜻이다'<ref>대학장구에서 주희가 편안함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헌데 '所處而安'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 '소처'는 자리잡은 곳 혹은 처리하는 것 정도를 의미하는 명사구인데 대학장구를 번역할 때에는 보통 '자리잡은 곳'으로 풀이하는데 여기서는 '처리하는 것'이나 '대처하는 것' 정도로 해석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ref>는 것은, (도덕법칙을) 확정적으로(定) 꽉 붙잡았을 때 (내 면전에 도달한) 사태에 대한 (나의) 대처 역시 자연스럽게 외적 영향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는 뜻 아닙니까? 曰: “這箇本是一意. 但靜是就心上說, 安是就身上說. 而今人心才不靜時, 雖有意去安頓那物事, 自是不安. 若是心靜, 方解去區處, 方解穩當.” 義剛(64이후). '''대답: 이는 본래 같은 뜻이다.<ref>무엇과 무엇이 같은 뜻인지 명확하지 않다. 영역본에서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같은 뜻인 것으로 풀이했는데 일리가 있다. </ref> 다만 고요함은 마음의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고 편안함은 몸의 측면에서 설명했다는 차이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목전의 사사물물을 잘 안배(安頓)하려 해도 당연히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이 편안해야 (사사물물을 잘) 처리할 수 있고 (처리를) 온당하게 할 수 있다. *  14:136 旣靜, 則外物自然無以動其心; 旣安, 則所處而皆當. 看打<ref>성화9년본과 남본본(구스모토 마사쓰楠本正繼가 큐슈대학교에 기증한 조선고사본朝鮮古寫)에는 강(扛)이다. 들고 나른다는 뜻.</ref>做那裏去, 都移易他不得. 道夫(60이후). '''고요하면 자연히 외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편안하면 대처하는 바가 모두 합당하다. 비록 저쪽으로 들고 나르려<ref>일역판에서 扛으로 해석했는데 일리가 있다. 여기서도 따른다.</ref> 해도 움직일 수 없다.<ref>'看~都'는 비록~이다</ref> *  14:137 問: “‘靜而後能安’, 是在貧賤, 在患難皆安否?” '''질문: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나 곤란하고 어려운 경우에나 모두 편안하다는 것입니까? 曰: “此心若不靜, 這裏坐也坐不得, 那裏坐也坐不得.” 㝢(61이후). '''대답: 이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여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고 저기 앉으려 해도 앉을 수 없다. *  14:138 能安者, 以地位言之也. 在此則此安, 在彼則彼安; 在富貴亦安, 在貧賤亦安. 節(64이후).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경우와 상황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만나서는 이렇게 편안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편안하다. 부유하고 귀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고 가난하고 천한 상황에서도 편안하다. *  14:139 問: “知止章中所謂定·靜·安, 終未深瑩.” '''질문: 머물 곳을 안다(지지 知止)장에서 이른바 '확정됨', '고요함', '편안함'은 끝내 잘 모르겠습니다. 曰: “知止, 只是識得一箇去處. 旣已識得, 卽心中便定, 更不他求. 如求之彼, 又求之此, 卽是未定. ‘定而後能靜, 靜而後能安’, 亦相去不遠, 但有深淺耳. 與中庸動·變·化相類, 皆不甚相遠.”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목적지를 알았다는 정도이다. 목적지를 알면 마음이 확정되어 다시 달리 갈 곳을 찾지 않게 된다. 이쪽으로 가려고 하다가 다시 저쪽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직 마음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다. '확정되면 고요할 수 있고 고요하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간의 (개념상의) 거리가 멀지 않다.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용에서 말한 '감동시키면 변하고 변하면 화한다'<ref>중용 23장을 말한다. 이곳에서처럼 중용23장에서도 동, 변, 화 등의 낱글자 개념이 상호 인과관계를 맺으며 연쇄적으로 거론되고 있다.</ref>는 것과 (문세가) 비슷하니 (거론된 개념간의 거리가) 서로 그다지 멀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問: “先生於此段詞義, 望加詳數語, 使學者易曉.” '''질문: 선생님께서 이 단락의 말 뜻에 몇 마디 첨언하시어 배우는 이들이 쉽게 깨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曰: “此處亦未是緊切處, 其他亦無可說.” 德明(44이후). '''대답: 이 부분은 그다지 긴요한 곳이 아니니 달리 더 할 말이 없다. <定·靜·安.> '''<이 아래로 확정됨/고요함/편안함에 관한 조목들> *  14:140 定·靜·安頗相似. 定, 謂所止各有定理; 靜, 謂遇物來能不動; 安, 謂隨所寓而安, 蓋深於靜也. 去僞(46때). '''정(定)과 정(靜)과 안(安)은 서로 꽤 비슷하다. 정(定)이란, 멈춘/머무른 지점에 각각 확정된 이치가 있음을 말한다. 정(靜)이란, 외부의 사물을 만나도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말한다. 안(安)이란, 머무르는 곳<ref>우(寓)는 '곳', '경우' 등의 의미이다. 다음 조목의 거의 같은 구문에서는 이 자리에 '처(處)'자를 쓰고 있다.</ref>마다 편안함을 말하는데 이는 정(靜)보다 깊은 경지이다. *  14:141 定·靜·安三字大略相類. 然定是心中知“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心下有箇定理, 便別無膠擾, 自然是靜. 如此, 則隨所處而安. 㽦(59때). '''정(定), 정(靜), 안(安)이라는 세 글자는 서로 대략 비슷하다. 그러나 정(定)은 마음 속에서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무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 속에 확정된 이치가 있으면 더 이상 혼란이 없으니 자연히 정(靜)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머무는 곳마다 편안(安)하다.<ref>이 조목은 직전 조목과 내용상 차이가 없다. 기록자가 다를 뿐이다.</ref> *  14:142 知止而後有定, 如行路一般. 若知得是從那一路去, 則心中自是定, 更無疑惑. 旣無疑惑, 則心便靜; 心旣靜, 便貼貼地, 便是安. 旣安, 則自然此心專一, 事至物來, 思慮自無不通透. 若心未能靜安, 則總是胡思亂想, 如何是能慮! 賀孫(62이후). '''멈출 지점을 알고(知止) 나서야 비로소 확정됨(定)이 있게 된다. 이는 길을 가는 것과 같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알게 되면 마음 속에 자연히 확신이 생겨 더 이상 의혹이 없게 된다. 의혹이 없으니 마음이 정(靜)해지고, 마음이 정(靜)하니 안정되어(貼貼地)<ref>후에 확인 필요.</ref>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하니 자연히 하나로 집중되어, 일이 닥치고 사물이 올 때 저절로 사려에(思慮) 막힘이 없게 된다. 만약 마음이 정(靜)하고 안(安)하지 못하면 온갖 상념이 어지럽게 떠오르게 되니 어떻게 제대로 사려(慮)할 수 있겠나? <知止·定·靜·安·慮.> '''<지지(知止), 정(定), 정(靜),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3 定, 對動而言. 初知所止, 是動底方定, 方不走作, 如水之初定. 靜則定得來久, 物不能撓, 處山林亦靜, 處廛市亦靜. 安, 則靜者廣, 無所適而不安. 靜固安, 動亦安, 看處甚事皆安然不撓. 安然後能慮. 今人心中搖漾不定疊, 還能處得事否? 慮者, 思之精審也. 人之處事, 於叢冗急遽之際而不錯亂者, 非安不能. 聖人言雖不多, 推出來便有許多說話, 在人細看之耳. 僩(69이후). '''정(定)은 동(動)과 대립하는 개념이다. 일단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움직이던(動) 것이 비로소 정(定)해져서 더 이상 돌아다니지 않게 된다. 이는 마치 물이 막 안정되어 멈춘 것과 같다. 정(靜)은 정(定)이 오래 지속되어 외부의 사물이 흔들 수 없는 상태이다. 산림에 있든 시장에 있든 늘 정(靜)하다. 안(安)은 정(靜)이 넓어져서 가는 곳마다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고요(靜)하거나 움직(動)이거나 늘 편안하다. 어떤 일을 처리해도(看處)<ref>여기서 간(看)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역판과 영역판에서도 이 글자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처'자에 붙여서 '처리하다' 정도로 풀이했다. 우선 기록해둔다.</ref> 편안(安)하여 흔들리지 않는다. 안(安)한 후에야 비로소 사려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마음이 요동치고 불안정한데 어떻게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겠나? '사려(慮)'는 정밀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이 일을 처리할 때 복잡하고(叢冗) 급박한 상황에서도 혼란스럽지 않은 것은 안(安)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성인의 말씀이 비록 많지 않지만, 유추해서 확장해보면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니 그저 우리가 그것을 세심하게 보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  14:144 問“安而後能慮”.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대한 질문 曰: “先是自家心安了, 有些事來, 方始思量區處得當. 今人先是自家這裏鶻突了, 到事來都區處不下. 旣欲爲此, 又欲若彼; 旣欲爲東, 又欲向西, 便是不能慮. 然這也從知止說下來. 若知其所止, 自然如此, 這卻不消得工夫. 若知所止, 如火之必熱, 如水之必深, 如食之必飽, 飮之必醉. 若知所止, 便見事事決定是如此, 決定著做到如此地位, 欠闕些子, 便自住不得. 如說‘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人多會說得. 只是不曾見得決定著竭其力處, 決定著致其身處. 若決定見得著如此, 看如何也須要到竭其力處, 須要到致其身處. 且如事君, 若不見得決定著致其身, 則在內親近, 必不能推忠竭誠, 有犯無隱; 在外任使, 必不能展布四體, 有殞無二.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這若不是見得到, 如何會恁地!” 賀孫(62이후). '''대답: 먼저 자신의 마음이 편안(安)해야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비로소 적절하게 생각하고 처리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마음이 또렷하지 못해서(鶻突) 일이 닥치면 하나도 처리하지 못한다. 이걸 하고 싶은데 저렇게도 하고 싶고, 동쪽으로 가고 싶다면서 다시 서쪽으로 가고 싶어하니 제대로 사려하지(慮)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지지(知止)'에서부터 쭉 설명하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고 나면 자연히 이렇게 되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 멈출 지점을 알면 마치 불이 반드시 뜨겁고 물이 반드시 깊으며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배불러지고 술을 마시면 반드시 취하게 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된다. 멈출 지점을 알면 각각의 사건들이 반드시 이와 같으며<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뜬다'와 같은 것이다.</ref> 그 상태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ref>말하자면, '해는 동쪽에서 떠야만 한다'와 같은 것이다. 전자가 사실이라면 후자는 당위이다.</ref> 알게 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자연히 가만히 있지 못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길 때 힘을 다하고, 군주를 섬길 때 몸을 바친다'<ref>논어 1:7</ref>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단지 정말로 힘을 다하는 지점이나 몸을 바치는 지점을 알지 못할 뿐이다. 만약 이와 같아야 한다고 확실히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ref>看如何+동사+也는 '아무리 동사해도...'의 의미이다. 여기서는 동사가 생략되어있다.</ref> 힘을 다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임금 섬기는 것을 예로 들자면 반드시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임금과 가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충성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지 못하며(推忠竭誠) '과감하게 간쟁하여 기분을 상하게 할지언정 숨기는 것이 없게 한다(有犯無隱)'<ref>예기 단궁상</ref>는 것을 실천하지 못한다. 외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는 반드시 온 몸을 다 바쳐(展布四體)<ref>좌전 양공 21년</ref> 죽을지언정 두 마음을 품지 않은(有殞無二)<ref>좌전 희공 15년</ref> 것처럼 할 수 없다. '인(仁)을 해쳐가며 목숨을 구걸하는 일(求生害仁)은 없고,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는 일(殺身成仁)은 있다.'<ref>논어 15:9</ref> 이것<ref>힘을 다하고 몸을 바치는 지점</ref>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렇게<ref>살신성인</ref> 할 수 있겠나? <知止·安·慮.> '''<지지(知止), 안(安),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5 李德之問: “‘安而後能慮.’ 旣首言知止矣, 如何於此復說能慮?” '''이덕지(李德之)의 질문: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라고 했는데, 이미 처음에 '멈출 곳을 알았다(知止)'라고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다시 '사려할 수 있다(能慮)'라고 합니까? 曰: “旣知此理, 更須是審思而行. 且如知孝於事親, 須思所以爲事親之道.” '''대답: 이미 이 이치를 알았으면 더 깊이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기는 효에 대해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부모를 섬기는 도리가 되는 것인지<ref>일역판에서는 '부모를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고 영역판에서는 '왜 사람은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겨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풀었다. 일역판은 이 부분을 당위의 실천으로 본 것이고 영역판은 원리의 탐구로 본 것이다. 바로 앞 구문에서 '실천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여기서도 실천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일역판의 노선이 더 타당해 보인다.</ref> 생각해야 한다. 又問: “‘知至而後意誠’, 如何知旣盡後, 意便能實?” '''재질문: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에서, 어째서 앎이 다한 후에야 생각(意)이 진실해질 수 있습니까? 先生指燈臺而言: “如以燈照物, 照見處所見便實; 照不見處便有私意, 非眞實.” '''선생이 등불을 가리키며 말함: 등불로 사물을 비추는 것으로 비유하자면, 비춘 지점에서 드러난 것들은 진실<ref>일역판은 '확실하다'고 풀이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하다. 비추지 않은 부분은 사사로운 생각(私意)이 있어 진실하지 않다." 又問: “持敬·居敬如何?” '''재질문: 지경(持敬)과 거경(居敬)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曰: “且如此做將去, 不須先安排下樣子, 後卻旋求來合.” 蓋卿(65때). '''대답: 우선은 그렇게 해 나가면 된다. 먼저 형식<ref>미우라 구니오(2012)는 모범, 형태, 샘플 등으로 번역했다. 영역판에서는 scheme. </ref>을 세우고 그 다음에 거기에 맞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  14:146 子升問: “知止與能慮, 先生昨以比易中深與幾. 或問中卻兼下‘極深硏幾’字, 覺未穩.” '''자승의 질문: '지지(知止)'와 '능려(能慮)'를 선생님께서 어제 주역(周易)의 '심(深)'과 '기(幾)'에 비유하셨습니다. 대학혹문(大學或問)에서는 '극심(極深)'과 '연기(硏幾)''라는 글자를 겸하신 것은<ref>대학혹문에서는 '능려(能慮)'를 설명하면서 극심연기(極深硏幾)라고 하였다. 자승이 어제 들은 설명에서 극심과 연기를 각각 지지와 능려에 배속한 것과 모순된다. 14:163 참조.</ref>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ref>'극심'과 '연기'는 주역 계사상에 나오는 표현이다. 심은 깊음이고 극은 그 깊음을 지극히한다는 것이다. 이는 현상세계에 잘 대응할 수 있도록 흔들리지 않고 안정감 있고 깊이 있는 정신을 구축하는 노력을 말한다. 연은 갈고닦는다는 뜻이고 기는 기미이다. 기미를 갈고닦는다는 것은 현상세계의 다양한 변화의 양상을 면밀히 살펴 파악하는 노력을 말한다. 변화의 양상을 잘 알면 변화가 시작하려는 바로 그 지점을 언제나 빠르고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도 아니고 '기미'를 살핀다고 한 것이다. 대학의 '지지'와 '능려'의 경우 '지지'쪽이 조금 더 학자 자신의 본질적 능력을 키우는 인상이 있고 '능려'쪽이 현상세계를 향한 관심의 표출 같은 기상이 있다. 그러므로 굳이 극심과 연기를 나누어 배속하자면 극심을 지지에, 연기를 능려에 배속하는 쪽이 더 만족스럽다.</ref> 曰: “當時下得也未仔細. 要之, 只著得‘硏幾’字.” 木之(68때). '''대답: 당시에는 그리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에는) '연기(硏幾)'만 붙이면 된다." *  14:147 李約之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이약지(李約之)의 질문. 曰: “若知至了, 及臨時不能慮, 則安頓得不恰好. 且如知得事親當孝, 也知得恁地是孝. 及至事親時不思慮, 則孝或不行, 而非孝者反露矣.” 學蒙(65이후). '''대답: 만약 앎이 지극해졌다 하더라도 막상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사려하지 못한다면 적절히 안배(安頓)<ref>안돈은 안배이다.</ref>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모를 섬김에 응당 효도해야 함을 알고 또 어떻게 하는 것이 효도인지 알더라도 막상 부모를 섬길 때에 사려하지 않으면 효도는 못하고 역으로 불효가 드러날 수도 있다. <安·慮.> '''<안(安)과 려(慮)에 관한 조목들> *  14:148 問“安而後能慮”. '''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에 관한 질문 曰: “若不知此, 則自家先已紛擾, 安能慮!” 德明(44이후). '''대답: 이것을 알지 못하면 <ref>'앎이 지극해짐'의 단계를 말한다.</ref> 자신이 이미 먼저 어지러울 것이니<ref>안(安)의 단계를 말한다.</ref> 어찌 사려할 수 있겠는가? *  14:149 能安者, 隨所處而安, 無所擇地而安. 能慮, 是見於應事處能慮. 節(64이후). ''' '편안할 수 있다(能安)'는 것은 가는 곳마다 편안한 것이요 자리를 가리지 않고 편안한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사태에 대처하는 자리에서 사려할 수 있음이 드러난다. *  14:150 慮, 是思之重復詳審者. 方子(59이후). ''' '사려(慮)'는 생각을 반복하여 자세하고 정밀하게 하는 것이다. *  14:151 慮, 是硏幾. 閎祖(59이후). ''' '사려(慮)'는 기미를 갈고닦는 것(硏幾)에 해당한다.<ref>앞의 14:146을 참조하라.</ref> *  14:152 問: “到能得處, 學之工夫盡否?” '''질문: '얻을 수 있음(能得)'<ref>가장 이상적인 상태, 지선의 지점에 평안하게 머물게 되는 상태를 성취한 것이다. 이는 앎에서 시작하여 그 앎이 일신에 실현된, 즉 성취된 상태를 말한다.</ref>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배움(學)<ref>이것이 '대학'이라는 책을 지칭하는 것인지 학문 일반을 의미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일역판은 책제목으로 보았고 영역판은 학문 일반으로 보았다.</ref>의 노력이 다 끝난 것입니까? 曰: “在己之功亦備矣. 又要‘明明德於天下’, 不止是要了自家一身.” 淳(61·70때). '''대답: 자기자신의 성취로서는 또한 다 갖춘 것이지만 나아가 '천하에 명덕을 밝'혀야 한다. 자신의 일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得.> '''<얻음(得)에 관한 조목> *  14:153 因說知止至能得: 上云“止於至善”矣, 此又提起來說. 言能知止, 則有所定; 有所定, 則知其理之確然如是. 一定, 則不可移易, 任是千動萬動, 也動搖他不得. 旣定, 則能靜; 靜, 則能安; 安, 則能慮; 慮, 則能得其所止之實矣. 卓(미상). ''' 이와 관련하여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을 해설:<ref>여기서 '인설(因說)'의 해석에 두 갈래 선택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이러이러한 것을 말씀하신(설) 김에(인)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설지지지능득'까지 전체 구문을 받아준다. 두 번째 선택지는 '이어서(인) 지지지능득에 관하여 해설(설)하셨다'이다. 이 경우 '인'은 뒤에 받는 것이 없다. 미우라 구니오(2012, 302, 305)는 비록 다른 조목에서이긴 하지만 첫 번째 해석을 선호한다. 일역판(2007)은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 영역판 역시 두 번째 해석을 지지한다.</ref> 위에서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ref>'지지'에서 '능득'까지 일련의 시퀸스는 바로 앞에 나오는 '지어지선'과 내용상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ref> 다시 (같은 내용을) 거론한 것이다. 이 부분은 이런 말이다. 멈출 지점을 알면 확정된(定) 바가 있게 된다. 확정된(定) 바가 있으면 이치가 확연히 이와 같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확고(定)해지고 나면 변하거나 바뀔 수 없으며 제아무리 천 번 만 번 흔들어도 그를 동요시킬 수 없다. 확정되면(定) 고요(靜)할 수 있고, 고요(靜)하면 편안(安)할 수 있으며, 편안(安)하면 사려(慮)할 수 있고, 사려(慮)하면 실제로 머물러야(止)하는 지점들을 구체적으로<ref>일역판은 소지지실(所止之實)을 소지지지(所止之地)와 같다고 보고 그렇게 풀이하였다. 영역판의 경우 'attain substantially the point where to rest'라고 풀었는데 이는 '실'자를 부사로 처리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론상으로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각각의 지점들을 획득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이렇게 해야 14:147과 잘 조응하게 된다.</ref> 획득(得)할 수 있게 된다. <知止至能得.>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조목> *  14:154 '知止至能得'. 蓋才知所止, 則志有定向; 才定, 則自能靜; 靜, 則自能安; 安, 則自能慮; 慮, 則自能得. 要緊在能字. 蓋滔滔而去, 自然如此者. 慮, 謂會思量事. 凡思天下之事, 莫不各得其當, 是也. 履孫(65때). '''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기까지.' 대개 멈출 지점을 알게 되면 뜻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ref>'확정된 방향'에 관해서는 14:163을 보라.</ref> 일단 (방향이) 확정되면 자연히 고요(靜)할 수 있게 된다. 고요(靜)하면 자연히 편안(安)할 수 있고, 편안(安)하면 자연히 사려(慮)할 수 있으며, 사려(慮)하면 자연히 얻을(得) 수 있다. 핵심은 '할 수 있고(能)'라는 글자에 있다. 이는 마치 거대한 강물이 도도히 흘러 가듯 자연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려(慮)'는 사태에 대해 잘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체로 세상의 여러 일에 대한 생각이 모두 타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14:155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 能安, 及到事來, 乃能慮. 能字自有道理. 是事至物來之際, 思之審, 處之當, 斯得之矣. 蘷孫(68이후). '''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곧 (마음의 방향이) 확정(定)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일이 닥쳤을 때에 사려(慮)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는 글자에는 자연히 이런 도리가 있다.<ref>일역판에서는 '당연히 없을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했고 영역판에서는 'naturally reasonable'이라고 했다. 14:154를 참조하라.</ref> 이는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깊이 생각하고 적절하게 대처해야 비로소 (마땅히 멈추어야 하는 지극한) 그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는 것이다. *  14:156 問: “據知止, 已是思慮了, 何故靜·安下復有箇‘慮’字?旣靜·安了, 復何所慮?” '''질문: '지지(知止)'가 이미 사려하는 행위인데 어째서 고요함(靜)과 편안함(安) 뒤에 다시 사려(慮)가 있습니까? 이미 고요하고 편안한데 무엇을 다시 사려합니까? 曰: “知止, 只是先知得事理如此, 便有定. 能靜能安, 及到事至物來, 乃能慮. ‘能’字自有意思. 謂知之審而後能慮, 慮之審而後能得.” 賜(66이후). '''대답: '지지(知止)'란, 그저 먼저 사물의 이치를 이렇게 알게 되면 (마음의 방향이) 확정되고, 고요(靜)할 수 있고 편안(安)할 수 있으며, 사태가 닥치고 사물이 밀려올 때 사려할 수 있다는 말일 뿐이다. '할 수 있다(能)'이라는 글자에 자연히 이런 뜻이 있다. 이는 앎이 깊어져야 사려할 수 있고, 사려가 깊어져야 얻을(得) 수 있음을 말한다.<ref>154부터 156까지는 사실상 같은 구절이다. 서로 비교해가며 읽어보면 해석은 어려울 것이 없다. 사소한 구문상의 차이는 기록자가 다르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ref> *  14:157 或問定靜安慮四節. '''어떤 사람이 정(定), 정(靜), 안(安), 려(慮) 네 단계에 대해 질문했다. 曰: “物格·知至, 則天下事事物物皆知有箇定理. 定者, 如寒之必衣, 飢之必食, 更不用商量. 所見旣定, 則心不動搖走作, 所以能靜. 旣靜, 則隨所處而安. 看安頓在甚處, 如處富貴·貧賤·患難, 無往而不安. 靜者, 主心而言; 安者, 主身與事而言. 若人所見未定, 則心何緣得靜. 心若不靜, 則旣要如彼, 又要如此, 身何緣得安. 能慮, 則是前面所知之事到得, 會行得去. 如平時知得爲子當孝, 爲臣當忠, 到事親事君時, 則能思慮其曲折精微而得所止矣.” 胡泳(69때). '''대답: 사물에 접촉하여(物格) 앎이 지극해지면(知至)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이 확정적인(定) 이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치가) 확정적(定)이란 것은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음식을 먹는 것처럼 (너무 당연해서)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견해가 이렇게 확정(定)되면 마음이 동요하거나 달아나지 않으므로 고요(靜)할 수 있다. 고요(靜)해지고 나면 가는 곳마다 편안할 수 있다.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예컨대 부귀함이나 빈천함이나 환난 등 어디에 처하더라도 (그곳에) 가는 족족 편안하다. 고요함(靜)은 마음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요 편안함(安)은 몸과 상황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만약 사람의 견해가 확정되지 않으면 마음이 어떻게 고요(靜)해질 수 있겠나. 마음이 고요(靜)하지 않으면 저렇게 하고 싶다가도 다시 이렇게 하고 싶어지니 몸이 어떻게 편안(安)할 수 있겠나.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눈 앞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태가 닥쳤을 때 그것을 (아는대로) 실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평소에 자식은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실제로)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길 때에 이르러 각각의 구체적이고 복잡한 사정과 미묘한 부분을 사려하여 (마땅히) 멈출 (최선의) 지점을 얻을(得) 수 있다. *  14:158 琮曰: “上面已自知止, 今慮而得者, 依舊是知底意思”云云. '''종(琮)의 질문: 위에서 이미 멈출 바를 알았다(知止)고 했는데 지금 사려하여(慮) 얻는(得)다고 하니 여전히 앎에 관한 뜻입니다. 先生曰: “只上面是方知, 下面是實得耳.” 선생의 대답: 위쪽 구문은 이제 막 알게 된 것이고 아래쪽 구문은 실제로 얻은 것이다. 問: “如此, 何用更過定·靜·安三箇節目?” '''질문: 그렇다면 왜 다시 '정(定)', '정(靜)', '안(安)'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까? 曰: “不如此, 不實得.” '''대답: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실제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曰: “如此, 上面知止處, 其實未有知也. 通此五句, 才做得‘致知在格物’一句.” '''질문: 그렇다면 위에서 멈출 바를 알았다고 한 것은 사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다섯 단계<ref>정, 정, 안, 려, 득의 다섯 단계를 말한다.</ref>를 통과해야 비로소 '치지는 격물에 달려있다(致知在格物)'라는 한 구절을 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今人之學, 卻是敏底不如鈍底. 鈍底循循而進, 終有得處. 敏底只是從頭呼揚將去, 只務自家一時痛快, 終不見實理.” 琮(65때記見). '''대답: 요즘 사람들의 배움은 영민한 사람이 우둔한 사람만 못하다. 우둔한 사람은 차근차근 나아가서 마침내 얻는 지점이 있다. 영민한 사람은 그저 처음부터 큰소리치며 한순간의 통쾌한 자기만족만에만 힘쓰다가 결국에 가서는 실제 이치를 보지 못한다. *  14:159 問: “定, 卽心有所向, 不至走作, 便靜; 靜, 便可以慮, 何必待安?” '''질문: 확정되면(定) 마음에 방향이 있어서 달아나지 않으니 고요(靜)하다고 하셨습니다. 고요(靜)하면 바로 사려할 수 있을 텐데 왜 사려하기 전에 편안(安)해져야 합니까? 曰: “安主事而言, 不安便不能思. 譬如靜坐, 有件事來撓, 思便不得專一. 定·靜·安都相似. 未到安處, 思量未得. 知止, 是知箇慈, 知箇孝. 到得時, 方是得箇慈, 得箇孝底道理. 慮, 是慮箇如何是慈, 如何是孝.” '''대답: 편안함(安)은 사태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편안(安)하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정좌(靜坐)중일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해 흔들어버리면 생각이 전일(專一)할 수 없다. 확정됨(定), 고요함(靜), 편안함(安)은 모두 비슷하다.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지 않으면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지지(知止)'는 자애를 알고 효성을 아는 것이다. '얻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애와 효성의 도리를 얻는 것이다.<ref>앞의 몇 개 조목에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얻음(得)'은 '멈출 곳을 얻었다(得其所止)'의 '얻음'이다. 도리를 알고 실천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최종단계, 즉 실천에까지 성공한 마지막 단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를 '터득했다'라든가 '체득했다'라고 번역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일역판의 경우 자주 체득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영역판은 일관되게 attain을 쓰고 있다. 비록 모호한 맛은 있지만 그래도 attain쪽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ref> 사려(慮)는 어떤 것이 자애이고 어떤 것이 효성인지 사려하는 것이다. 又問: “至於安時, 無勉强意思否?” '''재질문: 편안함(安)의 상태에 이르면 애써 하려는 생각(意思)이 없습니까? 曰: “在貧賤也安, 在富貴也安, 在這裏也安, 在那裏也安. 今人有在這裏不安了, 在那裏也不會安. 心下無理會, 如何會去思慮?” '''대답: 빈천에서도 편안(安)하고, 부귀에서도 편안(安)하며, 여기에서도 편안(安)하고, 저기에서도 편안(安)하다. 요즘 사람들은 여기서 편안(安)하지 않으니 저기서도 편안(安)하지 못하다. 마음으로 (이 편안함의 도리에 대한) 이해 없이<ref>사려할 수 있게 해주는 선결조건을 말하는 것이므로 '심하무리회'는 편안함에 대한 설명이어야만 한다. 영역판의 번역이 적절하여 취했다.</ref> 어떻게 사려할 수 있겠나? 問: “章句中‘慮謂思無不審’, 莫是思之熟否?” '''재질문: 대학장구에서 '려(慮)는 생각이 언제나 자세한 것이다'고 하신 것은 깊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曰: “慮是思之周密處.” 芝(63때). '''대답: '려(慮)'는 주밀(周密)한 생각이다. *  14:160 王子周問知止至能得. '''왕자주(王子周)가 '지지(知止)'에서 '능득(能得)'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 질문. 曰: “這數句, 只是要曉得知止. 不知止, 則不能得所止之地. 如‘定·靜·安’數字, 恰如今年二十一歲, 來年二十二歲, 自是節次如此來, 自不可遏. 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這三句, 卻緊要只是‘在止於至善’; 而不說知止, 則無下工夫處.” 震(65때). '''대답: "이 몇 구절은 단지 '지지(知止)'를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 멈출 지점을 알지 못하면 그 지점을 얻을 수 없다. '정(定)', '정(靜)', '안(安)' 등 몇 글자는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고, 신민(新民)에 있으며,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있다'는 이 세 구절 중에서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이 가장 긴요하다. 하지만 (삼강령에 바로 이어서) '지지(知止)'를 말하지 않으면 노력을 기울일 곳이 없게 된다. *  14:161 游子蒙問: “知止, 得止, 莫稍有差別否?” '''유자몽(游子蒙)<ref>이름은 개(開)이다.</ref>의 질문: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에는 차이가 있습니까? 曰: “然. 知止, 如射者之於的; 得止, 是已中其的.” '''대답; 그렇다. 지지(知止)는 사수와 과녁의 관계와 같고, 득지(得止)는 이미 과녁에 명중한 것과 같다. 問: “定·靜·安矣, 如之何而復有慮?” '''재질문: 정(定)·정(靜)·안(安)이 되었는데 어째서 다시 사려합니까? 曰: “慮是事物之來, 略審一審.” '''대답: 사려(慮)는 사태와 사물이 다가올 때 그것을 한 번 살펴보는 것이다.<ref>략(略)은 대강 하는 것이고 x일x(x一x) 같은 경우도 x를 한 번 해보다(대강 시도는 해보다) 정도의 의미이다. 무겁지 않게 툭 건드려 본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에 심(審)은 깊고 세심하게 살펴본다는 느낌이 있어서 뉘앙스가 서로 어긋난다.</ref> 劉淮叔通問: “慮與格物致知不相干.” '''유회(劉淮)(그의 자(字)는 숙통(叔通)인데)의 질문: 사려(慮)와 격물치지(格物致知)는 관련이 없는 것 아닙니까?<ref>사려도 이성적 탐구행위이고 격물치지도 이성적 탐구행위이므로 양자의 차이를 질문한 것이다.</ref> 曰: “致知, 便是要知父止於慈, 子止於孝之類. 慮, 便是審其如何而爲孝, 如何而爲慈. 至言仁則當如堯, 言孝則當如舜, 言敬則當如文王, 這方是得止.” '''대답: '치지(致知)'는 '아버지는 자애에 멈추고, 자식은 효도에 멈춘다'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사려(慮)는 어떻게 해야 효도가 되는지, 어떻게 해야 자애가 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는 것이다. 인(仁)으로 말하자면 요(堯)와 같아야 하고, 효로 말하자면 순(舜)과 같아야 하고, 경(敬)으로 말하자면 문왕(文王)과 같아야 한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멈출 지점을 얻었다(得止)'고 할 수 있다. 子蒙言: “開欲以‘明德’之‘明’爲如人之失其所有, 而一旦復得, 以喩之. 至‘慮’字, 則說不得.” '''자몽(子蒙)의 말: 저는(開) '밝은 덕(明德)'의 밝힘(明)을 사람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었다가 어느 날 문득 되찾는 것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려(慮)'라는 글자는 설명이 안 됩니다. 曰: “知止而有定, 便如人撞著所失, 而不用終日營營以求之. 定而靜, 便如人旣不用求其所失, 自爾甯靜. 靜而安, 便如人旣知某物在甚處, 某物在甚處, 心下恬然無復不安. 安而慮, 便如自家金物都自在這裏, 及人來問自家討甚金物, 自家也須將上手審一審, 然後與之. 慮而得, 則稱停輕重, 皆相當矣.” '''답하였다: 멈출 바를 알아서 (마음의 방향이) 확정된다(定)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우연히 발견하여 온종일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어진 것과 같다. 확정(定)되면 고요(靜)하다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 이상 자연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과 같다. 고요(靜)하면 편안(安)하다는 것은, 마치 이 물건은 여기에 있고 저 물건은 저기에 있다고 이미 다 알게 되어 마음이 편안하여 다시는 불안하지 않은 것과 같다. 편안(安)하면 사려(慮)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금붙이가 모두 여기에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그것을 조금 사가려고(討)<ref>이 글자는 다른 모든 번역판에서 '구하다', '요구하다' 등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주희의 마지막 발언을 고려할 때 대가를 치르고 사가는 형식이어야 말이 맞다. 이 글자가 '구매하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에 대해서는 한어대사전(漢語大辭典) 해당글자 항목의 9번째 뜻을 보라.</ref> 할 때, 자기 손에 (물건을) 올려두고 세심히 살펴본 다음에 주어야 하는 것과 같다. 사려(慮)하면 얻는(得)다는 것은, (그렇게 내어준 것과 받은 것의) 무게를 재어보아도 모두 정확히 맞는 것과 같다. 或又問: “何故知止而定·靜·安了, 又復言慮?” '''어떤 사람의 재질문: 왜 지지(知止)하여 정(定)·정(靜)·안(安)이 이루어진 후에도 다시 사려(慮)를 언급합니까? 曰: “且如‘可以予, 可以無予; 可以取, 可以無取; 可以死, 可以無死’, 這上面有幾許商量在.” 道夫(60이후). '''대답: 이를테면 '주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주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취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취하지 않는 게 맞는 경우, 죽어야 할 것 같지만 더 생각해보면 죽지 않는 게 맞는 경우'<ref>맹자 4B:23</ref>와 같은 문제들에서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ref>문장 말미의 '재(在)'자는 단정적인 어조를 나타낸다.</ref> 도부(道夫)의 기록 *  14:162 問“知止而後有定”. ''' "머물 곳을 알고나서 확정된다."에 대해 물었다. 曰: “須是灼然知得物理當止之處, 心自會定.” '''대답: 사물의 이치상 마땅히 머물러야 하는 지점(物理當止之處)을 분명히 알아야 마음이 저절로 굳게 확정된다. 又問: “上旣言知止了, 何更待慮而後能得?” '''재질문: 이 윗부분에서 이미 머물 곳을 알았다고 말했는데 왜 다시 '사려한 뒤에야 (머물 곳을)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겁니까? 曰: “知止是知事事物物各有其理. 到慮而後能得處, 便是得所以處事之理. 知止, 如人之射, 必欲中的, 終不成要射做東去, 又要射做西去. 慮而後能得, 便是射而中的矣. 且如人早間知得這事理如此, 到晩間心裏定了, 便會處置得這事. 若是不先知得這道理, 到臨事時便脚忙手亂, 豈能慮而有得!” '''대답: '머물 곳을 알았다'는 것은 사사물물에 각각 리가 있음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사태를 처리하는 이치(理)<ref>뒤에 나오겠지만 여기서의 얻음(得)은 실제로 윤리적 실천을 해냈다는 뜻이다. 앞쪽에서 '사사물물의 리'를 알았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위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는 것이고 여기서 '처사의 리'를 '득'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실화할 것인가 하는 방안을 얻어서 그 일을 해냈다는 뜻이다.</ref>를 얻었다는 것이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사람이 활을 쏠 때 반드시 과녁에 적중하기를 원하지 설마하니<ref>불성(不成)은 현대 중국어의 난다오(難道)와 비슷하다.</ref> 동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서쪽으로 빗맞추려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사려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쏘아서 과녁에 적중한 것이다.<ref>다시 설명하자면 얻음(得)은 윤리의 인식과 실천이라는 한 사이클의 마침표이다. '터득하다'라고 해서는 실제로 화살을 쏘았다는 실천적 함의가 부족하다. '얻었다' '해냈다' 정도가 적합하다.</ref> 또 비유하자면 누군가 아침에 이 사태의 이치가 이러하다는 것을 알고 저녁에 이르러 마음이 굳게 정해지면 이 일을 실제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앞서서 이 도리를 알지 못했다면 사태에 임하여 손발을 허둥거릴 것이다. 어찌 '사려하여 얻을' 수 있겠는가? 問: “未格物以前, 如何致力?” '''질문: 격물(格物)하기 이전에는 어떻게 노력합니까? 曰: “古人這處, 已自有小學了.” 砥(61때). 寓同. '''대답: 고대인은 이 단계에서 이미 소학(小學)으로 다져진 공부가 있었다. *  14:163 子升問知止·能慮之別. '''자승이 '머물 곳을 안다'와 '사려할 수 있다'의 차이를 물었다. 曰: “知止, 是知事物所當止之理. 到得臨事, 又須硏幾審處, 方能得所止. 如易所謂‘惟深也故能通天下之志’, 此似知止; ‘惟幾也故能成天下之務’, 此便是能慮. 聖人言語自有不約而同處.” '''대답: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에 있어 (우리가) 어떤 자리에 응당 머물러야 하는지 그 이치(理)를 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사태에 임하여서는 추가로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피고<ref>연기(硏幾)는 주역 계사상전의 '극심연기(깊이 파고들고 기미를 살핀다)'에서 나온 말이다. 눈 앞에서 진행중인 사태의 성격을 규정하고 앞으로의 향방을 결정할 미묘한 변수들을 세밀하게 살핀다는 말이다. 14:146 참조.</ref> 신중하게 대처(審處)해야만 머물 곳을 얻을 수 있다(能得所止). 주역에서 이른바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천하 모든 것의 의지를 완전히 이해한다(通)'<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머물 곳을 안다'와 비슷하다. '사태의 기미를 세밀하게 살폈(幾)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을 완수할 수 있다'<ref>주역 계사상전</ref>는 것은 '생각할 수 있다'에 해당한다. 성인들의 말에는 미리 맞춰보지 않고도 동일한 경우가 있다.<ref>대학에서 말한 내용과 계사상전에서 말한 내용이 서로 짠 것도 아닌데 동일하다는 뜻이다. </ref> 木之說: “如此則知止是先講明工夫, 能慮是臨事審處之功.” '''목지의 말: 그렇다면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일에) 앞서서 도리를 따지고 밝히는 노력이고 '사려할 수 있다'는 것은 일에 임해서 신중하게 대처한다는 (실질적) 효과로군요. 曰: “固是.” '''대답: 정말로 그렇다. 再問: “‘知止而后有定’, 注謂‘知之則志有定向’. 或問謂‘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皆有定理矣’. 語似不同, 何也?” '''재질문: '머물 곳을 알고 나서 확정된다'는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주석은 '알고 나면 심지에 확정된 방향이 생긴다'입니다. 대학혹문에서는 '머물 곳을 알 수 있으면 마음 속에서 사사물물에 모두 확정된 이치(理)가 있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말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ref>목지가 지적한 대로 두 텍스트는 확정(定)이라는 글자를 조금 다르게 사용했다. 대학장구에서는 윤리적 당위를 인식한 뒤에 그 당위를 실천하기 위한 의지력이 굳어졌다는 뜻으로 풀이했다. 영역판(2018)에서는 이를 determination이라고 풀었는데 타당하다. 반면에 대학혹문에서는 각각의 마음 속으로 각각의 윤리적 당위가 확정적인 윤리적 당위라고 믿게 되었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각각의 당위가 확정적이라고 믿게 되면 윤리적 실천을 향한 그 사람의 의지는 굳어질 것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쪽에서 주희가 '정'자의 훈고를 다르게 했다는 것은 변함 없는 사실이다.</ref> 曰: “也只一般.” 木之(68때). '''대답: 둘 다 같은 말이다. *  14:164 知止, 只是知有這箇道理, 也須是得其所止方是. 若要得其所止, 直是能慮方得. 能慮卻是緊要. 知止, 如知爲子而必孝, 知爲臣而必忠. 能得, 是身親爲忠孝之事. 若徒知這箇道理, 至於事親之際, 爲私欲所汨, 不能盡其孝; 事君之際, 爲利祿所汨, 不能盡其忠, 這便不是能得矣. 能慮, 是見得此事合當如此, 便如此做. 道夫(60이후). '''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가 있음을 아는 것 정도이다. 이에 더하여 또 반드시 머물 곳을 얻어야만(得) 된다. 머물 곳을 얻으려면 '사려할 수 있(能慮)'어야만 된다. '사려할 수 있(能慮)'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머물 곳을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자식으로서 반드시 효도해야 함을 아는 것, 신하로서 반드시 충성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려하여) '얻음'은 몸소 충효한 일을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그저 이러이러한 도리를 알기만 할 뿐이라면 어버이를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사욕에 사로잡혀 그 효를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요 임금을 실제로 섬기게 되었을 때 녹봉에 사로잡혀 그 충을 완벽하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얻을 수 있음(能得)'이 아닌 것이다. 사려할 수 있다(能慮)는 것은 이 일은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서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  14:165 人本有此理, 但爲氣稟物欲所蔽. 若不格物·致知, 事至物來, 七顚八倒. 若知止, 則有定, 能慮, 得其所止. 節(64이후). '''사람에겐 본래 이 이치가 있으나 타고난 기질(氣稟)과 물욕에 가로막힌다. 만약 (미리미리) 격물치지하지 않으면 사태와 사물이 다가왔을 적에 반드시 엉망진창 실패할<ref>七顚八倒는 여러차례 넘어진다는 뜻이다. 경덕전등록에 두 차례 나온다.</ref> 것이다. 머물 곳을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사려할 줄 알게되고, 머물 지점을 얻게 된다. *  14:166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알면'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한 질문. 曰: “眞箇是知得到至善處, 便會到能得地位. 中間自是效驗次第如此. 學者工夫卻在‘明明德, 新民, 止於至善’上. 如何要去明明德, 如何要去新民, 如何要得止於至善, 正當理會. 知止·能得, 這處卻未甚要緊. 聖人但說箇知止·能得樣子在這裏.” 㝢(61이후). '''대답: 진실로 지선(至善)한 지점을 알 수 있어야 '얻을 수 있다'의 지위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사이의 것들은<ref> 지知/정定/정靜/안安/려慮/득得 가운데 '심지의 확정'부터 '사려할 수 있음'까지를 말한다.</ref> 원래 체감되는 효과의 단계가 이와 같다는 말이다. 학자가 힘 쓸 자리는 오히려 '명명덕, 신민, 지어지선' 쪽이다. 다름아니라 어떻게 명덕을 밝힐 것인가, 어떻게 백성을 새롭게 할 것인가, 어떻게 지선한 지점에 머물 것인가를 이해해야 한다.<ref>일역판에서는 '응당 씨름해야 할 문제다'라고 풀었다.</ref> '머물 곳을 안다'나 '얻을 수 있다' 같은 곳들은 그리 긴요하지 않다. 성인이 여기서 단지 '머물 곳을 알'에서 '얻을 수 있음'까지 이어지는 과정<ref>양자(樣子)는 모양새, 구조, 형태, 샘플 등으로 풀 만하다. 여기서는 지지에서 능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를 가리키므로 과정이라는 표현도 좋다.</ref>을 설명하신 것 뿐이다. *  14:167 陳子安問: “知止至能得, 其間有工夫否?” '''진자안의 질문: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에 갈 때 까지 중간에 힘써 노력해야 합니까? 曰: “有次序, 無工夫. 才知止, 自然相因而見. 只知止處, 便是工夫.” '''대답: 순서는 있지만 힘써 노력할 지점은 없다.<ref>앞선 몇 조목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이야기이다. 이 몇 가지는 자연스러운 진행순서이지 각 단계별로 노력해야 하는 과제물이 아니다.</ref>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나머지 네 가지는)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서(相因) 드러난다. 오직 머물 곳을 안다는 부분만이 힘써 노력할 지점이다. 又問: “至善須是明德否?” '''재질문: 지선(至善)은 명덕(明德)이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ref>각각의 상황과 사건에 있어서 각자가 처해야 할 최선의 스탠스, 도덕적으로 가장 훌륭한 포지션이 있다. 그런 포지션/스탠스가 '지선'이고 그런 포지션을 잡고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야 함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다. 예컨대 곤경에 처한 사람이 눈 앞에서 도와달라고 외치는 상황/사건에서는 (달리 고려할 요소가 없을 경우) 내 힘 닿는 한 도와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지선)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머물 곳을 안다'이고 실제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까지 성공할 경우 '얻었다'고 한다. 명덕은 그런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그때그때 알아차리는 내 내면의 밝은 빛(=명덕)이다. 무엇이 가장 훌륭한 스탠스인지에 대한 앎이 우리 내면에 본유한다고 보면 가장 훌륭한 스탠스란 사실 내 내면의 밝은 빛과 같은 것이다. 사랑이라는 덕목과 남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은 전자는 객관도덕률 후자는 나의 도덕심리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실질은 다르지 않다.</ref> 曰: “至善雖不外乎明德, 然明德亦有略略明者. 須是止那極至處.” 銖(67이후). '''대답: 지선이 비록 명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명덕의 밝기가 희미한 경우가 있으니 (그런 경우)저 지극히 선한 지점에서 머물러야 한다.<ref>이런 언급을 보면 주희는 확실히 실천 실패 현상에 대해 적잖이 고민한 것이다. 마음처럼 실천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억지로라도 해내고야 마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ref> *  14:168 眞知所止, 則必得所止, 雖若無甚間隔, 其間亦有少過度處. 健步勇往, 勢雖必至, 然移步亦須略有漸次也. '''진정으로 머물 곳을 알았으면 필연적으로 머물 곳을 얻게 된다.<ref>취해 마땅한 가장 훌륭한 스탠스를 진정으로 알았으면 실제로 그 스탠스를 취하게 된다는 뜻이다.</ref> 비록 (앎과 얻음 사이에) 별 간격이 없어 보이지만 그 사이에는 역시 거쳐가야 하는 단계들이 약간 존재한다. 굳건하고 용맹하게 앞으로 걸어가서 필연적으로 목적지에 도달할 기세라고 하더라도 보행에는 역시 순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ref>일역판은 주희집 권57의 답진안경 2서와 5서, 그리고 대학혹문의 해당부분을 인용하여 주희의 이러한 밍밍한 태도에 대한 진순의 불만을 보여주고 있다. 일단 진정한 앎이 필연적으로 진정한 실천을 이어진다고 말한 순간 여기에는 필연성이 존재하므로 양자 사이에 그 어떤 '간격'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천실패의 리스크가 존재한다고 자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이러한 리스크를 자인하는 순간 맨 앞에서 '필연적'이라고 말한 것은 거짓말이 되어버린다. 실패할 수 있는 미션을 필연적으로 성공한다고 묘사할 수 있겠는가?</ref> *  14:169 林子淵問知止至能得. '''임자연이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하여 질문. 曰: “知與行, 工夫須著並到. 知之愈明, 則行之愈篤; 行之愈篤, 則知之益明. 二者皆不可偏廢. 如人兩足相先後行, 便會漸漸行得到. 若一邊軟了, 便一步也進不得. 然又須先知得, 方行得. 所以大學先說致知, 中庸說知先於仁·勇, 而孔子先說‘知及之’. 然學問·愼思·明辨·力行, 皆不可闕一.” 賀孫(62이후). '''앎과 실천은 둘 다 해내도록(並到) 노력해야 한다. 앎이 밝아지면 실천이 독실해지고 실천이 독실해지면 앎이 밝아진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는 어느 한 쪽을 폐기할 수 없다. 예컨대, 걸을 때 사람의 두 다리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교차하면 점점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ref>일역판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라고 풀었다. 이는 '行得到'의 '到'를 '도달하다'라는 의미로 강하게 풀이한 결과이다. 하지만 현대 중국어에서 v+得到은 단순히 '~해내다'정도의 의미이다. 바로 이어지는 구절의 '進不得'이 '전진할 수 없다'인 것과 짝을 이룬다.</ref> 만약 어느 한쪽 다리라도 물러지면<ref>쉬지 않고 잘 걷는 것을 '굳세다'고 하고 제대로 못 걷는 것을 '연하다'(軟)고 한다. 여기서는 어감을 살리기 위해 무르다로 번역했다.</ref>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먼저 알아야지 실천할 수 있다. 그래서 대학에서는 먼저 치지(致知)를 말했고<ref>8조목 가운데 언급 순서로 2위이다. 1위인 격물이 사실상 치지와 구분하기 어려운 단계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공동 1위라고 해도 좋겠다.</ref> 중용에서는 인(仁)과 용(勇)보다 지(知)를 먼저 말했다.<ref>중용 제 20장에 '지인용'이라고 쓴 부분이 있다. 물론 이렇게 사소한 언급순서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조금 과해 보인다.</ref> 공자는 '앎이 충분해도...'<ref>논어 위령공편에 나온다. 子曰 知及之,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 (앎이 충분해도 인으로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어도 반드시 잃을 것이다). 그런데 논어 쪽의 의미는 앎의 우선성에 대한 강조라기보다는 훌륭한 품성으로 그 앎을 지켜내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ref>라고 했다. 하지만 배우고묻고(學問), 신중히 사려하고(愼思), 분명히 분별하고(明辨), 힘껏 실천하는(力行)<ref>중용 제20장에 나오는 다섯 공부를 네 개로 압축하고 글자를 약간 바꿔서 인용한 것이다. 본래는 박학/심문/신사/명변/독행이다.</ref> 것은 하나도 빼먹을 수 없다. *  14:170 問“知止能得”一段. ''' '머물 곳을 알고 얻을 수 있다' 단락에 대한 질문. 曰: “只是這箇物事, 滋長得頭面自各別. 今未要理會許多次第, 且要先理會箇知止. 待將來熟時, 便自見得.” '''대답: 이 부분(지지~능득)은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것인데(滋長得) 단지 중간 단계들이(頭面) 서로 구별될 뿐이다(自各別)<ref>이 부분은 해석이 쉽지 않다. 일역판은 '공부가 순숙해지면 서로 다른 면모가 저절로 모습을 드러낸다'라고 풀었다. '자장득'을 공부의 진전으로, '두면'을 면모로, '각별'을 서로 다르다로 풀이한 것. 왕효농의 영역본은 'this is the same thing-event which manifests itself in different faces'라고 했는데 어쩐지 '자장득'은 누락된 듯하다. 여기서는 '지시저개물사'와 '자장득두면자각별' 사이에 찍힌 구두점을 빼고 해석하였다. 지/정/정/안/려/득으로 이어지는 시퀸스의 자연스러움과 필연성에 대해서는 14:160에서 "마치 올해 스물한 살이면 내년에 스물두 살이 되는 것처럼 자연히 순서가 이렇기 때문에 원래 막을 수 없는 것"라고 표현한 바 있다.</ref> 지금 여러 순서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 우선 '머물 곳을 안다' 하나를 이해하도록 하라. 장차 익숙해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論看文字, 只要虛心濯去舊聞, 以來新見. 時擧(64이후). '''선생께서는 텍스트 독해를 논하실 적에 단지 마음을 비우고 예전에 들은 것을 씻어내어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라고(濯去舊聞, 以來新見)<ref>장재의 경학리굴에 나오는 표현이다. 근사록 권3에서도 인용하고 있다.</ref> 하셨다. *  14:171 黃去私問知止至能得.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黃義剛)의 형인 황의용(黃義勇)이다.</ref>가 '머물 곳을 안다'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 부분에 대해 질문함. 曰: “工夫全在知止. 若能知止, 則自能如此.”<ref>일역판의 교감기에 따르면 조선고사본은 이 뒤에 15:47을 이어붙여서 하나의 조목으로 인식했다고 한다.</ref> 人傑(51이후). '''힘쓸 곳은 오직 '머물 곳을 안다'이다. 머물 곳을 알기만 하면 저절로 이렇게 할 수 있다. *  14:172 知止至能得, 譬如喫飯, 只管喫去, 自會飽. 德明(44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밥 먹는 것과 같다. 쭉 먹다 보면 저절로 배가 찬다.<ref>14:168과 취지가 같다.</ref> *  14:173 問知止至能得.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에 대해 질문함. 曰: “如人飮酒, 終日只是喫酒. 但酒力到時, 一杯深如一杯.” 儒用(70때). '''대답: 음주와 비슷하다. 하루종일 술을 마시다 주량의 한계에 달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한 잔에 한 잔 만큼 취기가 깊어진다.<ref>일역본의 각주에 의하면 '一AB如一A'는 A할 때마다 B가 된다는 뜻이다. 15:85와 61:43 참조.</ref> <ref>직전 두 개 조목과 포인트가 같다. '앎' 부분에 힘을 쏟다 보면 나머지가 저절로 될 거라는 낙관적 공부론이다.</ref> *  14:174 知止至能得, 是說知至·意誠中間事. 閎祖(59이후). ''' '머물 곳을 안다' 부터 '얻을 수 있다' 까지는 앎이 지극해진다(知至)와 생각이 순수해진다(意誠) 사이의 일이다.<ref>앎이 지극해진다와 생각이 순수해진다는 팔조목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이다.</ref> *  14:175 大學章句說靜處, 若兼動, 卽便到“得”地位, 所以細分. 方(41때). '''(이 부분에 대한) 대학장구의 해석은 정적인 측면을 말한 것이다. 동적인 측면을 겸하면 곧장 '얻었다'의 단계에 도착해버린다. 그래서 중간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ref>이 부분을 해설하자면 다음과 같다. 앎에서 실천으로 이어지는 중간단계들을 추론하자면 대학장구에서 설명한 것처럼 연쇄작용의 전말을 하나씩 열거할 수 있다. 알면 심지가 확정되고 확정되면 고요하고 고요하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실천하게 된다는 것은 모두 이미 일어난 도덕실천을 사후에 돌이켜 분석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 도덕실천의 순간에 임해서는 앎과 실천 사이의 여러 단계는 매우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이 그것을 단계별로 관측하고 숙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역판에서는 '대학장구에서 고요함(靜)을 해석한 부분은...'과 같이 풀었으나 적당하지 않아 보인다.</ref> *  14:176 問: “知與得如何分別?” '''질문: 머물 곳을 알았다(知)와 머물 곳을 얻었다(得)는 어떻게 구별합니까? 曰: “知只是方知, 得便是在手.” '''대답: 알았다는 것은 이제 막 안 것이고 얻었으면 손에 넣은 것이다. 問: “得莫是行所知了時?” '''질문: 얻었다는 것은 알게 된 것을 실천하는 단계 아닙니까? 曰: “也是如此.” '''대답: 그 또한 그렇다. 又曰: “只是分箇知與得. 知在外, 得便在我.” 士毅(미상). '''다시 대답: 앎과 얻음을 구별하자면 앎은 바깥에 있고 얻었으면 나에게 있는 것이다. <知·得> '''<앎과 얻음에 관한 설명> bwn968jxfvmls5iwk4dkqbf5f2xxqgs 페이지:論語諺解 권3.djvu/51 250 86751 345368 326923 2024-11-20T02:11:32Z Motoko C. K. 4287 34536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몯ᄒᆞ야去<small>거</small>홀띤댄이三<small>삼</small>者<small>쟈</small>애어늬를몬져ᄒᆞ리잇고ᄀᆞᆯᄋᆞ샤ᄃᆡ兵<small>병</small>을去<small>거</small>홀띠니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子<small>ᄌᆞ</small>貢<small>공</small>{{분주|이|}}曰<small>왈</small>必<small>필</small>不<small>불</small>得<small>득</small>已<small>이</small>而<small>이</small>去<small>거</small>{{분주|고|대}}於<small>어</small>斯<small>ᄉᆞ</small>二<small>이</small>者<small>쟈</small>{{분주|애|}}何<small>하</small>先<small>션</small>{{분주|이리|잇고}}曰<small>왈</small>去<small>거</small>食<small>식</small>{{분주|이|니}}自<small>ᄌᆞ</small>古<small>고</small>皆<small>ᄀᆡ</small>有<small>유</small>死<small>ᄉᆞ</small>{{분주|ᅵ어|니와}}民<small>민</small>無<small>무</small>信<small>신</small>不<small>불</small>立<small>립</small>{{분주|이니|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子<small>ᄌᆞ</small>貢<small>공</small>이ᄀᆞᆯ오ᄃᆡ반ᄃᆞ시시러곰마디몯ᄒᆞ야去<small>거</small>홀띤댄이二<small>이</small>者<small>쟈</small>애어늬를몬져ᄒᆞ리잇고ᄀᆞᆯᄋᆞ샤ᄃᆡ食<small>식</small>을去<small>거</small>{{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znktlcl46h16mzqgud8u5un35we385 페이지:論語諺解 권3.djvu/52 250 86754 345369 336539 2024-11-20T02:13:32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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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34537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子<small>ᄌᆞ</small>貢<small>공</small>이ᄀᆞᆯ오ᄃᆡ惜<small>석</small>홉다夫<small>부</small>子<small>ᄌᆞ</small>의말ᄉᆞᆷ이君<small>군</small>子<small>ᄌᆞ</small>{{분주|ᅵ|}}나駟<small>ᄉᆞ</small>도舌<small>셜</small>에밋디몯ᄒᆞ리로다<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文<small>문</small>猶<small>유</small>質<small>질</small>也<small>야</small>{{분주|ᅵ|며}}質<small>질</small>猶<small>유</small>文<small>문</small>也<small>야</small>{{분주|ᅵ|니}}虎<small>호</small>豹<small>표</small>之<small>지</small>鞟<small>곽</small>{{분주|이|}}猶<small>유</small>犬<small>견</small>羊<small>양</small>之<small>지</small>鞟<small>곽</small>{{분주|이니|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文<small>문</small>이質<small>질</small>ᄀᆞᆮᄐᆞ며質<small>질</small>이文<small>문</small>ᄀᆞᆮᄐᆞ니호豹<small>표</small>의鞟<small>곽</small>이犬<small>견</small>羊<small>양</small>의鞟<small>곽</small>ᄀᆞᄐᆞ니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哀<small>ᄋᆡ</small>公<small>공</small>{{분주|이|}}問<small>문</small>於<small>어</small>有<small>유</small>若<small>약</small>曰<small>왈</small>年{{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ku8f2akd5umw19fjrg7sj5c4144vu87 페이지:論語諺解 권3.djvu/54 250 86777 345371 327126 2024-11-20T02:16:18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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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34537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small>년</small>饑<small>긔</small>用<small>용</small>不<small>불</small>足<small>족{{분주|ᄒᆞ|니}}</small>如<small>여</small>之<small>지</small>何<small>하{{분주|오|}}</small><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哀<small>ᄋᆡ</small>公<small>공</small>이有<small>유</small>若<small>약</small>의게무러ᄀᆞᆯ오ᄃᆡ年<small>년</small>이饑<small>긔</small>ᄒᆞ야用<small>용{{분주|이|}}</small>足<small>죡</small>디몯ᄒᆞ니엇디ᄒᆞ료<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有<small>유</small>若<small>약{{분주|이|}}</small>對<small>ᄃᆡ</small>曰<small>왈</small>盍<small>합</small>徹<small>쳘</small>乎<small>호{{분주|&nbsp;ᅵ시|니잇고}}</small><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有<small>유</small>若<small>약</small>이對<small>ᄃᆡ</small>ᄒᆞ야ᄀᆞᆯ오ᄃᆡ엇디徹<small>쳘</small>티아니ᄒᆞ시ᄂᆞᆫ니잇고<br> 曰{{더더작게|왈}}二{{더더작게|이}}{{분주|도|}}吾{{더더작게|오}}猶{{더더작게|유}}不{{더더작게|불}}足{{더더작게|죡}}{{분주|이어|니}}如{{더더작게|여}}之{{더더작게|지}}何{{더더작게|하}}其{{더더작게|기}}徹{{더더작게|쳘}}也{{더더작게|야}} {{분주|&nbsp;ᅵ리|오}}{{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tmm81fkyxkuph24e34oothtjkkwep68 페이지:論語諺解 권3.djvu/55 250 86939 345373 327183 2024-11-20T02:17:57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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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345376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齊{{더더작게|제}}景{{더더작게|경}}公{{더더작게|공}}이政{{더더작게|졍}}을孔{{더더작게|공}}子{{더더작게|ᄌᆞ}}ᄉᄭᆡ묻ᄌᆞ온대<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孔{{더더작게|공}}子{{더더작게|ᄌᆞᅵ}}對{{더더작게|ᄃᆡ}}曰{{더더작게|왈}}君{{더더작게|군}}君{{더더작게|군}}臣{{더더작게|신}}臣{{더더작게|신}}父{{더더작게|부}}父{{더더작게|부}}子{{더더작게|ᄌᆞ}}子{{더더작게|ᄌᆞ}}{{분주|ᅵ니|이다}}<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孔{{더더작게|공}}子{{더더작게|ᄌᆞᅵ}}對{{더더작게|ᄃᆡ}}ᄒᆞ야ᄀᆞᆯᄋᆞ샤ᄃᆡ君{{더더작게|군}}이君{{더더작게|군}}ᄒᆞ며臣{{더더작게|신}}이臣{{더더작게|신}}ᄒᆞ며父{{더더작게|부ᅵ}}父{{더더작게|부}}ᄒᆞ며子{{더더작게|ᄌᆞᅵ}}子{{더더작게|ᄌᆞ}}홈이니이다<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公{{더더작게|공이}}曰{{더더작게|왈}}善{{더더작게|션}}㢤{{더더작게|ᄌᆡ라}}信{{더더작게|신}}如{{더더작게|여}}君{{더더작게|군}}不{{더더작게|불}}君{{더더작게|군}}{{분주|ᄒᆞ|며}}臣{{더더작게|신}}不{{더더작게|불}}臣{{더더작게|신}}{{분주|ᄒᆞ|며}}父{{더더작게|부}}不{{더더작게|불}}父{{더더작게|부}}{{분주|ᄒᆞ|며}}子{{더더작게|ᄌᆞ}}不{{더더작게|불}}子{{더더작게|ᄌᆞ}}{{분주|ᅵ|면}}雖{{더더작게|슈}}有{{더더작게|유}}粟{{더더작게|속}}{{분주|이|나}}吾{{더더작게|오}}{{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h6vofgfcwz5w25t1zacl7xtrkdzmym2 페이지: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5 250 91097 345350 335536 2024-11-20T01:50:09Z Motoko C. K. 4287 34535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則{{더더작게|즉}}父{{더더작게|부}}慈{{더더작게|ᄌᆞ}}子{{더더작게|ᄌᆞ}}孝{{더더작게|효}}{{분주|ᄒᆞ|며}}君{{더더작게|군}}義{{더더작게|의}}臣{{더더작게|신}}忠{{더더작게|츙}}{{분주|ᄒᆞ|며}}夫{{더더작게|부}}和{{더더작게|화}}婦{{더더작게|부}}順{{더더작게|슌}}{{분주|ᄒᆞ|며}}兄{{더더작게|형}}友{{더더작게|우}}第{{더더작게|뎨}}恭{{더더작게|공}}{{분주|ᄒᆞ|며}}朋{{더더작게|붕}}友{{더더작게|우}}輔{{더더작게|보}}仁{{더더작게|인}}然{{더더작게|연}}後{{더더작게|후}}{{분주|에|샤}}方{{더더작게|방}}可{{더더작게|가}}謂{{더더작게|위}}之{{더더작게|지}}人{{더더작게|인}}矣{{더더작게|의}}{{분주|리|라}}{{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하ᄂᆞᆯ과ᄯᅡᄉᆞ이에만물이만흔디오직사ᄅᆞᆷ이ᄀᆞ쟝귀ᄒᆞ니샤ᄅᆞᆷ을귀히녁기ᄂᆞᆫ바ᄂᆞᆫ곳다ᄉᆞᆺ가지인륜이이시므로ᄡᅦ라이런고로ᄆᆡᆼᄌᆡᄀᆞᆯᄋᆞ샤ᄃᆡ아비와ᄌᆞ식이친홈이이시며님금과신해의이시며지아비와지어미분별이이시며얼운과어린이ᄎᆞ례이시며벗과벗이밋브미이심이라ᄒᆞ시니사ᄅᆞᆷ이요다ᄉᆞᆺ가지덧덧ᄒᆞᆫ거시잇시믈아지못ᄒᆞ면그ᄂᆞᆯ즘ᄉᆡᆼ과긜즘성에어긔미멀지아니리라그러면아비ᄉᆞ랑ᄒᆞ고ᄌᆞ식이효도ᄒᆞ며님금이의ᄒᆞ고신ᄒᆡ{{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j1apvs26j7jaio5l3sp0tldrsyd84k4 페이지: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6 250 91098 345352 335540 2024-11-20T01:52:56Z Motoko C. K. 4287 34535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츙셩ᄒᆞ며지아비화ᄒᆞ고지어미슌ᄒᆞ며형이우ᄋᆡᄒᆞ고아이공슌ᄒᆞ며벗과벗이어진거ᄉᆞᆯ도은연후에사ᄇᆡ야흐로가히사ᄅᆞᆷ이라니ᄅᆞ리라{{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父{{더더작게|부}}子{{더더작게|ᄌᆞ}}有{{더더작게|유}}親{{더더작게|친}}{{분주|아비와ᄌᆞ식이친|홈이이심이라}}{{옛한글쪽 끝}} 父{{더더작게|부}}子{{더더작게|ᄌᆞ는}}天{{더더작게|텬}}性{{더더작게|셩}}之{{더더작게|지}}親{{더더작게|친}}{{분주|이|라}}生{{더더작게|ᄉᆡᆼ}}而{{더더작게|이}}育{{더더작게|육}}之{{더더작게|지}}{{분주|ᄒᆞ|고}}愛{{더더작게|ᄋᆡ}}而{{더더작게|이}}敎{{더더작게|교}}之{{더더작게|지}}{{분주|ᄒᆞ|며}}奉{{더더작게|봉}}而{{더더작게|이}}承{{더더작게|승}}之{{더더작게|지}}{{분주|ᄒᆞ|고}}孝{{더더작게|효}}而{{더더작게|이}}養{{더더작게|양}}之{{더더작게|지}}{{분주|ᄒᆞᄂᆞ|니}}{{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是{{더더작게|시}}故{{더더작게|고로}}敎{{더더작게|교}}之{{더더작게|지}}以{{더더작게|이}}義{{더더작게|의}}方{{더더작게|방}}{{분주|ᄒᆞ|야}}弗{{더더작게|불}}納{{더더작게|납}}於{{더더작게|어}}邪{{더더작게|샤}}{{분주|ᄒᆞ|며}}柔{{더더작게|유}}聲{{더더작게|셩}}以{{더더작게|이}}諫{{더더작게|간}}{{분주|ᄒᆞ|야}}不{{더더작게|블}}使{{더더작게|ᄉᆞ}}得{{더더작게|득}}罪{{더더작게|죄}}於{{더더작게|어}}鄕{{더더작게|향}}黨{{더더작게|당}}州{{더더작게|쥬}}閭{{더더작게|려}}{{분주|ᄒᆞᄂᆞ|니}}苟{{더더작게|구}}或{{더더작게|혹}}父{{더더작게|부}}而{{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4xeucjlc5jxm2n7ddt5uux888c62q5w 페이지: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8 250 91101 345353 335544 2024-11-20T01:53:26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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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34535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고어미은{{분주|츙셩되고신실|신실ᄒᆞᆫ말아니ᄂᆞᆫ것}}ᄒᆞ야일ᄶᅳᆨ슌을주기고져ᄒᆞ거ᄂᆞᆯ슌이능히효도로ᄡᅥ화케ᄒᆞ샤졈졈다ᄉᆞ려간사ᄒᆞᆫ듸니르지아니케ᄒᆞ시효ᄌᆞ의되이예지극ᄒᆞ도다공ᄌᆡᄀᆞᆯᄋᆞ샤ᄃᆡ다ᄉᆞᆺ가지형벌{{분주|墨묵ᄌᆞ즈ᄒᆞᄂᆞᆫ것刖월발베ᄂᆞᆫ것劓의코버히ᄂᆞᆫ것篦비무릅버히는|것宮궁불썩이는것이오大ᄃᆡ劈벽죽이는것}}의ᄅᆔ삼쳔이로ᄃᆡ죄불효에셔큰이업다ᄒᆞ시니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君{{더더작게|군}}臣{{더더작게|신}}有{{더더작게|유}}義{{더더작게|의}}{{분주|님금과신해|의의리이라}}<br>{{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君{{더더작게|군}}臣{{더더작게|신은}}天{{더더작게|텬}}地{{더더작게|디}}之{{더더작게|지}}分{{더더작게|분}}{{분주|이|라}}尊{{더더작게|존}}且{{더더작게|챠}}貴{{더더작게|귀}}焉{{더더작게|언}}{{분주|ᄒᆞ|며}}卑{{더더작게|비}}且{{더더작게|챠}}賤{{더더작게|쳔}}焉{{더더작게|언}}{{분주|ᄒᆞ|니}}尊{{더더작게|존}}貴{{더더작게|귀}}之{{더더작게|지}}使{{더더작게|ᄉᆞ}}卑{{더더작게|비}}賤{{더더작게|쳔과}}卑{{더더작게|비}}賤{{더더작게|쳔}}之존{{더더작게|지}}使{{더더작게|ᄉᆞ}}尊{{더더작게|존}}貴{{더더작게|귀ᄂᆞᆫ}}天{{더더작게|텬}}地{{더더작게|디}}之{{더더작게|지}}常{{더더작게|샹}}經{{더더작게|경}}{{분주|이|며}}古{{더더작게|고}}今{{더더작게|금}}之{{더더작게|지}}通{{더더작게|통}}義{{더더작게|의라}} {{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5frffqr8uyqz2vt4hxwy1sl3iij5ti 페이지: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11 250 91107 345355 335574 2024-11-20T01:54:42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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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4287 34536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Lawhunt" /></noinclude><big> :{{옛한글쪽 시작}}ᄒᆞ리오그러면효되사ᄅᆞᆷ의게크되ᄯᅩᄒᆞᆫ놉고멀어ᄒᆡᆼᄒᆞ기어려온일이아니라그러나스스로나며아ᄂᆞᆫ이아니면반ᄃᆞ시학문{{분주|ᄇᆡ화문|ᄂᆞᆫ다말}}에ᄌᆞ뢰ᄒᆞ야알디미학문엣도ᄂᆞᆫ다ᄅᆞᆫ거시업슨디라쟝ᄎᆞᆺ녜와이제ᄅᆞᆯ통ᄒᆞ며ᄉᆞ리를ᄉᆞᄆᆞᆺ차ᄆᆞᄋᆞᆷ에두며몸의톄{{분주|법벗|다말}}ᄒᆞ고쟈홈이니가히그학문의힘을힘ᄡᅳ디아니ᄒᆞ랴이러모로ᄡᅥ그력ᄃᆡ{{분주|지난|년ᄃᆡ}}예종요로온의ᄅᆞᆯ쳑{{분주|주어거|두다말}}ᄒᆞ야자면에쓰노라{{옛한글쪽 끝}} {{옛한글쪽 시작}}三{{더더작게|삼}}綱{{더더작게|강}}五{{더더작게|오}}倫{{더더작게|륜}}諺{{더더작게|언}}解{{더더작게|ᄒᆡ}}童{{더더작게|동}}蒙{{더더작게|몽}}先{{더더작게|션}}習{{더더작게|습}}終{{더더작게|종}}{{옛한글쪽 끝}} </big><noinclude><references/></noinclude> 0z3jqk9csgi5lu7mg84n534y3169erv 페이지:이육사 (1941) 중국문학 오십년사.pdf/5 250 93870 345343 345204 2024-11-20T00:55:29Z ZornsLemon 15531 34534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하나.……증문정공(曾文正公)(국번(國藩))만은 웅직(雄直)한 기풍(氣風)과 굉통(宏通)한 식견(識見)으로써 문장(文章)에 발로(發露)함이 고금(古今)에 관절(冠絶)한 것이라.…… 배우는 사람들이 기로(岐路)에서 나갈 바를 모를때 궤도(軌道)를 바르켜 따르게 하였으니 요씨(姚氏)를 내놓고는 그 법(法)을 매씨(梅氏)와 증씨(曾氏)에 취(取)하면 족(足)하니라. 『요씨(姚氏)를 내놓고는 그 법(法)을 매씨(梅氏)와 증씨(曾氏)에 취(取)하면 족(足)하니라』한 이것이 증국번(曾國藩) 사후(死後)의 구문가(古文家)들의 전법(傳法)하는 첩경(捷徑)이니만치 우리들이 이 이상(以上) 그들의 문장(文章)을 끄러다가 편폭(篇幅)을 채울 것이 없이 이에 증국번(曾國藩)의 구양생문집서(歐陽生文集序)를 들면 이 서문(序文)이야말로 동성파(桐城派)의 연원부파(淵源傅播)가 쓰여진겐만큼 문학사적(文學史的)으로도 매우 가치(價値)가 있는 것이다. 건륭말년(乾隆末年)에 동성(桐城)에 요희전(姚姬傳)(내(鼐)) 선생(先生)이 고문사(古文辭)를 가장 잘하였는데 그 향중(鄕中) 선배(先輩)인 방망계시랑(方望溪侍郞)(시랑(侍郞)은 직함(職啣) 역자(譯者))의 하든 바를 받고 유군대괴(劉君大櫆)와 그의 백부(伯父) 편수(編修)(편수(編修)는 직함(職啣) 역자(譯者))군(君) 범(範)에게 법(法)을 나렸는데 이 3자(三者)가 모다 사도(斯道)에 명망(名望)이 높였으되 요선생(姚先生)이 가장 수법(手法)이 정어(精禦)하였으므로 역성(歷城)의 주영년(周永年)(서창(書昌))이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문장(文章)이 그 동성(桐城)에 있을진저』라고 해서 이로부터 학자(學者)들이 동성(桐城)에 귀향(歸響)하는 자(者) 많었으니 동성파(桐城派)라고 부르기는 마치 전세(前世)에 강서시파(江西詩派)라고 일커른 것과 같으니라. 요선생(姚先生)이 만년(晚年) 종산서원(鍾山書院)에서 강석(講席)을 주재(主宰)하실새 그 문하(門下) 저명(著名)한 자(者)로 상원(上元)의 관동(管同)(이지(異之))과 매회량(梅會亮)(백언(伯言))과 동성(桐城)의 방동수(方東樹)(식지(植之)) 요형(姚瑩)(석포(石甫)) 등(等) 네 사람이 가장 고제제자(高第弟子)로서 제 각기(各其) 그 능(能)한 바를 교유간(交友間)에 전수(傳授)해서 끄치지 않었고 동성(桐城)에는 대균형존장(戴鈞衡存莊)이 있어 식지(植之)를 사사(師事)하기 오래 하였었고 매우 정력(精力)이 절인(絶人)하여 스스로 그 고을 선배(先輩)의 규모(規模)를 직혔을 뿐아니라 후진(後進)을 계발(啓發)해서 그 의기(義氣)가 비길데 없었으며 직접(直接) 그 제자(弟子)의 열(列)에 서지는 않어도 그 기풍(氣風)에 감복(感服)한 이로는 신성(新城)의 노사기(魯仕驥)(혈비(絜非))와 의흥(宜興)의 오덕선(吳德旋)(중륜(仲倫))과 혈비(絜非)의 생질(甥侄) 진용광(陳用光)(석사(碩士)) 등(等)이 있었는데 석사(碩士)만은 그 외숙(外叔)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직접(直接) 요선생(姚先生)의 문하(門下)에 수업(受業)을 해서 향인(鄕人)이 모다 감화(感化)되었을 뿐아니라 문장(文章)도 매우 빛나니라. 석사(碩士)의 군(群) 종형제(從兄弟) 중(中)에는 진학수(陳學受)(예숙(藝叔))와 진부(陳溥)(광부(廣敷))가 있었고 남풍(南豐)에는 오가빈(吳嘉賓)(자서(子序))이 있어 모다 혈비(絜非)의 풍(風)을 받고 요선생(姚先生)을 사숙(私淑)하였기에 이때부터 강서(江西)영창(永昌)에도 동성학(桐城學)이란 게 생겼는데 중륜(仲倫)이 영복(永福)의 려황(呂璜)(월창(月滄))과 더부러 교우(交友)이었고 월창(月滄)이 임계(臨桂)의 주기(朱琦)(백한(伯韓))와 용계서(龍啓瑞)(한신(翰臣))와 마평(馬平)의 왕증(王拯)(정포(定甫))과 함께 오씨(吳氏)와, 려씨(呂氏)를 가까히 하면서 더욱 그 기법(技法)을 매백언(梅伯言)에게 추구(追求)하였으므로 이때에는 동성종파(桐城宗派)가 광서(廣西)에도<noinclude><references/></noinclude> f5ybq2aph2zgbx45j4ku6exx1ry0i2g 페이지:지킬과 하이드 (1920)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역.pdf/13 250 93907 345338 2024-11-19T14:17:24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닷쳣고 ᄭᆡ긋은 ᄒᆞᆫ모양입니다 그리고 밥ᄒᆞᄂᆞᆫ 굴독도 잇ᄂᆞᆫ것을보니 사ᄅᆞᆷ은 사ᄂᆞᆫ것 ᄀᆞᆺᄒᆡ요 그러나 그것도 분명치 안이ᄒᆞᆫ것이 집들이 너무 ᄲᆡᆨᄲᆡᆨ하게 ᄒᆞᆫ데 붓허 잇스니간 어나것이 시작이며 어나것이 ᄭᅩᆺ친지 알수 잇슴닛가』 둘은 아모말업시 ᄒᆞᆫ참 건이다가 변호ᄉᆞ가 갑작이 「{{u|안필드}}, 죠흔 작뎡이... 34533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닷쳣고 ᄭᆡ긋은 ᄒᆞᆫ모양입니다 그리고 밥ᄒᆞᄂᆞᆫ 굴독도 잇ᄂᆞᆫ것을보니 사ᄅᆞᆷ은 사ᄂᆞᆫ것 ᄀᆞᆺᄒᆡ요 그러나 그것도 분명치 안이ᄒᆞᆫ것이 집들이 너무 ᄲᆡᆨᄲᆡᆨ하게 ᄒᆞᆫ데 붓허 잇스니간 어나것이 시작이며 어나것이 ᄭᅩᆺ친지 알수 잇슴닛가』 둘은 아모말업시 ᄒᆞᆫ참 건이다가 변호ᄉᆞ가 갑작이 「{{u|안필드}}, 죠흔 작뎡이오』 ᄒᆞ며 앗가 ᄒᆞ든말을 겁푸ᄒᆞ엿다. 『나도 그런줄 암니다』 ᄒᆞ며 {{u|안필드}}는 ᄉᆡᆼ각업시 ᄃᆡ답ᄒᆡᆺ다. 『그것은 엇더케 되얏던지 ᄒᆞᆫ가지만 더 뭇ᄀᆡᆺ소, 그 ᄋᆞ희를 ᄇᆞᆲ은ᄌᆞ의 성명이 무엇이요』 『그것은 말ᄒᆡ도 샹관은 업소, {{u|하이드}}라고 ᄒᆞᆸ듸다』 『응응……… 보기에 엇던 사ᄅᆞᆷ입듸가』 『형용ᄒᆡ서 말ᄒᆞᆯ수가 업서요, 그ᄭᅩᆯ을 보니 무슨 일이 잇섯든 놈입듸다, 보기가 실코 미워요, 내 평ᄉᆡᆼ에 그러케 사ᄅᆞᆷ을 밉게 본젹이 업섯슴니다 그러나 그 ᄭᆞ닭도 모르고요. 분명 그쟈가 병신인듯ᄒᆡ요, 그러나 어ᄃᆡ가 병<noinclude><references/></noinclude> ilgqu4pcobt6p52kd6rnh0ze7a1p0ih 페이지:지킬과 하이드 (1920)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역.pdf/14 250 93908 345339 2024-11-19T14:24:20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신이라고 지뎡은 못ᄒᆞᄀᆡᆺ슴니다만은. 하여간 별ᄒᆞᆫ 놈이야요, 도모지 일홈을지을수가 업서요, 이것이 내가 긔억력이 부족ᄒᆡ서 그런것이 안이라……당쟝 눈에 환ᄒᆞᆷ니다』 변호ᄉᆞ는 ᄯᅩ 아모 말업시 건이면서. 깁히 ᄉᆡᆼ각 ᄒᆞᄂᆞᆫ 모양이다. 『그놈이 ᄭᅩᆨ열쇠는 가졋습듸가』 ᄒᆞ며 변호ᄉᆞ가 무럿다. {{u|안필드}}는 조곰 놀라면서... 34533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신이라고 지뎡은 못ᄒᆞᄀᆡᆺ슴니다만은. 하여간 별ᄒᆞᆫ 놈이야요, 도모지 일홈을지을수가 업서요, 이것이 내가 긔억력이 부족ᄒᆡ서 그런것이 안이라……당쟝 눈에 환ᄒᆞᆷ니다』 변호ᄉᆞ는 ᄯᅩ 아모 말업시 건이면서. 깁히 ᄉᆡᆼ각 ᄒᆞᄂᆞᆫ 모양이다. 『그놈이 ᄭᅩᆨ열쇠는 가졋습듸가』 ᄒᆞ며 변호ᄉᆞ가 무럿다. {{u|안필드}}는 조곰 놀라면서 『녜』 ᄒᆞ고 ᄃᆡ답ᄒᆡᆺ다. 변호사는 『알겟소, 조곰 이러케 뭇ᄂᆞᆫ것을 이샹ᄒᆞ게 아시리다만은 바른말노 ᄒᆞᄌᆞ면 그 명망잇는신ᄉᆞ의 일홈은 벌서 아ᄂᆞᆫ고로 뭇지 안이ᄒᆞ여요, 그러나 여보시요, 이야기를 다 맛쳣스니간 만일 분명치 못ᄒᆞᆫ 말이 잇스면 다시 곳치시요』 {{u|안필드}}는 조곰 죠치못ᄒᆞᆫ 긔ᄉᆡᆨ으로 『당신이 나를 일ᄭᆡ워 주시ᄂᆞᆫ줄 암니다만은 지금 이야기ᄂᆞᆫ ᄒᆞᆫ아도 틀님이<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uersqp7j0m6w1iqlpyv40yzuijd8x7 페이지:지킬과 하이드 (1920)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역.pdf/15 250 93909 345340 2024-11-19T14:31:15Z ZornsLemon 15531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업서요, 분명히 그놈이 열쇠를 가졋고 지금ᄭᆞ지라도 가졋서요, ᄒᆞᆫ 주일젼에 그 열쇠 쓰ᄂᆞᆫ것을 보앗소』 ᄒᆞ며 ᄃᆡ답ᄒᆡᆺ다. 변호ᄉᆞ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나 말은 업섯다. {{u|안필드}}는 『이것이 이야기 ᄒᆞᆯ필요가 업다는 교휸이외다, 내가 너무 길게 짓거려서 미안ᄒᆞᆷ니다, 다시는 이문뎨에 입도 버리지 맙시다』 ᄒᆞ며 말ᄒᆡᆺ... 34534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업서요, 분명히 그놈이 열쇠를 가졋고 지금ᄭᆞ지라도 가졋서요, ᄒᆞᆫ 주일젼에 그 열쇠 쓰ᄂᆞᆫ것을 보앗소』 ᄒᆞ며 ᄃᆡ답ᄒᆡᆺ다. 변호ᄉᆞ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나 말은 업섯다. {{u|안필드}}는 『이것이 이야기 ᄒᆞᆯ필요가 업다는 교휸이외다, 내가 너무 길게 짓거려서 미안ᄒᆞᆷ니다, 다시는 이문뎨에 입도 버리지 맙시다』 ᄒᆞ며 말ᄒᆡᆺ다. 『나도 그리ᄒᆞᄀᆡᆺ소, 찬성이요』 ᄒᆞ며 변호ᄉᆞ가 말ᄒᆡᆺ다. ::::{{크게|{{u|하이드}}는 누군가?}} 변호ᄉᆞ {{u|엇드손}}은 그날 저녁에 쳐량ᄒᆞᆫ 긔ᄉᆡᆨ으로 집에 도라와 아모 입맛이 업시 저녁을 들엇다, 그는 주일져 녁 마다 식ᄉᆞ를 맛치고 난로갓가히 안져 열두시 ᄭᆞ지죵교에 관ᄒᆞᆫ 셔적을 본후에 취침ᄒᆞᄂᆞᆫ 법이다, 그러나 이 밤은 식ᄉᆞ를 맛치ᄌᆞ 촉불을 켜들고 ᄉᆞ무실에 드러가 금고를 열고 여러 즁요ᄒᆞᆫ 서류 가온ᄃᆡ {{u|ᄶᅦ클}} 박ᄉᆞ의 유언쟝 이라 쓴 봉투를 ᄭᅥᄂᆡ더니 눈살을<noinclude><references/></noinclude> ooizi2tfkeyer85ofsej0jpfa46h39n 345341 345340 2024-11-19T14:32:07Z ZornsLemon 15531 345341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ZornsLemon" /></noinclude>업서요, 분명히 그놈이 열쇠를 가졋고 지금ᄭᆞ지라도 가졋서요, ᄒᆞᆫ 주일젼에 그 열쇠 쓰ᄂᆞᆫ것을 보앗소』 ᄒᆞ며 ᄃᆡ답ᄒᆡᆺ다. 변호ᄉᆞ는 다시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나 말은 업섯다. {{u|안필드}}는 『이것이 이야기 ᄒᆞᆯ필요가 업다는 교휸이외다, 내가 너무 길게 짓거려서 미안ᄒᆞᆷ니다, 다시는 이문뎨에 입도 버리지 맙시다』 ᄒᆞ며 말ᄒᆡᆺ다. 『나도 그리ᄒᆞᄀᆡᆺ소, 찬성이요』 ᄒᆞ며 변호ᄉᆞ가 말ᄒᆡᆺ다. ::{{크게|{{u|하이드}}는 누군가?}} 변호ᄉᆞ {{u|엇드손}}은 그날 저녁에 쳐량ᄒᆞᆫ 긔ᄉᆡᆨ으로 집에 도라와 아모 입맛이 업시 저녁을 들엇다, 그는 주일져 녁 마다 식ᄉᆞ를 맛치고 난로갓가히 안져 열두시 ᄭᆞ지죵교에 관ᄒᆞᆫ 셔적을 본후에 취침ᄒᆞᄂᆞᆫ 법이다, 그러나 이 밤은 식ᄉᆞ를 맛치ᄌᆞ 촉불을 켜들고 ᄉᆞ무실에 드러가 금고를 열고 여러 즁요ᄒᆞᆫ 서류 가온ᄃᆡ {{u|ᄶᅦ클}} 박ᄉᆞ의 유언쟝 이라 쓴 봉투를 ᄭᅥᄂᆡ더니 눈살을<noinclude><references/></noinclude> fskigao0zjsef0hezacsoe2lxc32u8f 페이지: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1 250 93910 345345 2024-11-20T01:29:15Z Motoko C. K. 4287 /* 교정 안 됨 */ 새 문서: 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 345345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otoko C. K." /></noinclude>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noinclude><references/></noinclude> h3x72yfqemqtw6uj7c3zth1x3ks1fac 345348 345345 2024-11-20T01:47:44Z Motoko C. K. 4287 34534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Motoko C. K." /></noinclude><p>{{더더크게|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m7vmbqalubcl7vwnpb6dpt60d4c496c 삼강오륜언해동몽초학 0 93911 345346 2024-11-20T01:29:56Z Motoko C. K. 4287 새 문서: {{머리말 | 제목 = 삼강오륜언해동몽초학 | 다른 표기 = 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 | 부제 =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 편집자 = 강하영 | 역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 {{옛한글 시작}} <pages index="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 from=1 /> {{옛한글 끝}} 345346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삼강오륜언해동몽초학 | 다른 표기 = 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 | 부제 =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 편집자 = 강하영 | 역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 {{옛한글 시작}} <pages index="三綱五倫諺解童蒙初學.djvu" from=1 /> {{옛한글 끝}} 424slkwb8e3lxrc6g3uverw9jqzfbbl 345351 345346 2024-11-20T01:51:50Z Motoko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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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ᄀᆡᄒᆞ고 복음을 밋으라○ {{verse||十五}}{{du|갈닐늬}} ᄒᆡ변에 ᄒᆡᆼᄒᆞ시다가 {{u|시몬}}이 그 동ᄉᆡᆼ {{u|안드레}}로 더브러 그믈을 바다에 던짐을 보시니 뎌희는 어부라 {{verse||十六}}예수ㅣ ᄀᆞᆯ아샤ᄃᆞㅣ 나를 ㅅᄃᆞ라오너라 내가 너희들노 사ᄅᆞᆷ을ㄹ 낙ᄂᆞᆫ 어부가 되게 ᄒᆞ리라 ᄒᆞ시니 {{verse||十七}}곳 그믈을 ᄇᆞ리고 좃치니라 {{verse||十八}}조곰 더 가시다가 {{u|세베대}}의 아ᄃᆞᆯ {{u|야고보}}와 그 동ᄉᆡᆼ {{u|요한}}을 보시니 뎌희도 ᄇᆞㅣ에 잇서 그믈을 깁ᄂᆞᆫᄃᆞㅣ {{verse||十九}}곳 부르시거늘 그 아비 {{u|세베대}}와 삭군들을 ᄇᆞㅣ에 두고 예수를 좃치니라○ {{verse||二十}}뎌희가 {{u|가버나움}}에 드러가니 안식엘 예수ㅅ긔셔 회당에 드러가샤 ᄀᆞᆯᄅᆞ치시매 {{verse||二一}}뭇사ᄅᆞᆷ이 그 ᄀᆞᄅᆞ치심을 이샹히녁임은 그 ᄀᆞᄅᆞ치ᄂᆞᆫ 거시 권셰 잇ᄂᆞᆫ쟈와 ᄀᆞᆺ고 서긔관과 ᄀᆞᆺ지 아니ᄒᆞᆷ일너라 {{verse||二二}}맛ᄎᆞᆷ 회당에셔<noinclude><references/></noinclude> mjhcng81abo4rwnqhckeluy4ryvdn5y 페이지:셩경젼셔 신약.pdf/103 250 93915 345387 2024-11-20T08:59:18Z Ellif 104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더러온 귀신 들닌 사ᄅᆞᆷ이 잇서 소ᄅᆡ 질너 {{verse||二四}}ᄀᆞᆯᄋᆞᄃᆡ {{du|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너로 더브러 무ᄉᆞᆷ 샹관이 잇ᄂᆞ뇨 우리를 멸ᄒᆞ러 왓ᄂᆞ뇨 나는 네가 누구인줄을 아노니 이에 하ᄂᆞ님의 거륵ᄒᆞᆫ쟈니라 ᄒᆞ거늘 {{verse||二五}}예수ㅣ ᄭᅮ지져 ᄀᆞᆯᄋᆞ샤ᄃᆡ 입을 봉ᄒᆞ고 그 사ᄅᆞᆷ의게셔 나오너라 ᄒᆞ시니 {{verse||二六}... 34538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El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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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T09:25:48Z Ellif 1043 /* 교정 안 됨 */ 새 문서: 를 ᄯᆞ라가 {{verse||三七}}맛나셔 ᄀᆞᆯᄋᆞᄃᆡ 모든 사ᄅᆞᆷ이 쥬를 찻ᄂᆞ이다 ᄒᆞ니 {{verse||三八}}닐ᄋᆞ샤ᄃᆡ 우리가 달른 갓가온 마을에 가자 거긔셔도 도를 젼파ᄒᆞ리니 내가 오기는 이를 위ᄒᆞᆷ이로다 {{verse||三九}}이에 온 {{du|갈닐니}}에 ᄃᆞᆫ니시며 그 회당에 드러가샤 도를 젼파ᄒᆞ시고 ᄯᅩ 샤귀를 내여ᄶᅩᆽ치시더라○ {{verse||四十}}문동병... 34538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Ellif" /></noinclude>를 ᄯᆞ라가 {{verse||三七}}맛나셔 ᄀᆞᆯᄋᆞᄃᆡ 모든 사ᄅᆞᆷ이 쥬를 찻ᄂᆞ이다 ᄒᆞ니 {{verse||三八}}닐ᄋᆞ샤ᄃᆡ 우리가 달른 갓가온 마을에 가자 거긔셔도 도를 젼파ᄒᆞ리니 내가 오기는 이를 위ᄒᆞᆷ이로다 {{verse||三九}}이에 온 {{du|갈닐니}}에 ᄃᆞᆫ니시며 그 회당에 드러가샤 도를 젼파ᄒᆞ시고 ᄯᅩ 샤귀를 내여ᄶᅩᆽ치시더라○ {{verse||四十}}문동병 든쟈가 예수ᄭᅴ 나아와 ᄭᅮᆯ어 업ᄃᆡ여 ᄀᆞᆫ구ᄒᆞ야 ᄀᆞᆯᄋᆞᄃᆡ 쥬ᄭᅴ셔 만일 ᄒᆞ고져ᄒᆞ시면 능히 저를 ᄭᆡᆨ긋ᄒᆞ게 ᄒᆞ시리이다 ᄒᆞ거늘 {{verse||四一}}예수ㅣ 민망히녁이샤 손을 펴서 ᄆᆞᆫ지시며 ᄀᆞᆯᄋᆞ샤ᄃᆡ 내가 ᄒᆞ고져ᄒᆞ노니 ᄭᆡᆨ긋ᄒᆞᆷ을 밧으라 ᄒᆞ신ᄃᆡ {{verse||四二}}곳 문동병이 ᄯᅥ나가고 그 사ᄅᆞᆷ이 ᄭᆡᆨ긋ᄒᆞᆫ지라 {{verse||四三}}엄히 경계ᄒᆞ샤 곳 보내시며 {{verse||四四}}ᄀᆞᆯᄋᆞ샤ᄃᆡ 삼가 아모 사ᄅᆞᆷ의 게도 나가 말ᄒᆞ지말고 다만 나가셔 졔ᄉᆞ쟝의게 네 몸을 보이고 ᄭᆡᆨ긋ᄒᆞᆷ을 인ᄒᆞ야 {{u|모세}}의 명한 례물을 드려 뭇 사람의게 증거ᄒᆞ라 ᄒᆞ셧더니 {{verse||四五}}그러나 그 사ᄅᆞᆷ이 나가 만히 젼파ᄒᆞ야 널니 퍼지게 ᄒᆞ니 그럼으로 예수ㅣ 완연히 셩에 드러가지못ᄒᆞ시고 밧겻 황무디에 거쳐ᄒᆞ시나 ᄉᆞ방에셔 예수ᄭᅴ로 나아 오더라 == 이쟝 == {{verse|二|一}}수일을 지나 에수ㅣ 다시 {{du|가버나움}}에 드러가 집에 계신 소문이 들니매 {{verse||二}}사ᄅᆞᆷ이 만히 모혀들어 아모 용신ᄒᆞᆯ 틈이 업고 문압이라도 용신ᄒᆞᆯ수가 더욱 없ᄂᆞᆫᄃᆡ 예수ㅣ 뎌희게 도를 말ᄉᆞᆷᄒᆞ시더니 {{verse||三}}반신불슈 병든 사ᄅᆞᆷ ᄒᆞ나<noinclude><references/></noinclude> itq0hmpj0rlm6g4c2plb0hlhz0x5h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