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문헌 kowikisource https://ko.wikisource.org/wiki/%EC%9C%84%ED%82%A4%EB%AC%B8%ED%97%8C:%EB%8C%80%EB%AC%B8 MediaWiki 1.44.0-wmf.8 first-letter 미디어 특수 토론 사용자 사용자토론 위키문헌 위키문헌토론 파일 파일토론 미디어위키 미디어위키토론 틀토론 도움말 도움말토론 분류 분류토론 저자 저자토론 포털 포털토론 번역 번역토론 페이지 페이지토론 색인 색인토론 TimedText TimedText talk 모듈 모듈토론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문헌목록 4 84433 347566 345659 2024-12-20T08:29:21Z Motoko (WMKR) 14454 /* 완성된 문헌 */ 347566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 완성된 문헌 == {| class="wikitable" ! 색인 !! 위키문헌 문서 !! 후처리 |- |[[색인:(正本)集註周易.djvu]]||[[집주주역]] || {{완료}} |- |[[색인:東國歷史 제2책.djvu]]||[[동국역사]] || {{완료}} |- |[[색인:詩經諺解 제1책.djvu]]||[[시경언해/제1책]] || {{완료}} |- |[[색인:論語諺解 권3.djvu]]||[[논어언해/권3]] || {{완료}} |- |[[색인:論語諺解 권4.djvu]]||[[논어언해/권4]] || |- |[[색인:쥬역언해 제2책.djvu]]||[[주역언해/제2책]] || {{완료}} |- |[[색인:안졋슨사적.djvu]]||[[안졋슨사적]] || {{완료}} |- |[[색인:셔사건국지.djvu]]||[[서사건국지]] || {{완료}} |- |[[색인:화산최씨내훈.djvu]]||[[화산최씨내훈]] || {{완료}} |- |[[색인:신찬가정학.djvu]]||[[신찬가정학]] || {{완료}} |- |[[색인:이언 권2.djvu]]||[[이언/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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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및 '''<nowiki>{{옛한글쪽 끝}}</nowiki>''' 틀은 기여산정시 유효한 바이트로 계산됩니다. * "미리 보기"를 클릭하시어 입력 상태를 확인하시고 "문서 게시"를 클릭하여 저장해 주세요. {{clear}} rh20d9hj2xkiohpzw4jfbk1uejmxdbm 347576 347575 2024-12-20T09:11:24Z Motoko (WMKR) 14454 347576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옛한글 지원 폰트 설치 == * 1단계: 나눔 옛한글 폰트 파일 다운로드 ([https://hangeul.naver.com/2014/archaicword 링크]) * 2단계: 컴퓨터에 설치 ([https://support.microsoft.com/ko-kr/office/글꼴-추가-b7c5f17c-4426-4b53-967f-455339c564c1 윈도우], [https://support.apple.com/ko-kr/guide/font-book/fntbk1000/mac 맥]) ==옛한글 입력 방법== === 웹 입력기 === * [https://ohi.pat.im/?ko=2-KSX5002&y=1 온라인 한글 입력기] === 날개셋 입력기 === * [http://moogi.new21.org/prg4.html 날개셋 한글 입력기 설치] [[파일:2023하반기 옛한글 OT - 5B2 날개셋한글입력기 설치.webm|섬네일|왼쪽|날개셋 한글 입력기 설치 및 설정]] {{clear}} ==반복 부호 == ;〻 한글 반복부호 ;々 한자 반복부호 {{clear}} ==주의 사항== * 옛한글 깨짐 현상 방지를 위해 모든 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모든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뒤에 '''<nowiki>{{옛한글쪽 끝}}</nowiki>'''을 입력합니다. ** 모든 문자가 한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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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이르러야(격)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섭하손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정문진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학자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극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bhqy4uzdzp7s3zhsurjswu9cb5e3lcw 347541 347540 2024-12-19T12:26:09Z Thomas Dongsob Ahn 16640 60까지 작업중 347541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이르러야(격)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섭하손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정문진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학자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에 접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知)는 어떻게 이루어지며, 물(物)은 어떻게 격물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갓난아이는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자라면서 형을 공경할 줄 안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식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것은 인욕(人欲)이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지식을 이루어야 하며, 그러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약간의 밝은 곳을 보고, 그 밝은 곳을 따라 나가면 갑자기 밖에 나와 크고 큰 밝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지식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일과 사물에는 각각 지극한 곳이 있습니다. 이른바 '멈춘다'는 것은 곧 지극한 곳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극진히 다하여야 비로소 멈출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여덟 부분을 얻고 두 부분이 남아 다하지 못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극진히 다하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지식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습니다."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극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황거사(黃去私)가 치지와 격물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내는 의미가 있으며, 전대의 학자들은 '치'라는 글자를 많이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누가 지식이 없겠습니까? 자식으로서 효를 알고, 부모로서 자비를 압니다. 단지 지식이 다하지 못하니, 반드시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의 빛도 빛이라 할 수 있지만, 점점 열어 크게 하면 그 빛이 더욱 커집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도 그 이치를 압니다. 자비와 효도 같은 것들은 단지 격물이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에서 격물하면, 지식이 여기서 다합니다." 또 말했습니다: "이치를 다 알면, 그 의지가 곧 참됨이 됩니다. 만약 아직 통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이 안이 어두워집니다."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유기부(劉圻父)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그가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두 본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곽숙운(郭叔雲)이 물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만, 기질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격물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밀고 나가서 이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31if194x2ci3hhg4l8vw5jpkowcdyc7 347547 347541 2024-12-20T06:02:06Z Thomas Dongsob Ahn 16640 347547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갓난아이는 부모를 사랑할 줄 알고, 자라면서 형을 공경할 줄 안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식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것은 인욕(人欲)이 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학자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지식을 이루어야 하며, 그러면 알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어두운 방에서 약간의 밝은 곳을 보고, 그 밝은 곳을 따라 나가면 갑자기 밖에 나와 크고 큰 밝음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지식을 이루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 인(仁)에 멈추고, 신하가 되어 경(敬)에 멈춘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일과 사물에는 각각 지극한 곳이 있습니다. 이른바 '멈춘다'는 것은 곧 지극한 곳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극진히 다하여야 비로소 멈출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 여덟 부분을 얻고 두 부분이 남아 다하지 못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극진히 다하여야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말했습니다: "지식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습니다."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극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황거사(黃去私)가 치지와 격물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내는 의미가 있으며, 전대의 학자들은 '치'라는 글자를 많이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누가 지식이 없겠습니까? 자식으로서 효를 알고, 부모로서 자비를 압니다. 단지 지식이 다하지 못하니, 반드시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의 빛도 빛이라 할 수 있지만, 점점 열어 크게 하면 그 빛이 더욱 커집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도 그 이치를 압니다. 자비와 효도 같은 것들은 단지 격물이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에서 격물하면, 지식이 여기서 다합니다." 또 말했습니다: "이치를 다 알면, 그 의지가 곧 참됨이 됩니다. 만약 아직 통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이 안이 어두워집니다."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유기부(劉圻父)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그가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두 본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곽숙운(郭叔雲)이 물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만, 기질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격물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밀고 나가서 이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h1t40b32i5ocje9xadof5i4aygvy05k 347559 347547 2024-12-20T06:59:58Z Thomas Dongsob Ahn 16640 46 347559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대답: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직전 조목 참조.</ref>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욕(人欲)이 그 앎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앎을 지극히해야 하니, 그렇게하면 밝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젖히는(推開)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암실에서 미약한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을 따라 나가다 보면 홀연히 암실 밖으로 나와서 이토록(大小) 큰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앎을 지극히하는 것도 이와 같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같은 것이다.<ref>임금과 신하가 '물'이고 인과 경이 그 물에 내재한 도리이다. 사사물물에서 그것에 내재한 도리를 찾는 것이 격물이다.</ref> 사태와 사물마다 각각 지극한 지점이 있다. 이른바 '멈춘다(止)'는 것은 바로 그 지극한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 비로소 멈춰도 되는 곳이 된다. 만약 80%는 되었는데 20%가 미진하다면, 그건 (멈출 지점이) 아니다. 반드시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만 한다.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다시 대답: 앎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극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황거사(黃去私)가 치지와 격물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내는 의미가 있으며, 전대의 학자들은 '치'라는 글자를 많이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사람이 누가 지식이 없겠습니까? 자식으로서 효를 알고, 부모로서 자비를 압니다. 단지 지식이 다하지 못하니, 반드시 완전히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의 빛도 빛이라 할 수 있지만, 점점 열어 크게 하면 그 빛이 더욱 커집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도 그 이치를 압니다. 자비와 효도 같은 것들은 단지 격물이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에서 격물하면, 지식이 여기서 다합니다." 또 말했습니다: "이치를 다 알면, 그 의지가 곧 참됨이 됩니다. 만약 아직 통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이 안이 어두워집니다."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유기부(劉圻父)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그가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두 본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곽숙운(郭叔雲)이 물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만, 기질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격물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밀고 나가서 이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gd4nosdfqjpejb3fc38q2wtx9w49nbd 347560 347559 2024-12-20T07:27:22Z Thomas Dongsob Ahn 16640 47 347560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대답: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직전 조목 참조.</ref>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욕(人欲)이 그 앎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앎을 지극히해야 하니, 그렇게하면 밝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젖히는(推開)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암실에서 미약한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을 따라 나가다 보면 홀연히 암실 밖으로 나와서 이토록(大小) 큰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앎을 지극히하는 것도 이와 같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같은 것이다.<ref>임금과 신하가 '물'이고 인과 경이 그 물에 내재한 도리이다. 사사물물에서 그것에 내재한 도리를 찾는 것이 격물이다. 14:104 참조.</ref> 사태와 사물마다 각각 지극한 지점이 있다. 이른바 '멈춘다(止)'는 것은 바로 그 지극한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 비로소 멈춰도 되는 곳이 된다. 만약 80%는 되었는데 20%가 미진하다면, 그건 (멈출 지점이) 아니다. 반드시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만 한다.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다시 대답: 앎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의 형 황의용(黃義勇).</ref>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대답: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낸다(推出)는 뜻이 있다. 선배 학자들은 '치'자를 많이들 이런 의미로 썼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앎이 없겠나?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할 줄 알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할 줄 안다. 단지 이 앎이 미진할 뿐이니 반드시 투철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도 빛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벼파서(開剗)<ref>개잔(開剗)은 작은 구멍을 날카로운 물건으로 깎고 파내어 크게 만드는 것이다.</ref> 점점 크게 만들면 그 빛은 더욱 커질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들도 그 이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자애하고 효도한다는 등이 그것이다. 단지 탐구(格)가 미진할 뿐이다. 그저 저쪽에서 사물을 깊이 탐구하기만 하면 앎은 이쪽에서 남김없이 완전해지게 된다.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다시 대답: 이 이치를 완전히 다 알게 되면 이 의지(意)가 진실하게 된다. 만약 앎에 아직 철저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이 안쪽이<ref>의지(意)를 말한다.</ref> 캄캄해져버린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유기부(劉圻父)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습니다. 주자가 말했습니다: "그가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두 본래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만, 다른 것에 의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아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곽숙운(郭叔雲)이 물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만, 기질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격물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밀고 나가서 이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pavf5z0ug6gy2fp4uyv1kpculb4q3b1 347564 347560 2024-12-20T08:26:32Z Thomas Dongsob Ahn 16640 48 347564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대답: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직전 조목 참조.</ref>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욕(人欲)이 그 앎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앎을 지극히해야 하니, 그렇게하면 밝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젖히는(推開)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암실에서 미약한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을 따라 나가다 보면 홀연히 암실 밖으로 나와서 이토록(大小) 큰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앎을 지극히하는 것도 이와 같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같은 것이다.<ref>임금과 신하가 '물'이고 인과 경이 그 물에 내재한 도리이다. 사사물물에서 그것에 내재한 도리를 찾는 것이 격물이다. 14:104 참조.</ref> 사태와 사물마다 각각 지극한 지점이 있다. 이른바 '멈춘다(止)'는 것은 바로 그 지극한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 비로소 멈춰도 되는 곳이 된다. 만약 80%는 되었는데 20%가 미진하다면, 그건 (멈출 지점이) 아니다. 반드시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만 한다.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다시 대답: 앎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의 형 황의용(黃義勇).</ref>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대답: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낸다(推出)는 뜻이 있다. 선배 학자들은 '치'자를 많이들 이런 의미로 썼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앎이 없겠나?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할 줄 알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할 줄 안다. 단지 이 앎이 미진할 뿐이니 반드시 투철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도 빛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벼파서(開剗)<ref>개잔(開剗)은 작은 구멍을 날카로운 물건으로 깎고 파내어 크게 만드는 것이다.</ref> 점점 크게 만들면 그 빛은 더욱 커질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들도 그 이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자애하고 효도한다는 등이 그것이다. 단지 탐구(格)가 미진할 뿐이다. 그저 저쪽에서 사물을 깊이 탐구하기만 하면 앎은 이쪽에서 남김없이 완전해지게 된다.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다시 대답: 이 이치를 완전히 다 알게 되면 이 의지(意)가 진실하게 된다. 만약 앎에 아직 철저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이 안쪽이<ref>의지(意)를 말한다.</ref> 캄캄해져버린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유기부(劉圻父)<ref>이름은 자환(自寰)이다.</ref>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다.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대답: 대학에서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든 것이 본래 자신의 소유이지만 외물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곽숙운(郭叔雲)이 물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만, 기질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격물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식이 있습니다. 모두가 지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밀고 나가서 이를 이루지 못할 뿐입니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murvwoydc60y67pjfj4s18mid3oua9j 347565 347564 2024-12-20T08:29:05Z Thomas Dongsob Ahn 16640 49작업중 347565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대답: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직전 조목 참조.</ref>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욕(人欲)이 그 앎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앎을 지극히해야 하니, 그렇게하면 밝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젖히는(推開)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암실에서 미약한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을 따라 나가다 보면 홀연히 암실 밖으로 나와서 이토록(大小) 큰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앎을 지극히하는 것도 이와 같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같은 것이다.<ref>임금과 신하가 '물'이고 인과 경이 그 물에 내재한 도리이다. 사사물물에서 그것에 내재한 도리를 찾는 것이 격물이다. 14:104 참조.</ref> 사태와 사물마다 각각 지극한 지점이 있다. 이른바 '멈춘다(止)'는 것은 바로 그 지극한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 비로소 멈춰도 되는 곳이 된다. 만약 80%는 되었는데 20%가 미진하다면, 그건 (멈출 지점이) 아니다. 반드시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만 한다.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다시 대답: 앎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의 형 황의용(黃義勇).</ref>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대답: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낸다(推出)는 뜻이 있다. 선배 학자들은 '치'자를 많이들 이런 의미로 썼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앎이 없겠나?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할 줄 알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할 줄 안다. 단지 이 앎이 미진할 뿐이니 반드시 투철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도 빛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벼파서(開剗)<ref>개잔(開剗)은 작은 구멍을 날카로운 물건으로 깎고 파내어 크게 만드는 것이다.</ref> 점점 크게 만들면 그 빛은 더욱 커질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들도 그 이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자애하고 효도한다는 등이 그것이다. 단지 탐구(格)가 미진할 뿐이다. 그저 저쪽에서 사물을 깊이 탐구하기만 하면 앎은 이쪽에서 남김없이 완전해지게 된다.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다시 대답: 이 이치를 완전히 다 알게 되면 이 의지(意)가 진실하게 된다. 만약 앎에 아직 철저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이 안쪽이<ref>의지(意)를 말한다.</ref> 캄캄해져버린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유기부(劉圻父)<ref>이름은 자환(自寰)이다.</ref>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다.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대답: 대학에서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든 것이 본래 자신의 소유이지만 외물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곽숙운(郭叔雲)의 질문: 배움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사물마다 이치를 가지고 있지만 (저의) 기질(氣稟)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탐구해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대답: 사람은 누구나 앎을 가지고 있다. 설마하니 다들 아무것도 모르겠는가? 단지 밀고 나가서 앎을 지극히하지 못할 뿐이다. 격물은 이치를 철저한 지점까지 탐구하는 것이다.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또 말했습니다: "치지와 격물은 단지 하나의 일이며,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격물은 이치로 말하는 것이고, 치지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i21n1beh2530ak0jcr2q7de5sq1856o 347567 347565 2024-12-20T08:32:03Z Thomas Dongsob Ahn 16640 49 347567 wikitext text/x-wiki 朱子語類卷第十五 * *   大學二 '''대학(2) *   經下 '''경(하) *  15:1 器遠問: “致知者, 推致事物之理. 還當就甚麽樣事推致其理?” '''기원의 질문: 앎을 지극히 함(致知)이란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극치까지 추구하는 것입니다. 응당 어떤 사건의 이치를 지극히 해야 합니까? 曰: “眼前凡所應接底都是物. 事事都有箇極至之理, 便要知得到. 若知不到, 便都沒分明; 若知得到, 便著定<ref>이 부분은 주자어류휘교의 교감을 따라 便決定著로 해석하였다</ref>恁地做, 更無第二著·第三著. 止緣人見道理不破, 便恁地苟簡, 且恁地做也得, 都不做得第一義.” '''대답: 눈 앞에서 응접하는 모든 것이 물(物)이다. 사사건건에 모두 지극한 이치가 하나씩 있으니 (그 이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죄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제대로 알면 반드시(決定著) 그렇게 실천하게 되니 차선책(第二著)이니 플랜C(第三著)니 하는 게 없다. 사람들은 다만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렇게 어설픈 것이다. 당장은 저런 식으로 해도 되겠지만 어떻게해도 최선의 것(第一義)은 해낼 수 없다. 曹問: “如何是第一義?” '''조(기원)의 질문: 무엇이 최선의 것(第一義)입니까? 曰: “如‘爲人君, 止於仁; 爲人臣, 止於敬; 爲人子, 止於孝’之類, 決定著恁地, 不恁地便不得. 又如在朝, 須著進君子, 退小人, 這是第一義. 有功決定著賞, 有罪決定著誅, 更無小人可用之理, 更無包含小人之理. 惟見得不破, 便道小人不可去, 也有可用之理. 這都是第二義·第三義, 如何會好! 若事事窮得盡道理, 事事占得第一義, 做甚麽剛方正大! 且如爲學, 決定是要做聖賢, 這是第一義, 便漸漸有進步處. 若便道自家做不得, 且隨分依稀做些子, 這是見不破. 所以說道: ‘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謂吾身不能者, 自賊者也.” 賀孫(62이후). '''대답: '임금은 인(仁)에 머물고 신하는 경(敬)에 머물고 자식은 효(孝)에 머문다'같은 것들은 반드시(決定著) 이와 같아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예를 들어 조정에서 봉직할 때에는 반드시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쳐야 하니 이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다. 공이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시상하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決定著) 주살해야 하니, 소인을 쓸 수 있다는 이치나 소인도 포용한다는 이치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인을 완전히 내칠 수 없다는둥 소인을 써도 되는 이치가 있다는둥 말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차선책이니 플랜C니 하는 것들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사사건건에서 도리를 완전히 밝혀내면 사사건건마다 최선의 자리를 잡을 수 있으니 무엇을 하든 강건하고 방정하고 올바르고 당당하다(剛方正大). 학문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성현이 되고자 하는 것이 최선의 것(第一義)이니 (이렇게 하면) 점점 진보가 있게 된다. 만약 자기는 그렇게는 못하니까 일단 자기 분수에 맞게 조금만(依稀) 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ref>맹자4A:2</ref>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해치는 자라는 뜻이다. 섭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卓錄云: '''<황탁의 기록> 曹兄問: "格物窮理, 須是事事物物上理會?” '''<조형의 질문: 격물궁리(格物窮理)는 사사물물 각각의 상황상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曰: “也須是如此, 但窮理上須是見得十分徹底, 窮到極處, 須是見得第一著, 方是, 不可只到第三第四著便休了. 若窮不得, 只道我未窮得到底, 只得如此, 這是自恕之言, 亦非善窮理也. 且如事君, 便須是‘進思盡忠, 退思補過’, '道合則從, 不合則去'. 也有義不可得而去者, 不可不知.” '''<대답: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궁리할 적에 반드시 십분 철저하게 하여 궁리가 지극한 데까지 이르러 최선의 것(第一著)을 알아야만 한다. 제 3책이나 제 4책 정도에 도달하고 그만두어버리면 안 된다. (제대로) 궁리하지 못할 경우, 그저 나는 아직 끝까지 궁리하지 못했다느니 이럴 수밖에 없었다느니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변명이지 궁리를 잘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는 반드시 '나아가면 충(忠)을 다할 생각을 하고 물러나면 잘못을 개선할 생각을'하고<ref>춘추좌씨전 선공 12년</ref>, '도가 맞으면 따르고 맞지 않으면 떠'나야<ref>예기 내칙</ref> 하지만 의리상 떠날 수 없는 경우도 있음을 몰라서는 안 된다.> 又云: “如‘不以舜之所以事堯事君, 賊其君者也; 不以堯之所以治民治民, 賊其民者也’, 這皆是極處.” '''<다시 대답: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방식으로 자기 임금을 섬기지 않는 자는 자기 임금을 해치는 자요,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는 자는 백성을 해치는 자이다'같은 것들은 모두 지극한 지점(極處)이다.> 以下致知.> '''<이 아래로는 치지(致知)에 관한 조목들> *  15:2 致知所以求爲眞知. 眞知, 是要徹骨都見得透. 道夫(60이후). '''치지는 참으로 알게(眞知)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참으로 안다(眞知)는 것은 뼛속까지 꿰뚫어 투철히 이해하려는 것이다. *  15:3 問: “致知莫只是致察否?” '''질문: 치지는 그저 살피기를 지극히 한다(致察)는 것 아닙니까? 曰: “如讀書而求其義, 處事而求其當, 接物存心察其是非·邪正, 皆是也.” 㝢(61이후). '''대답: 예컨대 책을 읽을 적에 그 의리를 구하고, 일을 처리할 적에 마땅하게 하기를 구하고, 사물을 접하거나 마음을 갈무리(存心)할 적에<ref>활동할 때나 혼자 묵상할 때나</ref>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을 살피는 행위가 모두 이것(치지)이다. *  15:4 因鄭仲履之問而言曰: “致知乃本心之知. 如一面鏡子, 本全體通明, 只被昏翳了, 而今逐旋磨去, 使四邊皆照見, 其明無所不到.” 蓋卿(65때). '''정중리의 질문에 대한 답: 치지는 본심의 앎(本心之知)이다.<ref>이 부분은 문법적으로 애매하다. 치지는 동작이다. 앎을 지극하게 하는 '행위'를 말한다. 본심지지는 성질이다. 세상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마음의 성질을 말한다.지금 본문처럼 쓰면 '동작=성질'과 같이 되므로 말이 순조롭지 않다. 차라리 '치지의 지(知)라는 것은 본심지지를 말한다'정도였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이 조목 전체가 불교적 메타포와 어휘가 농후하지만 '본심'은 특히나 불교적 표현이다. 주희는 이 표현을 평소에 잘 쓰지 않는다. '본심지지'의 경우 어떤 내용성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을 인식하는 능력 그 자체를 말한다. 말하자면 거울의 성질 가운데 밝게 비추고 투영하는 성질 정도를 지시하는 말이다.</ref> 예를 들어 거울은 본래 온전히 밝지만 흐린 것이 끼었을 뿐이다. 이제 점점 갈고닦아 사방을 모두 비추도록하면 그 밝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  15:5 致知有甚了期! 方(41때). '''치지에 무슨 끝날 기약이 있겠나? *  15:6 致知工夫, 亦只是且據所已知者, 玩索推廣將去. 具於心者, 本無不足也. '''치지공부는 역시 이미 아는 것에 의지하여 (그것을) 완미하고 확장해나가는 것 뿐이다. 마음에 갖춘 것은 본래 부족함이 없다. *  15:7 格物者, 格, 盡也, 須是窮盡事物之理. 若是窮得三兩分, 便未是格物. 須是窮盡得到十分, 方是格物. 賀孫(62이후). '''격물(格物)에서 격(格)은 남김없이 다한다(盡)는 뜻이다.<ref>주희가 격을 이렇게 풀이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은 아래 15:9에서처럼 '이르다'로 풀이한다.</ref>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남김없이 다 파고들어야<ref>궁(窮)은 대개 '궁구하다'라고 풀이하지만 오늘날 한국어에서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다. 끝까지 탐구하고 파고들어 모조리 알고자하는 행위가 '궁구'이다. 여기서는 '파고들다'나 '탐구하다' 정도로 번역하겠다.</ref> 한다. 만약 2할이나 3할쯤 파고들었다면 격물이 아니다. 남김없이 100퍼센트 탐구해야 격물이다. 하손의 기록. * <以下格物, 兼論窮理.> '''<이 아래로 격물에 관한 조목들. 궁리에 관한 논의도 겸한다.> *  15:8 居甫問: “格物工夫, 覺見不周給.” '''거보(서우)의 질문: 격물공부가 두루 미치지 않는 듯합니다. 曰: “須是四方八面去格.” 可學(62때). '''대답: 사방팔방에 나아가 탐구해야(格) 한다. '''정가학 *  15:9 格物. 格, 猶至也, 如‘舜格于文祖’之‘格’, 是至于文祖處. 芝(63때). '''격물의 격은 이르다(至)와 같다.<ref>현실의 여러 사태와 사물을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보아 그것에 내재한 모종의 패턴을 파악해서 이해하는 것까지가 '격'이다. 그래서 격물의 '격'은 이르다, 탐구하다, 파악하다, 이해하다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앞으로는 이런 번역어들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고, 필요할 경우 '격하다'로도 풀이하겠다.</ref> 예컨대 '순임금이 문조의 묘에 격하여(舜格于文祖)'<ref>상서 순전</ref>에서의 '격'은 문조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  15:10 問: “格物, 還是事未至時格, 事旣至然後格?” '''질문: 격물은 사태가 아직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태가 이른 뒤에 '격'하는 것입니까?<ref>육아로 비유하자면 애를 낳기 전에 육아의 도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애를 낳은 후에 탐구하는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ref> 曰: “格, 是到那般所在. 也有事至時格底, 也有事未至時格底.” 芝(63때). '''대답: '격'은 (내가) 저것이 있는 곳으로 이르는 것이다. 사태가 이르렀을 때 '격'하는 경우도 있고 사태가 이르기 전에 '격'하는 경우도 있다. 지(芝)의 기록. (63세) *  15:11 格物者, 如言性, 則當推其如何謂之性; 如言心, 則當推其如何謂之心, 只此便是格物. 砥(61때). '''격물이란, 예를 들어 성(性)이다 하면 무엇을 성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하고 심(心)이다 하면 무엇을 심이라고 하는지 따져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격물이다. 지(砥)의 기록. (61세) *  15:12 窮理格物, 如讀經看史, 應接事物, 理會箇是處, 皆是格物. 只是常敎此心存, 莫敎他閑沒勾當處. 公且道如今不去學問時, 此心頓放那處? 賀孫(62이후). '''궁리와 격물은, 예컨대 경서를 읽고 역사서를 읽고 사태와 사물에 접하고 대응하면서 각각의 경우에 옳은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두 격물이다. 그저 늘 이 마음을 간직하고 한가로이 일 없는 자리에 머물게 하지 말라. 그대가 한 번 말해보라. 요즘 학문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13 格物, 須是從切己處理會去. 待自家者已定疊, 然後漸漸推去, 這便是能格物. 道夫(60이후). '''격물은 자신에게 절실한 지점에서부터 이해해나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신의 마음이 안정된 다음에 천천히 밀고 나가야 격물이 가능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14 “格物”二字最好. 物, 謂事物也. 須窮極事物之理到盡處, 便有一箇是, 一箇非, 是底便行, 非底便不行. 凡自家身心上, 皆須體驗得一箇是非. 若講論文字, 應接事物, 各各體驗, 漸漸推廣, 地步自然寬闊. 如曾子三省, 只管如此體驗去. 德明(44이후). '''격물이라는 두 글자가 가장 좋다. 물은 사건과 사물이다. 사건과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남김 없이 파고 들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는데 옳은 것이면 행하고 그른 것이면 행하지 않는다. 대개 옳고 그름을 자신의 심신상에서 모두 체험(體驗)해야 한다. 문자를 강론하고 사건과 사물에 대응할 적에 각각의 경우(의 옳고 그름)를 체험하며 점점 미루어 넓혀간다면 (자신의) 지평이 자연히 드넓어질 것이다. 증자(曾子)가 매일 세 차례 반성한 것처럼 그저 이렇게 체험해가야 한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15 文振問: “物者, 理之所在, 人所必有而不能無者, 何者爲切?” '''문진(文振)의 질문: 물(物)은 이치가 있는 곳이요 (이치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며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절실한 것인가요? 曰: “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 皆人所不能無者. 但學者須要窮格得盡. 事父母, 則當盡其孝; 處兄弟, 則當盡其友. 如此之類, 須是要見得盡. 若有一毫不盡, 便是窮格不至也.” 人傑(51이후). '''대답: 군신, 부자, 형제, 부부, 붕우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이라면 더더욱 반드시 남김 없이 파고들어야 한다. 부모를 모실 때는 효를 다해야 하고 형제간에 지낼 때는 우애를 다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남김 없이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완전하지 못하면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16 格物, 莫先於五品. 方子(59이후). '''격물(格物)의 대상은 오륜(五品)<ref>오품(五品)은 다섯 가지 인간관계, 곧 오륜을 말한다. 상서 순전을 보라.</ref>이 최우선이다. 방자(方子)의 기록. (59세 이후) *  15:17 格物, 是窮得這事當如此, 那事當如彼. 如爲人君, 便當止於仁; 爲人臣, 便當止於敬. 又更上一著, 便要窮究得爲人君, 如何要止於仁; 爲人臣, 如何要止於敬, 乃是. 銖(67이후). '''격물(格物)은 이 사안은 이래야 하고 저 사안은 저래야 한다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임금은 어찌하여<ref>방법을 묻는 것인지 이유를 묻는 것인지 불분명하다.</ref> 인에 멈추어야 하는지, 신하는 어찌하여 경에 멈추어야 하는지를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수(銖)의 기록. (67세 이후) *  15:18 格物者, 格其孝, 當考論語中許多論孝; 格其忠, 必‘將順其美, 匡救其惡’, 不幸而仗節死義. 古人愛物, 而伐木亦有時, 無一些子不到處, 無一物不被其澤. 蓋緣是格物得盡, 所以如此. 節(64이후). ''' '격물(格物)'이란, 효(孝)를 격(格)하려면 '논어'에서 효를 논한 많은 부분들을 살펴보아야 하고 충(忠)을 격(格)하려면 반드시 '임금이 잘하는 것은 받들어 따르고(將順其美), 임금이 잘못하는 것은 바로잡아 제지해야(匡救其惡)'<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장(將)은 소학집해에 의하면 받든다는 뜻. 광구(匡救)는 바로잡아 제지한다는 뜻이다. 일역판에서는 효경의 주석서 하나를 인용하여 장(將)을 행(行)의 뜻으로 풀이했다.</ref>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절개를 지키고 의로움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仗節死義).<ref>후한서 오한(吳漢)전. 장(仗)은 붙잡는다는 뜻.</ref> 옛사람들은 만물을 사랑하여 나무를 베는 것에도 때가 있었다. 이 사랑이 도달하지 못한 곳이 조금도 없었으며, 이 은택을 입지 못한 사물이 하나도 없었다. 대개 격물을 완전하게 해냈기 때문에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19 格物, 須眞見得決定是如此. 爲子豈不知是要孝?爲臣豈不知是要忠?人皆知得是如此. 然須當眞見得子決定是合當孝, 臣決定是合當忠, 決定如此做, 始得. 㝢(61이후). ''' 격물(格物)할 적에는 결단코 반드시 이러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자식이 되어서 어찌 효도해야 함을 모르겠나? 신하가 되어서 어찌 충성해야 함을 모르겠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해야 함을 안다. 그러나 자식은 결단코 반드시 효도해야 하고, 신하는 결단코 반드시 충성해야 하며 결단코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0 如今說格物, 只晨起開目時, 便有四件在這裏, 不用外尋, 仁義禮智是也. 如才方開門時, 便有四人在門裏. 僩(69이후). ''' 지금 말한 격물의 경우, 다만 아침에 눈을 뜬 순간 이미 네 가지가 바로 여기 있으므로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바로 이 네 가지이다. 마치 (조금 전) 문을 열자마자 (여러분) 네 사람이 문 안에 있었던 것과 같다.<ref>마지막 문장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해서 비유한 것일 수도 있고, 당시 강론하던 현장에서의 구체적인 상황을 가지고 빗댄 것일 수도 있다. 일역판에서는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구체성이 있다고 가정하고 풀이했다.</ref>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1 子淵說: “格物, 先從身上格去. 如仁義禮智, 發而爲惻隱·羞惡·辭遜·是非, 須從身上體察, 常常守得在這裏, 始得.” '''자연(子淵)이 말함: '격물'은 우선 자기자신에게서 시작해야 합니다. 인의예지(仁義禮智)가 발현되어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되는 것을 자기자신에게서 직접 관찰하고, 그것을 늘 속에 간직해야 됩니다. 曰: “人之所以爲人, 只是這四件, 須自認取意思是如何. 所謂惻隱者, 是甚麽意思? 且如赤子入井, 一井如彼深峻, 入者必死, 而赤子將入焉! 自家見之, 此心還是如何? 有一事不善, 在自家身上做出, 這裏定是可羞; 在別人做出, 這裏定是惡他. 利之所不當得, 或雖當得, 而吾心有所未安, 便要謙遜辭避, 不敢當之. 以至等閑禮數, 人之施於己者, 或過其分, 便要辭將去, 遜與別人, 定是如此. 事事物物上各有箇是, 有箇非, 是底自家心裏定道是, 非底自家心裏定道非. 就事物上看, 是底定是是, 非底定是非. 到得所以是之, 所以非之, 卻只在自家. 此四者, 人人有之, 同得於天者, 不待問別人假借. 堯舜之所以爲堯舜, 也只是這四箇, 桀紂本來亦有這四箇. 如今若認得這四箇分曉, 方可以理會別道理. 只是孝有多少樣, 有如此爲孝, 如此而爲不孝; 忠固是忠, 有如此爲忠, 又有如此而不喚做忠, 一一都著斟酌理會過.” 賀孫(62이후). '''대답: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바로 이 네 가지 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반드시 스스로 알아야 한다. 이른바 측은지심이란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 갓난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한다는 이야기를 보자.<ref>맹자 2A:6</ref> 이 우물이 이토록 깊고 험하여 빠지면 반드시 죽게 되는데 어떤 아이가 빠지려 한다! 자신이 그것을 보게 되면 마음이 어떻겠는가? 어떤 좋지 못한 일을 자기 자신이 했다고 한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부끄러울(羞) 것이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속으로(這裏) 반드시 그를 미워할(惡) 것이다. 얻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그런 이익이 있거나, 혹여 비록 적절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면 겸손하게 사양하여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ref>감히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ref> 심지어 사소한 예절에서도(等閑禮數) 남이 나에게 베풀 때 분수를 넘어버리면 그것을 사양하여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 반드시 이렇게 한다. 모든 사건과 사물에는 각각 옳고 그름이 있다. 옳은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 반드시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내 마음 속에서 반드시 그르다고 말한다. (마음이 아니라) 사건과 사물쪽에 가서 보면 옳은 것은 반드시 옳고 그른 것은 반드시 그르다. 그러나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판단의 근거에 이르러서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이 네 가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고 하늘로부터 똑같이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빌려달라고 할 필요가 없다. 요순이 요순이 된 이유 역시 단지 이 네 가지 뿐이다. 걸왕과 주왕도 원래는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 네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면 비로소 다른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효(孝)에도 그 양상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해서 효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 똑같이 했는데 불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충(忠)은 충인데, 이렇게 해서 충이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 똑같이 이렇게 했는데 충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하나 모두 신중히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22 問: “格物最難. 日用間應事處, 平直者卻易見. 如交錯疑似處, 要如此則彼礙, 要如彼則此礙, 不審何以窮之?” '''질문: '격물'이 가장 어렵습니다. 일상 속에서 일에 대응하는 지점 가운데 평이직절한 것은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잡하고 애매한 경우는 이렇게 하려 하면 저것이 장애가 되고, 저렇게 하려 하면 이것이 방해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탐구하는 것입니까? 曰: “如何一頓便要格得恁地! 且要見得大綱, 且看箇大胚模是恁地, 方就裏面旋旋做細. 如樹, 初間且先斫倒在這裏, 逐旋去皮, 方始出細. 若難曉易曉底, 一齊都要理會得, 也不解恁地. 但不失了大綱, 理會一重了, 裏面又見一重; 一重了, 又見一重. 以事之詳略言, 理會一件又一件; 以理之淺深言, 理會一重又一重. 只管理會, 須有極盡時.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成四節次第, 恁地方是.” 㝢(61이후). '''대답: 어떻게 첫 술에(一頓)<ref>'일둔'은 한 차례, 한 번 등의 뜻이다. 주희는 종종 음식을 한 술 먹는 것을 '일둔'이라고 형용한다. 124:13 참조.</ref> 그렇게 (완벽하게) 격물하려 하는가? 우선은 큰 줄기(大綱)를 보아야 한다. 우선 전체적인 틀(mould)이<ref>大胚模에 대해서는 14:6 참조.</ref>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그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旋旋)<ref>선선(旋旋)은 차례차례 순서대로 조금씩 함을 말한다.</ref> 세밀한 것을 해나가야 한다. 나무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우선 나무를 베어 여기에 쓰러뜨려 놓은 다음에 순서대로(逐旋) 한겹씩 껍질을 벗겨내야 비로소 안쪽의 섬세한 부분이 드러난다. 만약 이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을 모두 한번에 헤아리려고 한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할 수가 없다.<ref>여기서 해(解)는 can과 같다.</ref> 그러나 큰 줄기를 놓치지 않고 있으면, 한 겹을 헤아리고 나면 그 안에 또 한 겹을 보게 되고, 그 한 겹을 이해하고 나면 또 다시 그 아래 한 겹을 보게 된다. 일의 자세함과 간략함으로 말하자면, (간략한 것) 한 건을 헤아리고 다시 (자세한 것) 한 건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치의 얕음과 깊음으로 말하자면, (얕은 것) 한 겹을 헤아리고 다시 (깊은 것) 한 겹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 헤아리다 보면 반드시 완전히 남김없이 헤아리게 되는 때가(極盡時) 올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ref>중용 20장.</ref> 것이 네 단계의 절차를 이룬다. 이렇게 해야만 한다. 우(㝢)의 기록. (61세 이후) *  15:23 或問: “格物是學者始入道處, 當如何著力?” '''누군가의 질문: '격물'은 배우는 이가 처음으로 도(道)에 들어가는 지점입니다. 어떻게 힘써야 합니까? 曰: “遇事接物之間, 各須一一去理會始得. 不成是精底去理會, 粗底又放過了; 大底去理會, 小底又不問了. 如此, 終是有欠闕. 但隨事遇物, 皆一一去窮極, 自然分明.” '''대답: 상황을 만나고 사물을 접하는 사이에 각각 하나하나 헤아려야 한다. 설마하니 정밀한 것은 헤아리고 거친 것은 방치하며 큰 것은 헤아리고 작은 것은 탐문하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하면 결국 무언가 빠뜨리게 된다. 다만 사물과 상황에 따라 모두 하나하나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히 분명해진다. 又問: “世間有一種小有才底人, 於事物上亦能考究得仔細, 如何卻無益於己?” '''재질문: 세상에는 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사물에 대해 꼼꼼하게 연구할 수 있는데도 어째서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유익하게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曰: “他理會底, 聖人亦理會, 但他理會底意思不是. 彼所爲者, 他欲人說, ‘他人理會不得者, 我理會得; 他人不能者, 我能之’, 卻不切己也.” '''대답: 그들이 헤아린 대상은 성인도 헤아리지만, 그들의 (상황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려는 의도(意思)는 (성인의 의도와) 다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다른 사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나는 헤아린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고 타인이 칭찬해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에게 절실하지 못하다. 又曰: “‘文武之道, 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聖人何事不理會, 但是與人自不同.” 祖道(68때). '''다시 대답: '문왕과 무왕의 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남아있습니다. 현자는 그 큰 것을 기억하고, 불현자는 그 작은 것을 기억합니다. 문무의 도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ref>논어 19:22</ref>라고 하였다. 성인이 어떤 일이든 헤아리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들이 알아주기나 바라는) 다른 사람들과 자연히 다를 뿐이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24 傅問: “而今格物, 不知可以就吾心之發見理會得否?” '''부(傅)의 질문: 이제 '격물'을 할 때, 잘 모르겠습니다만, 내 마음에서 발현하는 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는 것 아닙니까? 曰: “公依舊是要安排, 而今只且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它. 久後會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而今只管要從發見處理會. 且如見赤子入井, 便有怵惕·惻隱之心, 這箇便是發了, 更如何理會. 若須待它自然發了, 方理會它, 一年都能理會得多少! 聖賢不是敎人去黑淬淬裏守著. 而今且大著心胸, 大開著門, 端身正坐以觀事物之來, 便格它.” 蘷孫(68이후). '''대답: 그대는 여전히 머리를 굴려 안배하려고 한다. 지금은 우선 사태와 사물에 나아가 격물해야 한다. 독서의 경우는 읽고 있는 글에서 격물하고, 남의 말을 들을 때는 그 말에서 격물하고, 사물을 접할 때는 그렇게 접한 사물에서 격물하라. 정밀하든 거칠든, 크든 작든 모두 격물해야 한다. 오래도록 이렇게 하다가 회통(會通)<ref>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이다. 서로 달라 보였던 것이 녹아서 모여 하나가 되고 서로 막혀 있던 것이 꿰뚫려 하나가 되는 지적 경험을 말한다.</ref>하면 거친 것이 곧 정밀한 것이요, 작은 것이 곧 큰 것이다. 여기가 바로 모든 이치의 단일한 뿌리가 되는 지점이다.<ref>현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발견하는 인간세계와 자연세계의 패턴들은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턴들이 공유하고 있는 패턴성 그 자체는 하나이다. 패턴의 이러한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희는 자주 '리일분수(理一分殊)'라고 표현했다. '리지일본처(理之一本處)'는 패턴의 통일성, 곧 '리일'을 말한다.</ref> 이제 (그대는) 그저 발현된 지점에서만 헤아리려고 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놀랍고 두렵고 측은한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이 바로 발현된 지점인데, 여기서 더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만약 자연히 발현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일년 내내 몇 개쯤 헤아릴 수 있겠나? 성현은 사람들더러 저 암흑 속에서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제 가슴을 크게 열고, 문을 넓게 열고, 몸을 단정히 하고 바르게 앉아 다가오는 사태와 사물을 관찰하며 그것들을 격물하라. 기손(蘷孫)의 기록. (68세 이후) *  15:25 世間之物, 無不有理, 皆須格過. 古人自幼便識其具. 且如事君事親之禮, 鐘鼓鏗鏘之節, 進退揖遜之儀, 皆目熟其事, 躬親其禮. 及其長也, 不過只是窮此理, 因而漸及於天地鬼神日月陰陽草木鳥獸之理, 所以用工也易. 今人皆無此等禮數可以講習, 只靠先聖遺經自去推究, 所以要人格物主敬, 便將此心去體會古人道理, 循而行之. 如事親孝, 自家旣知所以孝, 便將此孝心依古禮而行之; 事君敬, 便將此敬心依聖經所說之禮而行之. 一一須要窮過, 自然浹洽貫通. 如論語一書, 當時門人弟子記聖人言行, 動容周旋, 揖遜進退, 至爲纖悉. 如鄕黨一篇, 可見當時此等禮數皆在. 至孟子時, 則漸已放棄. 如孟子一書, 其說已寬, 亦有但論其大理而已. 僩(69이후). '''세상 사물에는 이치가 없는 것이 없으므로 모두 낱낱이 격물해야 한다. 고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모든 사물이 이치를) 갖추고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어, 군주를 섬기고 부모를 섬기는 예법, (중요한 의식에서) 종치고 북치는 절차, (의식에서 사람들이)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몸동작을 모두 눈으로 익히고 몸소 실천했다. 더 자라서는 그저 이 이치를<ref>사군사친, 종고갱장, 진퇴읍손에 내재한 의미를 말한다.</ref> 깊이 연구하고, 나아가 점차 천지, 귀신, 일월, 음양, 초목, 조수의 이치까지 이르른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공부가 쉬웠던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예절(禮數)<ref>예수(禮數)는 숫자로 규정된 의식(ritual)의 절차를 말한다. 절을 두 번 하고 술을 세 번 따르는 등이 그것이다. 흔히 쓰는 '예절(禮節)'이란 말의 '절' 역시 이런 종류의 의식을 규정하는 절차와 단계, 참여자의 위아래를 나누는 등급 따위를 의미하므로 '예수'와 통한다. 일역판에서 예수를 예절로 번역한 것을 참조하여 따랐다.</ref>(의 전통이 모두 사라져서) 그것을 전혀 강습할 수가 없으므로 오로지 성인이 남긴 경전에 의존하여 저 홀로 유추하고 연구할 뿐이다. 그래서 (내가) 격물(格物)과 주경(主敬)<ref>주희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배움의 과정은 1. 먼저 어려서 몸으로 익혀서 습관화하고 2. 나중에 머리로 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지 캐묻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가 원하는 만큼 어려서부터 몸으로 익히는 사람들이 없으므로 불가피하게 1의 과정을 다 큰 다음에 보충해야 한다. 이러한 보충의 과정이 일종의 명상수련에 해당하는 '경(敬)'공부이다. '격물'은 '캐묻고 이해하는' 2번 과정이다.</ref>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기자신의 마음에서 고대인의 도리를 체득하게 하여 그 도리를 좇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먼저 스스로 효도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효심을 가지고 고대의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군주를 공경히 섬기는 것의 경우도 (먼저 그 이유를 알고 난 다음) 이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인의 경전에서 설명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실천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모두 깊이 연구하면 자연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구석구석) 스며들어 꿰뚫게 된다. '논어' 한 권을 예로 들자면, 당시 문인제자들이 성인의 말과 행동, (중요한 의식에서의) 몸가짐과 동작, 나아가고 물러나며 읍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 지극히 상세하다. '향당(鄕黨)' 편을 보면 당시 이러한 예절(禮數)이 모두 (여전히)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버려졌다. '맹자' 한 권을 보면, 그 논의가 이미 완화되어,<ref>예절을 굳게 지키고 실천하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역시 중대한 이치만<ref>디테일은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다.</ref> 논하고 있을 뿐이다. 한(僩)의 기록. (69세 이후) *  15:26 問竇從周: “曾看‘格物’一段否?” '''선생이 두종주(竇從周)에게 질문: '격물' 한 단락은 읽어보았는가? 因言: 聖人只說“格物”二字,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且自一念之微, 以至事事物物, 若靜若動, 凡居處飮食言語, 無不是事, 無不各有箇天理人欲. 須是逐一驗過, 雖在靜處坐, 亦須驗箇敬·肆. 敬便是天理, 肆便是人欲. 如居處, 便須驗得恭與不恭; 執事, 便須驗得敬與不敬. 有一般人專要就寂然不動上理會, 及其應事, 卻七顚八倒, 到了, 又牽動他寂然底. 又有人專要理會事, 卻於根本上全無工夫. 須是徹上徹下, 表裏洞徹. 如居仁, 便自能由義; 由義, 便是居仁. “敬以直內”, 便能“義以方外”; 能“義以方外”, 便是“敬以直內.” 德明(44이후). '''(선생이) 이어서 말함: 성인은 단지 '격물'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니, 이는 구체적인 사태와 사물에서 이치를 헤아리도록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미미한 생각에서부터 온갖 사사물물에 이르기까지, 고요하든 움직이든, 거처, 음식, 언어 등 사태(事) 아닌 것이 없으며, 각각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함유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각각의 사태와 사물을 따라) 하나하나 점검해야 한다. 비록 고요한 곳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경건함(敬)과 방종함(肆)을 점검해야 한다. 경건함은 천리이고, 방종함은 인욕이다. 집에 있는 경우는 공손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하고, 일을 집행할 경우에는 경건한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ref>거처공, 집사경(居處恭, 執事敬)은 논어 19:19</ref>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寂然不動)지점에 나아가 헤아리려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사태에 대응할 적에 오히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자빠져서(七顚八倒) 결국 자신의 그 고요한 것까지 뒤흔들어버리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태에서 헤아리려 하고 뿌리가 되는 지점에는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위쪽으로도 아래쪽으로도<ref>하학과 상달을 말한다.</ref> 끝까지 꿰뚫고, 바깥쪽으로도 안쪽으로도<ref>적연부동과 감이수통을 말한다.</ref> 완전히 꿰뚫어야 한다. 인(仁)에 기거하면 저절로 의(義)로운 길을 걸을 수 있고, 의로운 길을 걸으면 곧 인에 기거하는 것이다.<ref>맹자 7A:33</ref>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敬以直內)' 하면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義以方外)' 할 수 있으며, '의로 외면을 방정하게' 할 수 있으면 곧 '경으로 내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ref>주역 곤괘 문언전.</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27 才仲問: “格物, 是小學已有開明處了, 便從大學做將去, 推致其極.” '''재중(才仲)의 질문: '격물'은 소학의 단계에서 이미 개명(開明)된 것이 있고, 대학의 단계에서 (그 개명된 부분에서부터) 시작하여 해나가서 (앎이) 그 극한에 이르도록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曰: “人也不解無箇發明處. 才有些發見處, 便從此挨將去, 漸漸開明. 只如一箇事, 我才發心, 道‘我要做此事’, 只此便是發見開明處了, 便從此做將去. 五代時, 有一將官, 年大而不識字. 旣貴, 遂令人於每件物事上書一名字帖之, 渠子細看, 久之, 漸漸認得幾箇字. 從此推將去, 遂識字.” 璘(62때). '''대답: 사람은 발명(發明)된 부분이 없을 수 없다<ref>해(解)는 can의 의미.</ref>. 조금이라도 발현된 부분이 있으면 거기에서부터 밀고 나가 점점 개명(開明)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일에 대하여 발심(發心)하여, '내가 이 일을 처리하겠다'고 말한다면 여기가 바로 발현된 부분이요 개명된 부분이니 거기에서 시작하여 해나가야 한다. 오대(五代) 때의 어떤 장수는 나이는 많은데 글자를 알지 못했다. 신분이 귀해진 그는 사람을 시켜 주변의 물건마다 이름표를 붙이게 하였다. 그는 그것들을 꾸준히 세심히 보았고, 점차 글자 몇 개를 인식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밀고 나가서 마침내 글자를 알아보게 되었다.<ref>구오대사 권15 양서(梁書) 한건(韓建)</ref> 린(璘)의 기록. (62세) *  15:28 問: “格物則恐有外馳之病?” '''누군가의 질문: '격물'을 하면 바깥쪽으로 정신이 팔리는(外馳) 병폐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曰: “若合做, 則雖治國平天下之事, 亦是己事. ‘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 不成也說道外馳!” '''대답: 만약 응당 해야 하는 것이라면 치국평천하의 일이라 할지라도 역시 자기 (내면의) 일이다. '주공(周公)은 세 왕<ref>우, 탕, 문무를 말한다. 문왕과 무왕을 하나씩 세면 네 왕이지만 어째서인지 맹자는 셋으로 셌다.</ref>의 치적을 포괄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셨다. 혹여 (세 왕이 했던 것 가운데) 오늘날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거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낮에 이어 밤에도 계속하여, 다행히 무언가 터득하면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앉아서 새벽이 오기만을 기다렸다.'<ref>맹자 4B:20. 우는 맛있는 술을 싫어하고 훌륭한 말을 좋아했다. 탕은 중도를 잡았으며 어진이를 세우되 그 부류를 따지지 않았다. 문왕은 백성 보기를 자기 몸의 상처 보듯 하였으며 도를 소망하면서 (그것을) 아직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 무왕은 가까이 있는 이를 편애하지 않고 멀리 있는 이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 맹자가 말한 '세 왕의 네 가지 일'이다.</ref> 설마하니 주공의 마음도 바깥쪽으로 팔렸다고 하진 않겠지? 又問: “若如此, 則恐有身在此而心不在此,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有此等患.” '''재질문: 그렇게하면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여기 있지 않아서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는'<ref>대학 전7장.</ref> 등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曰: “合用他處, 也著用.” '''대답: 그렇게 해야하는 경우에는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ref>'著'는 '須著'의 뜻이다.</ref> 又問: “如此, 則不當論內外, 但當論合爲與不合爲.” '''재질문: 그렇다면 내면이냐 외면이냐를 논할 것이 아니라, 다만 응당 해야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논해야 할 뿐입니다. 先生頷之. 節(64이후).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29 若格物, 則雖不能盡知, 而事至物來, 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 雖不中, 不遠矣. 節(64이후). ''' '격물'의 경우, 비록 모두 완전히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일이 닥치고 사물이 왔을 때 큰 것은 조금 더해서 처리하고 작은 것은 조금 덜어내서 처리하면(大者增些子, 小者減些子)<ref>일역판의 각주에 의하면 이는 양팔저울로 무게를 재는 경우를 시각화해서 이해해야 한다. 큰 물건을 저울의 한쪽에 올려두면 다른 쪽 팔에는 좀 무거운 무게추를 더해주어야 균형이 맞다. 작은 물건을 올릴 경우엔 무게추를 덜어주어야 균형이 맞다.</ref> 비록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雖不中, 不遠矣).<ref>대학 전9장.</ref>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0 問: “格物工夫未到得貫通, 亦未害否?” '''질문: '격물' 공부는 꿰뚫는(貫通) 경지에 이르지 못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曰: “這是甚說話! 而今學者所以學, 便須是到聖賢地位, 不到不肯休, 方是. 但用工做向前去, 但見前路茫茫地白, 莫問程途, 少間自能到. 如何先立一箇不解做得便休底規模放這裏了, 如何做事! 且下手要做十分, 到了只做得五六分; 下手做五六分, 到了只做得三四分; 下手做三四分, 便無了. 且諸公自家裏來到建陽, 直到建陽方休. 未到建陽, 半路歸去, 便是不到建陽. 聖賢所爲, 必不如此. 如所謂: ‘君子鄕道而行, 半途而廢. 忘身之老也, 不知年數之不足也, 俛焉日有孶孶, 斃而後已! ’又曰: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憂之如何? 如舜而已矣.’” 卓(미상). '''대답: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배우는 이가 학문을 하는 까닭은 반드시 성현의 경지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도달하지 않으면 그만둘 생각이 없어야 옳다. 다만 힘껏 앞을 향해 해나갈 뿐이다. 앞길이 희뿌옇고 막막하더라도(茫茫地白) 어디까지 왔는지 묻지 말라(莫問程途). (계속 앞을 향해 나가면) 잠시 후에 저절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ref>10:31의 유사한 구절을 참조하라.</ref> 어째서 해보기도 전에 '안 되면 그만둔다(不解做得便休)'는 한계(規模)<ref>규모(規模)는 틀, 구조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미리 이러이러한 틀을 잡아서 한계선을 정해둔다는 뜻으로 쓰였으므로 이렇게 의역하였다.</ref>를 여기다 정해두려 하는가? (이렇게 하면) 어떻게 일을 해내겠나? 처음부터 100% 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50-60%정도만 하게 되고 처음부터 50-60%를 하려고 하면 결국 30-40%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고 처음부터 30-40%를 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또, 그대들이 그대들 집에서 건양(建陽)까지 오려면 건양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멈춘다. 건양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돌아가면 건양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성현이 하는 일은 결코 이와 같지 않다. 예컨대 '군자는 도를 향해 가다가 중도에<ref>본문은 반도(半途)이나 인용 출처인 예기 표기(表記) 쪽은 '중도(中道)'이다.</ref> 그만두면 자신이 늙었음을 잊고 앞으로 살 날이 부족한 것도 모르고 날마다 부지런히(孶孶) 몰두하다(俛焉)<ref>'俛'에 관해서는 14:59 참조.</ref> 죽고 나서야 멈춘다.'<ref>예기 표기(表記)</ref> 고 하였고, 또 '순(舜)은 천하의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한데 나는 여전히 평범한 촌사람을 면치 못하니 이는 근심할 만하다. 근심하여 어떻게 하는가? 순처럼 할 뿐이다.'<ref>맹자 4B:28</ref>라고 하였다. 탁(卓)의 기록. *  15:31 人多把這道理作一箇懸空底物. 大學不說窮理, 只說箇格物, 便是要人就事物上理會, 如此方見得實體. 所謂實體, 非就事物上見不得. 且如作舟以行水, 作車以行陸. 今試以衆人之力共推一舟於陸, 必不能行, 方見得舟果不能以行陸也, 此之謂實體. 德明(44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 도리를 공중에 붕 뜬 물건으로 여긴다.<ref>14:44에 유사한 구문이 있으니 참조하라.</ref> '대학'에서 이치를 파고들라(窮理)고 말하지 않고 그저 사물에 나아가라(格物)고만 말한 것은 곧 사람들더러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여 (도리를) 헤아리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란 실제 사태와 사물에 접촉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배를 만들어 물 위를 가고, 수레를 만들어 육지를 간다.'<ref>주례 고공기</ref>같은 경우 이제 시험삼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배를 육지 위로 밀어보면 결코 운행할 수 없을 것이니, 그제서야 비로소 배는 과연 육지를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實體)'이다.<ref>실체(實體)는 문자 그대로 옮길 수 없다. 이미 현대 한국어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시아(ousia)'의 번역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주자어류에서의 실체는 경험적으로 검증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이치를 말한다. 한편 요즘 세간에서 종종 사용하는 '실체적 진실'이라는 표현에서 '실체'는 우시아보다는 주자어류에서의 실체에 조금 더 가까운 것처럼 들린다.</ref>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2 問: “道之不明, 蓋是後人舍事跡以求道.” '''질문: '도(道)가 밝지 못하게'<ref>중용 제 4장.</ref> 된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도를 구할 때 구체적인 상황(事跡)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까? 曰: “所以古人只道格物. 有物便有理, 若無事親事君底事, 何處得忠孝!” 節(64이후). '''대답: 그래서 옛사람들은 그저 '격물(格物)'이라고만 하였다.<ref>직전 조목 참조.</ref> 사물과 상황이 있으면 (그곳에) 이치가 있다. 만약 부모를 섬기고 군주를 섬긴다는 상황(事)이 없다면 충(忠)과 효(孝)(라는 이치를) 어디서 얻을 수 있겠는가? 절(節)의 기록. (64세 이후) *  15:33 “窮理”二字不若格物之爲切, 便就事物上窮格. 如漢人多推秦之所以失, 漢之所以得, 故得失易見. 然彼亦無那格底意思. 若格之而極其至, 則秦猶有餘失, 漢亦當有餘得也.” ''' '궁리(窮理)'라는 두 글자는 '격물(格物)'이 친근하고 절실한(切)<ref>'절(切)'은 어떤 말이 무척 구체적이고 실감나서 우리 피부에 딱 와 닿는 느낌을 말한다.</ref> 것에 미치지 못한다. 곧, 실제 사건과 사물의 현장에서 탐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 사람들이 진(秦)나라가 실패한(失) 이유와 한나라가 성공한(得) 이유를 많이 분석해준 덕에 (우리는) 그 득실(得失)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격(格)하는 정신은 없다.<ref>주희에 의하면 격물은 각각의 사건과 사물을 끝까지 파고들어서 그것이 담고 있는 이치를 철두철미하게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한나라 사람들의 탐구는 방향이 틀렸다기 보다는 그 정도가 못미쳤다는 것이다.</ref> 만약 격(格)하여 그 극한까지 이르면 진나라에는 기존에 들춰내지 못했던 실패의 이유가 있을 것이고, 한나라에는 기존에 발견하지 못했던 성공 지점이 있을 것이다. 又云: “格, 謂至也, 所謂實行到那地頭. 如南劍人往建寧, 須到得郡廳上, 方是至, 若只到建陽境上, 卽不謂之至也.” 德明(44이후). '''다시 말함: '격(格)'은 '도달하다(至)'라는 뜻이다. 이른바 '실제로 가서 그 지점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남검(南劍)<ref>남송의 남검주.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연평구 즈음으로 복건 한가운데에 있다.</ref> 사람이 건녕(建寧)<ref>남송의 건녕부. 치소가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소속인 건구시(建瓯市)에 있다.</ref>에 가는 경우 반드시 군청(郡廳)에 도착해야만 비로소 도달한 것이다. 만약 건양(建陽)<ref>남송 건녕부 건양현. 건녕부 치소의 북쪽에 있다. 오늘날 복건성 남평시 건양구. 남검주의 치소에서부터 걸어서 북상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먼저 도달하고, 여기서 더 북상하면 건양현에 도달한다. 물론 남검주의 서북쪽 끄트머리에서 출발한다면 건녕부 군청에 도달하기 전에 건양현 경내에 진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역시 하나의 비유로서는 부자연스럽다. 건양을 '건녕'이라고 했으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ref>의 경계에만 도달했을 뿐이라면 도달했다고 하지 않는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34 格物, 不說窮理, 卻言格物. 蓋言理, 則無可捉摸, 物有時而離; 言物, 則理自在, 自是離不得. 釋氏只說見性, 下梢尋得一箇空洞無稽底性, 亦由他說, 於事上更動不得. 賀孫(62이후). ''' '격물' 같은 경우, '궁리'라고 하지 않고 도리어 '격물'이라고 말하였다. 생각건대 그 까닭은 이치(理)라고 말하면 붙잡을 것이 없어서 사물이 때로 (이치를 논의할 때) 분리되어 버리지만, 사물(物)이라고 말하면 이치는 자연히 그 안에 있어서 본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ref>오늘날의 표현으로 치환하자면, 현실을 논하면 이론은 자연히 그 논의 속에 있지만 이론을 논하다보면 현실을 때로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ref> 석씨(釋氏)는 그저 '본성을 본다(見性)'고만 하는데, 결국 공허하고 근거 없는(空洞無稽)<ref>공동은 속이 빈 것이다. 이론만 있지 실질적 내용이 없다는 뜻이다. 무계는 계고(稽考)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뿔달린 토끼나 날개달린 말처럼 현실에서 찾아내어 입증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ref>본성을 찾는 것이다. 설령 그들의 말대로 한다 해도(亦由他說)<ref>유(由)는 '따르다', 역(亦)은 '만일'로 풀었다.</ref> 실제 일에서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하손(賀孫)의 기록. (62세 이후) *  15:35 所謂窮理者, 事事物物, 各自有箇事物底道理, 窮之須要周盡. 若見得一邊, 不見一邊, 便不該通. 窮之未得, 更須款曲推明. 蓋天理在人, 終有明處. “大學之道, 在明明德”, 謂人合下便有此明德. 雖爲物欲掩蔽, 然這些明底道理未嘗泯絶. 須從明處漸漸推將去, 窮到是處, 吾心亦自有準則. 窮理之初, 如攻堅物, 必尋其罅隙可入之處, 乃從而擊之, 則用力爲不難矣. 孟子論四端, 便各自有箇柄靶, 仁義禮智皆有頭緖可尋. 卽其所發之端, 而求其可見之體, 莫非可窮之理也. 謨(50이후). '''이른바 궁리(窮理)란, 세상 모든 사태와 사물 각각에 본래 그 사태와 사물 고유의 도리가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남김없이 완전히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을 보지 않으면 두루 통달했다(該通)고 할 수 없다. 아직 다 탐구하지 못했다면 더욱 상세하게 미루어 밝혀야 한다. 생각건대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있으니 (우리 안에) 끝내 밝은 지점이 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이 밝은 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물욕에 엄폐(掩蔽)되었다 하더라도 이 밝은 도리는 결코 민멸된(泯絶) 적이 없다. 밝은 곳에서부터 점점 밀고 나가서 궁극적으로 올바른 지점(是處)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도 저절로 준칙(準則)이 있게 된다. 궁리(窮理)의 초반부는 마치 단단한 물체를 가공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부터 두들기면 힘쓰기가 어렵지 않다. 맹자가 사단(四端)을 논하여 각각 손잡이(柄靶)가 생겼다.<ref>착수할 지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ref> 인의예지(仁義禮智)에는 모두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頭緖)가 있다. 발현되어 나온 실마리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우리의 인식 시야에 들어온 본체(可見之體)를 찾아나가면 탐구(窮)할 수 없는 이치가 없다. 모(謨)의 기록. (50세 이후) *  15:36 格物窮理, 有一物便有一理. 窮得到後, 遇事觸物皆撞著這道理: 事君便遇忠, 事親便遇孝, 居處便恭, 執事便敬, 與人便忠, 以至參前倚衡, 無往而不見這箇道理. 若窮不至, 則所見不眞, 外面雖爲善, 而內實爲惡, 是兩箇人做事了! 外面爲善是一箇人, 裏面又有一箇人說道: “我不好.” 如今須勝得那一箇不好底人去方是. 豈有學聖人之書, 爲市井之行, 這箇窮得箇甚道理! 而今說格物窮理, 須是見得箇道理親切了, 未解便能脫然去其舊習. 其始且見得箇道理如此, 那事不是, 亦不敢爲; 其次, 見得分曉, 則不肯爲; 又其次, 見得親切, 則不爲之, 而舊習都忘之矣. 子蒙(미상). ''' '격물'과 '궁리'로 말하자면, 물건이 하나 있으면 이치도 하나 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탐구하고 나면 사태를 만나고 사물에 접촉할 때마다 항상 이 도리와 조우하게 된다. 군주를 섬김에 있어서는 충(忠)이라는 도리와 조우하고,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는 효(孝)라는 도리와 조우하며, 거처할 때는 공손함을, 일을 집행할 때는 경건함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충실함(忠)을 (만나고),<ref>논어 19:19</ref> 나아가 (도리가) 내 눈 앞에서 (나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수레에 타고 있을 때는 도리가) 멍에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이르면<ref>논어15:5</ref> 어딜 가든 이 도리를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만약 가장 깊은 곳까지 탐구하지 못하면 보는 것이 참되지 않아서 겉으로는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사실 악하게 되니, 이는 마치 두 사람이 따로 일하는 셈이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속으로 '나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다. 이제 그 좋지 않은 사람을 이겨내야만 한다. 어떻게 성인의 책을 배우면서 행실은 시정잡배일 수 있나! 이는 대체 무슨 도리를 탐구한 것인가! 이제 격물과 궁리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도리를 친근하고 절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구습을 곧바로 깨끗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우선 이 도리가 이러이러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어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감히 하려고 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분명해지면 (그런 옳지 않은 일을) 기꺼이 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해가 친근하고 절실해지면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구습을 모두 잊게 된다. 자몽(子蒙)의 기록. *  15:37 不是要格那物來長我聰明見識了, 方去理會, 自是不得不理會. ''' '저 사물을 격물해서 나의 총명과 견식을 키워야겠다'하고나서 격물에 착수하는 것이 아니다. 도저히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덤벼드는 것이다. *  15:38 大學說一“格物”在裏, 卻不言其所格者如何. 學者欲見下工夫處, 但看孟子便得. 如說仁義禮智, 便窮到惻隱·羞惡·辭遜·是非之心; 說好貨好色好勇, 便窮到太王公劉文武; 說古今之樂, 便窮到與民同樂處; 說性, 便格到纖毫未動處. 這便見得他孟子胸中無一毫私意蔽窒得也, 故其知識包宇宙, 大無不該, 細無不燭! 道夫(60이후). ''' '대학'에서 '격물'을 언급하지만 무엇을 격(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배우는 이가 노력을 기울일 곳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맹자를 보면 된다. 예를 들어 (맹자는) 인의예지를 말하면 곧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으로 깊이 탐구한다. 재물을 좋아하고 여색을 좋아하고 용맹을 좋아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면 곧 태왕, 공유, 문왕, 무왕의 사례를 깊이 탐구한다. 고금의 음악을 말하면 곧 백성과 함께 즐기는(與民同樂) 측면을 깊이 탐구한다. 본성(性)을 말할 때는 털끝만큼도 움직임이 없는 지점(纖毫未動)<ref>주희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란 우리의 마음이 발동하기 전의 상태(未發)를 말한다.</ref>을 깊이 탐구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사의(私意)도 맹자의 가슴 속을 가리거나 막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지식(知識)은 우주(宇宙)를 포괄한다. 큰 것도 모조리 포괄하고, 작은 것도 모조리 비춘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  15:39 居甫問: “格物窮理, 但理自有可以彼此者.” '''거보(居甫)의 질문: '격물'과 '궁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치는 다만 원래 이쪽저쪽 상황을 보고 가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曰: “不必如此看. 理有正, 有權. 今學者且須理會正. 如娶妻必告父母, 學者所當守. 至於不告而娶, 自是不是, 到此處別理會. 如事君匡救其惡, 是正理. 伊川說‘納約自牖’, 又是一等. 今於此一段未分明, 卻先爲彼引走. 如孔子說‘危行言孫’, 當春秋時亦自如此. 今不理會正當處, 纔見聖人書中有此語, 便要守定不移, 駸駸必至於行孫矣. 此等風俗, 浙江甚盛, 殊可慮!” 可學(62때). '''대답: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이치에는 정(正)<ref>원칙이다.</ref>이 있고, 권(權)<ref>상황윤리이다.</ref>이 있다. 오늘날 배우는 이는 우선 정(正)을 헤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아내를 맞이할 때 반드시 부모에게 고한다'는 것은<ref>맹자 5A:2</ref> 배우는 이가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다. 알리지 않고 결혼하는 것은 당연히 옳지 않은 것이지만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에 관해서는 따로 헤아려야 한다. 군주를 섬길 때는 임금이 잘못하는 것을 바로잡아 제지하는(匡救其惡)것이 정리(正理)이다.<ref>효경 사군(事君) 17. 소학(小學) 명군신(明君臣) 52에서도 인용했다. 15:18 참조.</ref> 하지만 이천(伊川)이 '약속을 창문으로 들인다'<ref>주역 감괘 육사효. 약(約)은 상대방을 속박하는 말이다. 이러이러한 것은 하지 않고 저러저러한 것은 반드시 실천하는 등의 내용으로 군주를 제약하는 말이다. 문과 창문은 각각 큰길과 샛길을 뜻한다. 군주에게 윤리적 처방을 들일 때 정당하게 하는 것이 물론 좋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기회를 틈타 측면으로 집어넣는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다는 의미이다.</ref>에 대해 해설한 내용은 또 다른 종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이쪽 부분을<ref>원칙을 말한다.</ref> 아직 분명히 알지 못했는데 저쪽 부분으로 먼저 끌려가서는 안 된다. 공자가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ref>논어 14:4. 위(危)는 높음, 손(孫)은 낮음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나라에 도가 있으면 말도 행실도 높게 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높게 해도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주희는 이에 대하여 군자는 행실에 있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도한 상황에서 타협없이 말하면 위험하므로 말은 낮춰서 한다고 하였다. </ref>고 했는데, 춘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역시 당연히 이와 같다.<ref>주희는 이를 상황윤리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이다. 일역판에서는 이것을 '원칙'의 한 사례로 인용한 것처럼 풀었는데 적절하지 않다.</ref> 지금 정당(正當)한 곳은 헤아리지도 않고 성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을 보자마자 그것을 꽉 붙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결국에는 점차 행실마저 타협하여 낮춰서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풍속이 절강(浙江)에서 매우 성행하니 큰 걱정이다. 가학(可學)의 기록. (62세) *  15:40 問: “格物之義, 固要就一事一物上窮格. 然如呂氏楊氏所發明大本處, 學者亦須兼考.” '''질문: '격물'의 뜻은 물론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깊이 파고드는(窮格) 것입니다. 하지만 여씨(呂氏)<ref>이정의 제자 여대림이다.</ref>와 양씨(楊氏)<ref>이정의 제자 양시.</ref>가 밝힌 큰 근본(大本)이 되는 지점<ref> 여대림이 희노애락의 미발(未發)의 영역에서 '중(中)'을 찾아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구중(求中)'론이라고 한다. '큰 근본이 되는 지점(大本處)'이란 이 '중(中)'을 말한다. 이정유서 18:82를 보라. 양시 역시 마음의 내면에 초월적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곳을 향해 깊이 침잠한 끝에 극적으로 어떠한 경지로 도약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점에 관해서는 주희가 중용혹문에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ref>도 배우는 이라면 역시 아울러 탐구해야 합니다. 曰: “識得, 卽事事物物上便有大本. 不知大本, 是不曾窮得也. 若只說大本, 便是釋老之學.” 德明(44이후). '''대답: 알고 보면(識得)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 큰 근본(大本)이 있다. (낱낱의 사태와 사물에서) 큰 근본을 알지 못했다면 아직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것이다. 만약 오직 큰 근본만 말할 뿐이라면 그것은 석씨와 노자의 학문이다. 덕명(德明)의 기록. (44세 이후) *  15:41 致知·格物, 只是一箇. 道夫(60이후).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하나이다. 도부(道夫)의 기록. (60세 이후) <以下致知·格物.> '''<이 아래로 치지와 격물에 관한 조목> *  15:42 “致知·格物, 一胯底事.” '''치지와 격물은 하나(一胯)<ref>과(胯)는 개(個)와 같다. 수량사이다.</ref>이다. 先生擧左右指來比並. 泳(66때). 선생이 양 손 손가락을 들어 병렬시켰다. 영(泳)의 기록. (66세) *  15:43 格物, 是逐物格將去; 致知, 則是推得漸廣. 賜(66이후). '''격물은 각각의 물건을 하나씩 탐구(格)해나가는 것이고, 치지는 점차 넓게 미루어 확장하는 것이다. 사(賜)의 기록. (66세 이후) *  15:44 剡伯問格物·致知. '''섬백(剡伯)<ref>일역판의 주석이 자세하니 참조하라. 어류 및 여러 다른 문헌에서 공섬(龔剡), 공섬백(龔剡伯), 공염(龔郯), 공염백(龔郯伯) 등이 등장하는데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f>이 격물과 치지에 관하여 질문. 曰: “格物, 是物物上窮其至理; 致知, 是吾心無所不知. 格物, 是零細說; 致知, 是全體說.” 時擧(64이후). '''대답: 격물은 각각의 사물에서 그 지극한 이치를 탐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내 마음에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격물은 구체적인 설명이고, 치지는 전체적인 설명이다. *  15:45 張仁叟問致知·格物. '''장인수(張仁叟)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物莫不有理, 人莫不有知. 如孩提之童, 知愛其親; 及其長也, 知敬其兄; 以至於飢則知求食, 渴則知求飮, 是莫不有知也. 但所知者止於大略, 而不能推致其知以至於極耳. 致之爲義, 如以手推送去之義. 凡經傳中云致者, 其義皆如此.” 時擧(64이후). '''대답: 이치가 없는 사물도 없고 앎이 없는 사람도 없다.<ref>대학장구 격물보망장을 참조하라.</ref> 예컨대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어류 14:92를 참조하라.</ref>에서부터 '배가 고프면 음식을 찾을줄 알고, 목이 마르면 물을 찾을줄 아는'<ref>공자가어 왕언해</ref>데 이르기까지 모두 다 '앎'이다. 단지 아는 것이 대략적인 데 그쳐서 그 앎을 지극한 경지에 이르도록 밀고 나갈(推致) 수 없을 뿐이다. '치(致)'는 손으로 밀어낸다(推送)는 뜻이다. 경전에서 '치'라고 한 곳들은 그 의미가 모두 이와 같다. 시거(時擧)의 기록. (64세 이후) *  15:46 問: “知如何致? 物如何格?” 曰: “‘孩提之童, 莫不知愛其親; 及其長也, 莫不知敬其兄.’ 人皆有是知, 而不能極盡其知者, 人欲害之也. 故學者必須先克人欲以致其知, 則無不明矣. ‘致’字, 如推開去. 譬如暗室中見些子明處, 便尋從此明處去. 忽然出到外面, 見得大小大明. 人之致知, 亦如此也. 格物是‘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之類. 事事物物, 各有箇至極之處. 所謂‘止’者, 卽至極之處也. 然須是極盡其理, 方是可止之地. 若得八分, 猶有二分未盡, 也不是. 須是極盡, 方得.” '''질문: 지(知)는 어떻게 지극히(致) 하며, 물(物)은 어떻게 탐구(格)합니까? '''대답: '어른 손을 잡고 다닐 무렵의 아이들(孩提之童) 중에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 없고, 더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이 없다.'<ref>맹자 7A:15. 직전 조목 참조.</ref>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앎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극한까지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욕(人欲)이 그 앎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반드시 먼저 인욕을 극복하여 그 앎을 지극히해야 하니, 그렇게하면 밝지 않은 곳이 없게 될 것이다.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젖히는(推開)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암실에서 미약한 빛을 발견하여 그 빛을 따라 나가다 보면 홀연히 암실 밖으로 나와서 이토록(大小) 큰 빛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앎을 지극히하는 것도 이와 같다. 격물은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멈추어야 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멈추어야 한다' 같은 것이다.<ref>임금과 신하가 '물'이고 인과 경이 그 물에 내재한 도리이다. 사사물물에서 그것에 내재한 도리를 찾는 것이 격물이다. 14:104 참조.</ref> 사태와 사물마다 각각 지극한 지점이 있다. 이른바 '멈춘다(止)'는 것은 바로 그 지극한 지점(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 이치를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 비로소 멈춰도 되는 곳이 된다. 만약 80%는 되었는데 20%가 미진하다면, 그건 (멈출 지점이) 아니다. 반드시 남김없이 지극히 다하여야(極盡)만 한다. 又曰: “知在我, 理在物.” 祖道(68때). '''다시 대답: 앎은 나에게 있고, 이치는 사물에 있다. 조도(祖道)의 기록. (68세) *  15:47 黃去私問致知·格物. '''황거사(黃去私)<ref>황의강의 형 황의용(黃義勇).</ref>가 치지와 격물에 관하여 질문. 曰: “‘致’字有推出之意, 前輩用‘致’字多如此. 人誰無知? 爲子知孝, 爲父知慈. 只是知不盡, 須是要知得透底. 且如一穴之光, 也喚做光, 然逐旋開剗得大, 則其光愈大. 物皆有理, 人亦知其理, 如當慈孝之類, 只是格不盡. 但物格於彼, 則知盡於此矣.” '''대답: '치(致)'라는 글자는 밀어낸다(推出)는 뜻이 있다. 선배 학자들은 '치'자를 많이들 이런 의미로 썼다. 사람이라면 누군들 앎이 없겠나?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할 줄 알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할 줄 안다. 단지 이 앎이 미진할 뿐이니 반드시 투철하게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작은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빛도 빛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후벼파서(開剗)<ref>개잔(開剗)은 작은 구멍을 날카로운 물건으로 깎고 파내어 크게 만드는 것이다.</ref> 점점 크게 만들면 그 빛은 더욱 커질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고 사람들도 그 이치를 알고 있으니, 마땅히 자애하고 효도한다는 등이 그것이다. 단지 탐구(格)가 미진할 뿐이다. 그저 저쪽에서 사물을 깊이 탐구하기만 하면 앎은 이쪽에서 남김없이 완전해지게 된다. 又云: “知得此理盡, 則此箇意便實. 若有知未透處, 這裏面便黑了.” 人傑(51이후). '''다시 대답: 이 이치를 완전히 다 알게 되면 이 의지(意)가 진실하게 된다. 만약 앎에 아직 철저하지 못한 곳이 있으면 이 안쪽이<ref>의지(意)를 말한다.</ref> 캄캄해져버린다. 인걸(人傑)의 기록. (51세 이후) *  15:48 劉圻父說格物·致知. '''유기부(劉圻父)<ref>이름은 자환(自寰)이다.</ref>가 격물과 치지를 설명했다. 曰: “他所以下‘格’字·‘致’字者, 皆是爲自家元有是物, 但爲他物所蔽耳. 而今便要從那知處推開去, 是因其所已知而推之, 以至於無所不知也.” 義剛(64이후). '''대답: 대학에서 '격(格)'과 '치(致)'라는 글자를 쓴 이유는, 모든 것이 본래 자신의 소유이지만 외물에 의해 가려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아는 곳에서부터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밀고 나가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의강(義剛)의 기록. (64세 이후) *  15:49 郭叔雲問: “爲學之初, 在乎格物. 物物有理, 第恐氣稟昏愚, 不能格至其理.” '''곽숙운(郭叔雲)의 질문: 배움의 시작은 격물에 있습니다. 사물마다 이치를 가지고 있지만 (저의) 기질(氣稟)이 어리석고 어두워 그 이치를 다 탐구해내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曰: “人箇箇有知, 不成都無知, 但不能推而致之耳. 格物理至徹底處.” '''대답: 사람은 누구나 앎을 가지고 있다. 설마하니 다들 아무것도 모르겠는가? 단지 밀고 나가서 앎을 지극히하지 못할 뿐이다. 격물은<ref>일역판은 고정연원록 하권 20의 구문을 근거로 格物理至徹底處 앞에 格物是 세 글자를 더하여 번역했다.</ref> 이치를 철저한 지점까지 탐구하는 것이다. 又云: “致知·格物, 只是一事, 非是今日格物, 明日又致知. 格物, 以理言也; 致知, 以心言也.” 恪(64때). '''또 말함: 치지와 격물은 하나일 뿐이니 오늘 격물하고 내일 다시 치지하는 것이 아니다. 격물은 (파악의 대상인) 이치 쪽에서 말한 것이고, 치지는 (파악의 주체인) 마음 쪽에서 말한 것이다. 각(恪)의 기록. (64세) *  15:50 問: “致知, 是欲於事理無所不知; 格物, 是格其所以然之故. 此意通否?” 曰: “不須如此說. 只是推極我所知, 須要就那事物上理會. 致知, 是自我而言; 格物, 是就物而言. 若不格物, 何緣得知. 而今人也有推極其知者, 卻只泛泛然竭其心思, 都不就事物上窮究. 如此, 則終無所止.” 義剛曰: “只是說所以致知, 必在格物.” 曰: “正是如此. 若是極其所知去推究那事物, 則我方能有所知.” 義剛(64이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사물과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고, 격물은 그것이 그러한 이유를 격물하는 것입니다. 이 뜻이 통합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야 하며, 반드시 그 사물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치지는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격물은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격물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이들이 있지만, 단지 막연하게 마음을 다할 뿐이고, 사물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결국 멈출 곳이 없습니다." 의강(義剛)이 말했습니다: "단지 치지를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에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그 사물을 연구하면,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  15:51 致知·格物, 固是合下工夫, 到後亦離這意思不得. 學者要緊在求其放心. 若收拾得此心存在, 已自看得七八分了. 如此, 則本領處是非善惡, 已自分曉. 惟是到那變處方難處, 到那裏便用子細硏究. 若那分曉底道理卻不難見, 只是學者見不親切, 故信不及, 如漆雕開所謂“吾斯之未能信”. 若見得親切, 自然信得及. 看得大學了, 閒時把史傳來看, 見得古人所以處事變處, 儘有短長. 賀孫(62이후). "치지와 격물은 당연히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나중에도 이 의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잘 정리하여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70-80%는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본질적인 곳에서 시비와 선악을 이미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변화의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려움을 느끼며, 그곳에서 세심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명확한 이치는 보기 어렵지 않지만, 학자가 그것을 친근하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칠조개(漆雕開)가 '나는 이것을 아직 믿지 못한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만약 친근하게 느낀다면, 자연히 믿을 수 있습니다. '대학'을 다 보고 나면, 한가할 때 역사서를 보면서 옛사람들이 일을 처리하고 변화를 대하는 데 있어 장단점을 볼 수 있습니다." *  15:52 人之一心, 本自光明. 常提撕他起, 莫爲物欲所蔽, 便將這箇做本領, 然後去格物·致知. 如大學中條目, 便是材料. 聖人敎人, 將許多材料來修治平此心, 令常常光明耳. <按:“修治”字疑.> 伊川云: “我使他思時便思”, 如此方好. 倘臨事不醒, 只爭一晌時, 便爲他引去. 且如我兩眼光𪰻𪰻, 又白日裏在大路上行, 如何會被別人引去草中! 只是我自昏睡, 或暗地裏行, 便被別人胡亂引去耳. 但只要自家常醒得他做主宰, 出乎萬物之上, 物來便應. 易理會底, 便理會得; 難理會底, 思量久之也理會得. 若難理會底便理會不得, 是此心尙昏未明, 便用提醒他. 驤(60·65때). "사람의 마음은 본래 광명합니다. 항상 그것을 일깨워 물욕에 가리지 않도록 하고, 이를 본질로 삼은 후에 격물과 치지를 해야 합니다. '대학'의 조목은 바로 자료입니다. 성인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 마음을 닦고 다스려 항상 광명하게 하려고 가르쳤습니다. 이천(伊川)이 말하길, '내가 그가 생각하게 할 때 생각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일을 당해서 깨어나지 못하면 잠깐 동안에 그에게 끌려갑니다. 예를 들어, 두 눈이 환하게 열리고 대낮에 큰 길을 가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끌려 풀숲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단지 내가 스스로 졸거나 어두운 곳에서 다니면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끌려가는 것입니다. 다만 스스로 항상 깨어서 주체가 되어 만물 위에 나서야 합니다. 사물이 오면 곧 대응하십시오. 이해하기 쉬운 것은 곧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래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는 마음이 아직 어둡고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깨워야 합니다." *  15:53 問“致知在格物”. 曰: “知者, 吾自有此知. 此心虛明廣大, 無所不知, 要當極其至耳. 今學者豈無一斑半點, 只是爲利欲所昏, 不曾致其知. 孟子所謂四端, 此四者在人心, 發見於外. 吾友還曾平日的見其有此心, 須是見得分明, 則知可致. 今有此心而不能致, 臨事則昏惑, 有事則膠擾, 百種病根皆自此生.” 又問: “凡日用之間作事接人, 皆是格物窮理?” 曰: “亦須知得要本. 若不知得, 只是作事, 只是接人, 何處爲窮理!” 어떤 사람이 "치지가 격물에 있다"는 말을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지(知)란, 나에게 본래 있는 지식입니다. 이 마음은 허명(虛明)하고 광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 지극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지금 학자가 어찌 한 조각도 없겠습니까, 단지 이익과 욕심에 가려져서 지식을 이루지 못했을 뿐입니다. 맹자가 이른바 사단(四端)은 이 네 가지가 사람의 마음에 있고, 외부에 발현됩니다. 나의 친구가 일상에서 그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니, 반드시 분명히 보아야 지식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그 마음이 있는데도 이루지 못하면, 일을 당하면 혼란스럽고, 사건이 있으면 어지러우며, 백 가지 병의 뿌리가 모두 여기에서 생깁니다." 또 물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일을 하고 사람을 접하는 것이 모두 격물과 궁리입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또한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을 알지 못하면 단지 일을 하고, 단지 사람을 접할 뿐인데, 어디에서 궁리를 하겠습니까!" *  15:54 致知分數多. 如博學·審問·愼思·明辨, 四者皆致知, 只力行一件是行. 言致, 言格, 是要見得到盡處. 若理有未格處, 是於知之之體尙有未盡. 格物不獨是仁孝慈敬信五者, 此只是大約說耳. 且如說父子, 須更有母在, 更有夫婦在. 凡萬物萬事之理皆要窮. 但窮到底, 無復餘蘊, 方是格物. 大雅(49이후). "치지는 여러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를 들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이 네 가지 모두 치지이며, 단지 한 가지를 힘써 행하는 것은 실행입니다. 치지와 격물은 지극한 곳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치에 격물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아는 것의 본체에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격물은 인(仁), 효(孝), 자(慈), 경(敬), 신(信) 다섯 가지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이것은 대략적으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 자식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어머니도 있어야 하고, 부부도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의 이치는 모두 궁구해야 합니다. 다만 궁구하여 끝에 이르러 남은 것이 없어야 격물입니다." *  15:55 致知·格物, 便是“志於道”. “據於德”, 卻是討得箇匡格子. 義剛(64이후). "치지와 격물은 바로 '도를 지향함'입니다. '덕에 의거함'은 곧 정확히 맞추는 것입니다." *  15:56 格物·致知, 是極粗底事; “天命之謂性”, 是極精底事. 但致知·格物, 便是那“天命之謂性”底事. 下等事, 便是上等工夫. 義剛(64이후). "격물과 치지는 매우 거친 일입니다;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은 매우 정밀한 일입니다. 그러나 치지와 격물은 바로 '천명을 성이라고 한다'는 것의 일입니다. 하등의 일은 상등의 노력이 됩니다." *  15:57 曹又問致知·格物. 曰: “此心愛物, 是我之仁; 此心要愛物, 是我之義; 若能分別此事之是, 此事之非, 是我之智; 若能別尊卑上下之分, 是我之禮. 以至於萬物萬事, 皆不出此四箇道理. 其實只是一箇心, 一箇根柢出來抽枝長葉.” 卓(미상). 조우(曹又)가 치지와 격물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인(仁)이고, 이 마음이 사물을 사랑하려는 것이 나의 의(義)입니다. 만약 이 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지(智)입니다. 만약 존비(尊卑)와 상하(上下)의 구분을 분별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예(禮)입니다. 모든 사물과 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네 가지 도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이는 단지 하나의 마음이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가지와 잎이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  15:58 蔣端夫問: “‘致知在格物.’ 胸中有見, 然後於理無不見.” 曰: “胸中如何便有所見? 譬如嬰兒學行, 今日學步, 明日又步, 積習旣久, 方能行. 天地萬物莫不有理. 手有手之理, 足有足之理, 手足若不擧行, 安能盡其理! 格物者, 欲究極其物之理, 使無不盡, 然後我之知無所不至. 物理卽道理, 天下初無二理.” 震(65때). 장단부(蔣端夫)가 물었습니다: "'치지가 격물에 있다'고 했는데, 가슴 속에 보임이 있은 후에야 이치에 보이지 않는 것이 없습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가슴 속에 어떻게 보임이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기가 걷기를 배우는 것과 같아서, 오늘 걸음을 배우고 내일 또 걸음을 익히며, 습관이 쌓인 후에야 비로소 걸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모든 사물에는 이치가 있습니다. 손에는 손의 이치가 있고, 발에는 발의 이치가 있으며,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그 이치를 다할 수 있겠습니까! 격물이란 그 사물의 이치를 극진히 연구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나의 지식이 다다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됩니다. 물리(物理)는 곧 도리(道理)이며, 천하에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없습니다." *  15:59 問: “知至·意誠, 求知之道, 必須存神索至, 不思則不得誠. 是否?” 曰: “致知·格物, 亦何消如此說. 所謂格物, 只是眼前處置事物, 酌其輕重, 究極其當處, 便是, 亦安用存神索至! 只如吾胸中所見, 一物有十分道理, 若只見三二分, 便是見不盡. 須是推來推去, 要見盡十分, 方是格物. 旣見盡十分, 便是知止.” 震(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지(知至)'와 '의성(意誠)'에서, 지식을 구하는 방법은 반드시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해야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성실함을 얻지 못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치지와 격물도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른바 격물이란 단지 눈앞에서 사물을 처리하면서 그 경중을 따져 그 적합한 곳을 깊이 궁구하는 것입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극진히 탐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 가슴 속에 보이는 것에서 한 사물에 열 가지 이치가 있다면, 세 두 가지를 보았을 뿐이라면 다 보지 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여기저기 밀고 나가서 열 가지를 모두 보아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열 가지를 모두 보았다면, 그것이 지지(知止)입니다." *  15:60 或問: “致知須要誠. 旣是誠了, 如何又說誠意? 致知上本無‘誠’字, 如何强安排‘誠’字在上面說?” “爲學之始, 須在致知. 不致其知, 如何知得! 欲致其知, 須是格物. 格物云者, 要窮到九分九釐以上, 方是格.” 謙(65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치지는 성실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성실하다면, 어떻게 또 '의성(誠意)'을 말합니까? 치지에는 본래 '성(誠)'이라는 글자가 없는데, 어떻게 억지로 '성'을 위에 두고 말합니까?" 주자가 대답했습니다: "학문의 시작은 반드시 치지에 있습니다. 지식을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지식을 이루려면 반드시 격물해야 합니다. 격물이란 구구분구리(九分九釐) 이상으로 궁구해야 비로소 격물입니다." *  15:61 若不格物·致知, 那箇誠意·正心, 方是捺在這裏, 不是自然. 若是格物·致知, 便自然不用强捺. *  15:62 元昭問: “致知·格物, 只作窮理說?” 曰: “不是只作窮理說. 格物, 所以窮理.” 又問: “格物是格物與人. 知物與人之異, 然後可作工夫.” 曰: “若作致知在格物論, 只是胡說! 旣知人與物異後, 待作甚合殺. 格物, 是格盡此物. 如有一物, 凡十瓣, 已知五瓣, 尙有五瓣未知, 是爲不盡. 如一鏡焉, 一半明, 一半暗, 是一半不盡. 格盡物理, 則知盡. 如元昭所云, 物格·知至當如何說?” 子上問: “向見先生答江德功書如此說.” 曰: “渠如何說, 已忘卻.” 子上云: “渠作接物.” 曰: “又更錯.” *  15:63 陳問: “大學次序, 在聖人言之, 合下便都能如此, 還亦須從致知格物做起? 但他義理昭明, 做得來恐易.” 曰: “也如此學. 只是聖人合下體段已具, 義理都曉得, 略略恁地勘驗一過. 其實大本處都盡了, 不用學, 只是學那沒緊要底. 如中庸言: ‘及其至也, 雖聖人有所不知不能焉.’ 人多以至爲道之精妙處. 若是道之精妙處有所不知不能, 便與庸人無異, 何足以爲聖人! 這至, 只是道之盡處, 所不知不能, 是沒緊要底事. 他大本大根元無欠闕, 只是古今事變, 禮樂制度, 便也須學.” 寅. *  15:64 子善問物格. 曰: “物格是要得外面無不盡, 裏面亦淸徹無不盡, 方是不走作.” 恪(64때). <以下物格.> *  15:65 上而無極·太極, 下而至於一草·一木·一昆蟲之微, 亦各有理. 一書不讀, 則闕了一書道理; 一事不窮, 則闕了一事道理; 一物不格, 則闕了一物道理. 須著逐一件與他理會過. 道夫(60이후). *  15:66 叔文問: “格物莫須用合內外否?” 曰: “不須恁地說. 物格後, 他內外自然合. 蓋天下之事, 皆謂之物, 而物之所在, 莫不有理. 且如草木禽獸, 雖是至微至賤, 亦皆有理. 如所謂‘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自家知得這箇道理, 處之而各得其當便是. 且如鳥獸之情, 莫不好生而惡殺, 自家知得是恁地, 便須‘見其生不忍見其死, 聞其聲不忍食其肉’方是. 要之, 今且自近以及遠, 由粗以至精.” 道夫(60이후). 寓錄別出. *  15:67 問: “格物須合內外始得?” 曰: “他內外未嘗不合. 自家知得物之理如此, 則因其理之自然而應之, 便見合內外之理. 目前事事物物, 皆有至理. 如一草一木, 一禽一獸, 皆有理. 草木春生秋殺, 好生惡死. ‘仲夏斬陽木, 仲冬斬陰木’, 皆是順陰陽道理. <砥錄作“皆是自然底道理”.> 自家知得萬物均氣同體, ‘見生不忍見死, 聞聲不忍食肉’, 非其時不伐一木, 不殺一獸, ‘不殺胎, 不殀夭, 不覆巢’, 此便是合內外之理.” 㝢(61이후). 砥錄略. *  15:68 “知至, 謂天下事物之理知無不到之謂. 若知一而不知二, 知大而不知細, 知高遠而不知幽深, 皆非知之至也. 要須四至八到, 無所不知, 乃謂至耳.” 因指燈曰: “亦如燈燭在此, 而光照一室之內, 未嘗有一些不到也.” 履孫(65때). <以下知至.> *  15:69 知至, 謂如親其所親, 長其所長, 而不能推之天下, 則是不能盡之於外; 欲親其所親, 欲長其所長, 而自家裏面有所不到, 則是不能盡之於內. 須是其外無不周, 內無不具, 方是知至. 履孫(65때). *  15:70 子升問: “知止便是知至否?” 曰: “知止就事上說, 知至就心上說. 知止, 知事之所當止; 知至, 則心之知識無不盡.” 木之(68때). *  15:71 知止, 就事上說; 知至, 就心上說, 擧其重而言. 閎祖(59이후). *  15:72 問: “‘致知’之‘致’, ‘知至’之‘至’, 有何分別?” 曰: “上一‘致’字, 是推致, 方爲也. 下一‘至’字, 是已至.” <先著“至”字, 旁著“人”字, 爲“致”. 是人從旁推至.> 節(64이후). *  15:73 格物, 只是就事上理會; 知至, 便是此心透徹. 廣(65이후). *  15:74 格物, 便是下手處; 知至, 是知得也. 德明(44이후). *  15:75 致知未至, 譬如一箇鐵片, 亦割得物事, 只是不如磨得芒刃十分利了, 一鍤便破. 若知得切了, 事事物物至面前, 莫不迎刃而解. 賀孫(62이후). *  15:76 未知得至時, 一似捕龍蛇, 捉虎豹相似. 到知得至了, 卻恁地平平做將去, 然節次自有許多工夫. 到後來絜矩, 雖是自家所爲, 皆足以興起斯民. 又須是以天下之心審自家之心, 以自家之心審天下之心, 使之上下四面都平均齊一而後可. 賀孫(62이후). *  15:77 鄭仲履問: “某觀大學知至, 見得是乾知道理.” 曰: “何用說乾知! 只理會自家知底無不盡, 便了.” 蓋卿(65때). *  15:78 知至, 如易所謂極深; ‘惟深也, 故能通天下之志’, 這一句略相似. 能慮, 便是硏幾; 如所謂‘惟幾也, 故能成天下之務’, 這一句卻相似. 蘷孫(68이후). *  15:79 問: “定·靜·安·慮·得與知至·意誠·心正是兩事, 只要行之有先後. 據先生解安·定·慮·得與知至似一般, 如何?” 曰: “前面只是大綱且如此說, 後面卻是學者用力處.” 去僞(46때). *  15:80 致知, 不是知那人不知底道理, 只是人面前底. 且如義利兩件, 昨日雖看義當爲然, 而卻又說未做也無害; 見得利不可做, 卻又說做也無害; 這便是物未格, 知未至. 今日見得義當爲, 決爲之; 利不可做, 決定是不做, 心下自肯自信得及, 這便是物格, 便是知得至了. 此等說話, 爲無恁地言語, 冊子上寫不得. 似恁地說出, 卻較見分曉. 植(64때). <以下物格·知至.> *  15:81 問: “格物·窮理之初, 事事物物也要見到那裏了?” 曰: “固是要見到那裏. 然也約摸是見得, 直到物格·知至, 那時方信得及.” 㝢(61이후). *  15:82 守約問: “物格·知至, 到曾子悟忠恕於一唯處, 方是知得至否?” 曰: “亦是如此. 只是就小處一事一物上理會得到, 亦是知至.” 賀孫(62이후). *  15:83 或問: “‘物格而后知至’一句, 或謂物格而知便至. 如此, 則與下文‘而后’之例不同.” 曰: “看他文勢, 只合與下文一般說. 但且謂之物格, 則不害其爲一事一物在. 到知, 則雖萬物亦只是一箇知. 故必理無不窮, 然後知方可盡. 今或問中卻少了他這意思.” *  15:84 “大學物格·知至處, 便是凡聖之關. 物未格, 知未至, 如何殺也是凡人. 須是物格·知至, 方能循循不已, 而入於聖賢之域, 縱有敏鈍遲速之不同, 頭勢也都自向那邊去了. 今物未格, 知未至, 雖是要過那邊去, 頭勢只在這邊. 如門之有限, 猶未過得在.” 問: “伊川云‘非樂不足以語君子’, 便是物未格, 知未至, 未過得關否?” 曰: “然. 某嘗謂, 物格·知至後, 雖有不善, 亦是白地上黑點; 物未格, 知未至, 縱有善, 也只是黑地上白點.” 伯羽(61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是學者之關.> *  15:85 格物是夢覺關. <格得來是覺, 格不得只是夢.> 誠意是善惡關. <誠得來是善, 誠不得只是惡.> 過得此二關, 上面工夫卻一節易如一節了. 到得平天下處, 尙有些工夫. 只爲天下闊, 須著如此點檢.” 又曰: “誠意是轉關處.” 又曰: “誠意是人鬼關!” <誠得來是人, 誠不得是鬼.> 蘷孫(68이후). *  15:86 致知·誠意, 是學者兩箇關. 致知乃夢與覺之關, 誠意乃惡與善之關. 透得致知之關則覺, 不然則夢; 透得誠意之關則善, 不然則惡. 致知·誠意以上工夫較省, 逐旋開去, 至於治國·平天下地步愈闊, 卻須要照顧得到. 人傑(51이후). *  15:87 知至·意誠, 是凡聖界分關隘. 未過此關, 雖有小善, 猶是黑中之白; 已過此關, 雖有小過, 亦是白中之黑. 過得此關, 正好著力進步也. 道夫(60이후). *  15:88 “大學所謂‘知至·意誠’者, 必須知至, 然後能誠其意也. 今之學者只說操存, 而不知講明義理, 則此心憒憒, 何事於操存也! 某嘗謂誠意一節, 正是聖凡分別關隘去處. 若能誠意, 則是透得此關; 透此關後, 滔滔然自在去爲君子. 不然, 則崎嶇反側, 不免爲小人之歸也.” “致知所以先於誠意者如何?” 曰: “致知者, 須是知得盡, 尤要親切. 尋常只將‘知至’之‘至’作‘盡’字說, 近來看得合作‘切至’之‘至’. 知之者切, 然後貫通得誠意底意思, 如程先生所謂眞知者是也.” 謨(50이후). *  15:89 論誠意, 曰: “過此一關, 方是人, 不是賊!” 又曰: “過此一關, 方會進.” <一本云: “過得此關, 道理方牢固.”> 方子(59이후). *  15:90 鍾唐傑問意誠. 曰: “意誠只是要情願做工夫, 若非情願, 亦强不得. 未過此一關, 猶有七分是小人.” 蓋卿(65때). *  15:91 意誠·心正, 過得此關, 義理方穩. 不然, 七分是小人在. 又曰: “意不誠底, 是私過; 心不正底, 是公過.” 方子(59이후). *  15:92 深自省察以致其知, 痛加剪落以誠其意. 升卿(62때). <致知·誠意.> *  15:93 知與意皆出於心. 知是知覺處, 意是發念處. 閎祖(59이후). *  15:94 致知, 無毫釐之不盡. 守其所止, 無須臾之或離. 致知, 如一事只知得三分, 這三分知得者是眞實, 那七分不知者是虛僞. 爲善, 須十分知善之可好, 若知得九分, 而一分未盡, 只此一分未盡, 便是鶻突苟且之根. 少間說便爲惡也不妨, 便是意不誠. 所以貴致知, 窮到極處謂之‘致’. 或得於小而失於大, 或得於始而失於終, 或得於此而失於彼, 或得於己而失於人, 極有深淺. 惟致知, 則無一事之不盡, 無一物之不知. 以心驗之, 以身體之, 逐一理會過, 方堅實. 僩(69이후). *  15:95 說爲學次第, 曰: “本末精粗, 雖有先後, 然一齊用做去. 且如致知·格物而後誠意, 不成說自家物未格, 知未至, 且未要誠意, 須待格了, 知了, 卻去誠意. 安有此理! 聖人亦只說大綱自然底次序是如此. 拈著底, 須是逐一旋旋做將去始得. 常說田子方說文侯聽樂處, 亦有病. 不成只去明官, 不去明音, 亦須略去理會始得. 不能明音, 又安能明官! 或以宮爲商, 以角爲徵, 自家緣何知得. 且如‘籩豆之事, 則有司存’, 非謂都不用理會籩豆, 但比似容貌·顔色·辭氣爲差緩耳. 又如官名, 在孔子有甚緊要處? 聖人一聽得郯子會, 便要去學. 蓋聖人之學, 本末精粗, 無一不備, 但不可輕本而重末也. 今人閒坐過了多少日子, 凡事都不肯去理會. 且如儀禮一節, 自家立朝不曉得禮, 臨事有多少利害!” 雉(미상). *  15:96 吳仁甫問: “誠意在致知·格物後, 如何?” 曰: “源頭只在致知. 知至之後, 如從上面①放水來, 已自迅流湍決, 只是臨時又要略略撥剔, 莫令壅滯爾.” 銖(67이후). *  15:97 問: “誠意莫只是意之所發, 制之於初否?” 曰: “若說制, 便不得. 須是先致知·格物, 方始得. 人莫不有知, 但不能致其知耳. 致其知者, 自裏面看出, 推到無窮盡處; 自外面看入來, 推到無去處; 方始得了, 意方可誠. 致知·格物是源頭上工夫. 看來知至便自心正, 不用‘誠意’兩字也得. 然無此又不得, 譬如過水相似, 無橋則過不得. 意有未誠, 也須著力. 不應道知已至, 不用力.” *  15:98 知若至, 則意無不誠. 若知之至, 欲著此物亦留不住, 東西南北中央皆著不得. 若是不誠之人, 亦不肯盡去, 亦要留些子在. 泳(66때). <知至·意誠.> *  15:99 問: “知至到意誠之間, 意自不聯屬. 須是別識得天理人欲分明, 盡去人欲, 全是天理, 方誠.” 曰: “固是. 這事不易言. 須是格物精熟, 方到此. 居常無事, 天理實然, 有纖毫私欲, 便能識破他, 自來點檢慣了. 譬有賊來, 便識得, 便捉得他. 不曾用工底, 與賊同眠同食也不知!” 大雅(49이후). *  15:100 周震亨問知至·意誠, 云: “有知其如此, 而行又不如此者, 是如何?” 曰: “此只是知之未至.” 問: “必待行之皆是, 而後驗其知至歟?” 曰: “不必如此說. 而今說與公是知之未至, 公不信, 且去就格物·窮理上做工夫. 窮來窮去, 末後自家眞箇見得此理是善與是惡, 自心甘意肯不去做, 此方是意誠. 若猶有一毫疑貳底心, 便是知未至, 意未誠, 久後依舊去做. 然學者未能便得會恁地, 須且致其知, 工夫積累, 方會知至.” *  15:101 “‘知至而后意誠’, 須是眞知了, 方能誠意. 知苟未至, 雖欲誠意, 固不得其門而入矣. 惟其胸中了然, 知得路逕如此, 知善之當好, 惡之當惡, 然後自然意不得不誠, 心不得不正.” 因指燭曰: “如點一條蠟燭在中間, 光明洞達, 無處不照, 雖欲將不好物事來, 亦沒安頓處, 自然著它不得. 若是知未至, 譬如一盞燈, 用罩子蓋住, 則光之所及者固可見, 光之所不及處則皆黑暗無所見, 雖有不好物事安頓在後面, 固不得而知也. <炎錄云: “知旣至, 則意可誠. 如燈在中間, 纔照不及處, 便有賊潛藏在彼, 不可知. 若四方八面都光明了, 他便無著身處.”> 所以貴格物, 如佛·老之學, 它非無長處, 但它只知得一路. 其知之所及者, 則路逕甚明, 無有差錯; 其知所不及處, 則皆顚倒錯亂, 無有是處, 緣無格物工夫也.” 問: “物未格時, 意亦當誠.” 曰: “固然. 豈可說物未能格, 意便不用誠! 自始至終, 意常要誠. 如人適楚, 當南其轅. 豈可謂吾未能到楚, 且北其轅! 但知未至時, 雖欲誠意, 其道無由. 如人夜行, 雖知路從此去, 但黑暗, 行不得. 所以要得致知. 知至則道理坦然明白, 安而行之. 今人知未至者, 也知道善之當好, 惡之當惡. 然臨事不如此者, 只是實未曾見得. 若實見得, 自然行處無差.” 僩(69이후). *  15:102 欲知知之眞不眞, 意之誠不誠, 只看做不做如何. 眞箇如此做底, 便是知至·意誠. 道夫(60이후). *  15:103 問“知至而后意誠”. 曰: “知則知其是非. 到意誠實, 則無不是, 無有非, 無一毫錯, 此已是七八分人. 然又不是今日知至, 意亂發不妨, 待明日方誠. 如言孔子‘七十而從心’, 不成未七十心皆不可從! 只是說次第如此. 白居易詩云: ‘行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詩人玩弄至此!” 可學(62때). <璘錄別出.> *  15:104 舜功問: “致知·誠意是如何先後?” 曰: “此是當初一發同時做底工夫, 及到成時, 知至而后意誠耳. 不是方其致知, 則脫空妄語, 猖狂妄行, 及到誠意方始旋收拾也. 孔子‘三十而立’, 亦豈三十歲正月初一日乃立乎! 白樂天有詩: “吾年三十九, 歲暮日斜時. 孟子心不動, 吾今其庶幾! ’此詩人滑稽耳!” 璘(62때). *  15:105 學者到知至意誠, 便如高祖之關中, 光武之河內. 芝(63때). *  15:106 問“‘知至而后意誠’, 故天下之理, 反求諸身, 實有於此. 似從外去討得來”云云. 曰: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厲聲言“弗思”二字.> 又笑曰: “某常說, 人有兩箇兒子, 一箇在家, 一箇在外去幹家事. 其父卻說道在家底是自家兒子, 在外底不是!” 節(64이후). *  15:107 或問: “知至以後, 善惡旣判, 何由意有未誠處?” 曰: “克己之功, 乃是知至以後事. ‘惟聖罔念作狂, 惟狂克念作聖’. 一念纔放下, 便是失其正. 自古無放心底聖賢, 然一念之微, 所當深謹, 纔說知至後不用誠意, 便不是. ‘人心惟危, 道心惟微’, 毫釐間不可不子細理會. 纔說太快, 便失卻此項工夫也.” 錄. *  15:108 問椿: “知極其至, 有時意又不誠, 是如何?” 椿無對. 曰: “且去這裏子細窮究.” 一日, 稟云: “是知之未極其至.” 先生曰: “是則是. 今有二人: 一人知得這是善, 這是惡; 又有一人眞知得這是善當爲, 惡不可爲. 然後一人心中, 如何見得他是眞知處?” 椿亦無以應. 先生笑曰: “且放下此一段, 緩緩尋思, 自有超然見到處.” 椿(59때). *  15:109 誠意, 方能保護得那心之全體. 以下誠意. *  15:110 問“實其心之所發, 欲其一於理而無所雜”. 曰: “只爲一, 便誠; 二, 便雜. ‘如惡惡臭, 如好好色’, 一故也. ‘小人閒居爲不善, 止著其善’, 二故也. 只要看這些便分曉. 二者, 爲是眞底物事, 卻著些假攙放裏, 便成詐僞. 如這一盞茶, 一味是茶, 便是眞. 才有些別底滋味, 便是有物夾雜了, 便是二.” 蘷孫(68이후). *  15:111 意誠後, 推盪得渣滓靈利, 心盡是義理. 閎祖(59이후). <以下意誠.> *  15:112 意誠, 如蒸餅, 外面是白麵, 透裏是白麵. 意不誠, 如蒸餅外面雖白, 裏面卻只是粗麵一般. 閎祖(59이후). *  15:113 “心, 言其統體; 意, 是就其中發處. 正心, 如戒懼不睹不聞; 誠意, 如愼獨.” 又曰: “由小而大. 意小心大.” 閎祖(59이후). <正心·誠意.> *  15:114 康叔臨問: “意旣誠矣, 心安有不正?” 曰: “誠只是實. 雖是意誠, 然心之所發有不中節處, 依舊未是正. 亦不必如此致疑, 大要只在致知格物上. 如物格·知至上鹵莽, 雖見得似小, 其病卻大. 自修身以往, 只是如破竹然, 逐節自分明去. 今人見得似難, 其實卻易. 人入德處, 全在致知·格物. 譬如適臨安府, 路頭一正, 著起草鞋, 便會到. 未須問所過州縣那箇在前, 那箇在後, 那箇是繁盛, 那箇是荒索. 工夫全在致知·格物上.” 謙(65때). <以下論格物·致知·誠意·正心.> *  15:115 問: “心, 本也. 意, 特心之所發耳. 今欲正其心, 先誠其意, 似倒說了.” 曰: “心無形影, 敎人如何撑拄. 須是從心之所發處下手, 先須去了許多惡根. 如人家裏有賊, 先去了賊, 方得家中寧. 如人種田, 不先去了草, 如何下種. 須去了自欺之意, 意誠則心正. 誠意最是一段中緊要工夫, 下面一節輕一節.” 或云: “致知·格物也緊要.” 曰: “致知, 知之始; 誠意, 行之始.” 蘷孫(68이후). *  15:116 或問: “意者心之所發, 如何先誠其意?” 曰: “小底卻會牽動了大底. 心之所以不正, 只是私意牽去. 意才實, 心便自正. 聖賢下語, 一字是一字, 不似今人作文字, 用這箇字也得, 改做那一字也得.” *  15:117 格物者, 知之始也; 誠意者, 行之始也. 意誠則心正, 自此去, 一節易似一節. 拱壽(65때). *  15:118 致知·誠意兩節若打得透時, 已自是箇好人. 其它事一節大如一節, 病敗一節小如一節. 自修(65때). *  15:119 格物者, 窮事事物物之理; 致知者, 知事事物物之理. 無所不知, 知其不善之必不可爲, 故意誠; 意旣誠, 則好樂自不足以動其心, 故心正. 格. *  15:120 格物·致知·正心·誠意, 不可著纖毫私意在其中. <椿錄云: “便不是矣.”> 致知·格物, 十事格得九事通透, 一事未通透, 不妨; 一事只格得九分, 一分不透, 最不可. 凡事不可著箇“且”字. “且”字, 其病甚多. *  15:121 格物·致知·誠意·正心, 雖是有許多節次, 然其進之遲速, 則又隨人資質敏鈍. 履孫(65때). *  15:122 大學於格物·誠意, 都鍛煉成了, 到得正心·修身處, 只是行將去, 都易了. 蘷孫(68이후). *  15:123 致知·誠意·正心, 知與意皆從心出來. 知則主於別識, 意則主於營爲. 知近性, 近體; 意近情, 近用. 端蒙(50이후). *  15:124 敬之問誠意·正心·修身. 曰: “若論淺深意思, 則誠意工夫較深, 正心工夫較淺; 若以小大看, 則誠意較緊細, 而正心·修身地位又較大, 又較施展.” 賀孫(62이후). *  15:125 誠意·正心·修身, 意是指已發處看, 心是指體看. 意是動, 心又是該動靜. 身對心而言, 則心正是內. 能如此修身, 是內外都盡. 若不各自做一節功夫, 不成說我意已誠矣, 心將自正! 則恐懼·好樂·忿懥引將去, 又卻邪了. 不成說心正矣, 身不用管! 則外面更不顧, 而遂心跡有異矣. 須是“無所不用其極”. 端蒙(50이후). *  15:126 或問: “意者, 乃聽命於心者也. 今曰‘欲正其心, 先誠其意’, 意乃在心之先矣.” 曰: “‘心’字卒難摸索. 心譬如水: 水之體本澄湛, 卻爲風濤不停, 故水亦搖動. 必須風濤旣息, 然後水之體得靜. 人之無狀汙穢, 皆在意之不誠. 必須去此, 然後能正其心. 及心旣正後, 所謂好惡哀矜, 與修身齊家中所說者, 皆是合有底事. 但當時時省察其固滯偏勝之私耳.” 僩(69이후). <壯祖錄疑同聞別出.> *  15:127 問: “心者, 身之主; 意者, 心之發. 意發於心, 則意當聽命於心. 今曰‘意誠而后心正’, 則是意反爲心之管束矣, 何也?” 曰: “心之本體何嘗不正. 所以不得其正者, 蓋由邪惡之念勃勃而興, 有以動其心也. 譬之水焉, 本自瑩淨寧息, 蓋因波濤洶湧, 水遂爲其所激而動也. 更是大學次序, 誠意最要. 學者苟於此一節分別得善惡·取舍·是非分明, 則自此以後, 凡有忿懥·好樂·親愛·畏敬等類, 皆是好事. 大學之道, 始不可勝用矣.” 壯祖(미상). *  15:128 問: “心如何正?” 曰: “只是去其害心者.” 端蒙(50이후). *  15:129 或問正心修身. 曰: “今人多是不能去致知處著力, 此心多爲物欲所陷了. 惟聖人能提出此心, 使之光明, 外來底物欲皆不足以動我, 內中發出底又不陷了.” 祖道(68때). *  15:130 心纔不正, 其終必至於敗國亡家. 僩(69이후). *  15:131 “誠意正心”章, 一說能誠其意, 而心自正; 一說意誠矣, 而心不可不正. 問: “修身齊家亦然否?” 曰: “此是交會處, 不可不看.” 又曰: “誠意以敬爲先.” 泳(66때). *  15:132 或問: “正心·修身, 莫有淺深否?” 曰: “正心是就心上說, 修身是就應事接物上說. 那事不自心做出來! 如修身, 如絜矩, 都是心做出來. 但正心, 卻是萌芽上理會. 若修身與絜矩等事, 都是各就地頭上理會.” *  15:133 毅然問: “‘家齊, 而后國治, 天下平.’ 如堯有丹朱, 舜有瞽瞍, 周公有管蔡, 卻能平治, 何也?” 曰: “堯不以天下與丹朱而與舜, 舜能使瞽瞍不格姦, 周公能致辟于管蔡, 使不爲亂, 便是措置得好了. 然此皆聖人之變處. 想今人家不解有那瞽瞍之父, 丹朱之子, 管蔡之兄, 都不須如此思量, 且去理會那常處.” 淳(61·70때). *  15:134 “壹是”, 一切也. 漢書平帝紀“一切”, 顔師古注: “猶如以刀切物, 取其整齊.” 泳(66때). *  15:135 李從之問: “‘壹是皆以修身爲本’, 何故只言修身?” 曰: “修身是對天下國家說. 修身是本, 天下國家是末. 凡前面許多事, 便是理會修身. ‘其所厚者薄, 所薄者厚’, 又是以家對國說.” 㽦(59때). *  15:136 問: “大學解: ‘所厚, 謂家.’ 若誠意正心, 亦可謂之厚否?” 曰: “不可. 此只言先後緩急. 所施則有厚薄.” 節(64이후). *  15:137 問: “大學之書, 不過明德·新民二者而已. 其自致知·格物以至平天下, 乃推廣二者, 爲之條目以發其意, 而傳意則又以發明其條目者. 要之, 不過此心之體不可不明, 而致知·格物·誠意·正心, 乃其明之之工夫耳.” 曰: “若論了得時, 只消‘明明德’一句便了, 不用下面許多. 聖人爲學者難曉, 故推說許多節目. 今且以明德·新民互言之, 則明明德者, 所以自新也; 新民者, 所以使人各明其明德也. 然則雖有彼此之間, 其爲欲明之德, 則彼此無不同也. 譬之明德卻是材料,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 卻是下工夫以明其明德耳. 於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之際, 要得常見一箇明德隱然流行于五者之間, 方分明. 明德如明珠, 常自光明, 但要時加拂拭耳. 若爲物欲所蔽, 卽是珠爲泥涴, 然光明之性依舊自在.” 大雅(49이후). <以下總論綱領·條目.> *  15:138 大學“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 此三箇是大綱, 做工夫全在此三句內. 下面知止五句是說效驗如此. 上面是服藥, 下面是說藥之效驗. 正如說服到幾日效如此, 又服到幾日效又如此. 看來不須說效亦得, 服到日子滿時, 自然有效. 但聖人須要說到這田地, 敎人知“明明德”三句. 後面又分析開八件: 致知至修身五件, 是明明德事; 齊家至平天下三件, 是新民事. 至善只是做得恰好. 後面傳又立八件, 詳細剖析八件意思. 大抵閑時喫緊去理會, 須要把做一件事看, 橫在胸中, 不要放下. 若理會得透徹, 到臨事時, 一一有用處. 而今人多是閑時不喫緊理會, 及到臨事時, 又不肯下心推究道理, 只說且放過一次亦不妨. 只是安于淺陋, 所以不能長進, 終於無成. 大抵是不曾立得志, 枉過日子. 且如知止, 只是閑時窮究得道理分曉, 臨事時方得其所止. 若閑時不曾知得, 臨事如何了得. 事親固是用孝, 也須閑時理會如何爲孝, 見得分曉, 及到事親時, 方合得這道理. 事君亦然. 以至凡事都如此. 又問: “知止, 是萬事萬物皆知得所止, 或只指一事而言?” 曰: “此徹上徹下, 知得一事, 亦可謂之知止.” 又問: “上達天理, 便是事物當然之則至善處否?” 曰: “只是合禮處, 便是天理. 所以聖人敎人致知·格物, 亦只要人理會得此道理.” 又問: “大學表裏精粗如何?” 曰: “自是如此. 粗是大綱, 精是裏面曲折處.” 又曰: “外面事要推闡, 故齊家而后治國, 平天下; 裏面事要切己, 故修身·正心, 必先誠意. 致知愈細密.” 又問眞知. 曰: “曾被虎傷者, 便知得是可畏. 未曾被虎傷底, 須逐旋思量箇被傷底道理, 見得與被傷者一般, 方是.” 明作(63이후). *  15:139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大學中大抵虛字多. 如所謂“欲”·“其”·“而后”, 皆虛字; “明明德·新民·止於至善”, “致知·格物·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是實字. 今當就其緊要實處著工夫. 如何是致知·格物以至于治國·平天下, 皆有節目, 須要一一窮究著實, 方是. 道夫(60이후). *  15:140 自“欲明明德於天下”至“先致其知”, 皆是隔一節, 所以言欲如此者, 必先如此. “致知在格物”, 知與物至切近, 正相照在. 格物所以致知, 物才格, 則知已至, 故云在, 更無次第也. 閎祖(59이후). *  15:141 大學“明明德於天下”以上, 皆有等級. 到致知格物處, 便較親切了, 故文勢不同, 不曰“致知者先格其物”, 只曰“致知在格物”也. “意誠而后心正”, 不說是意誠了便心正, 但無詐僞便是誠. 心不在焉, 便不正. 或謂但正心, 不須致知·格物, 便可以修身·齊家, 卻恐不然. 聖人敎人窮理, 只道是人在善惡中, 不能分別得, 故善或以爲惡, 惡或以爲善; 善可以不爲不妨, 惡可以爲亦不妨. 聖人便欲人就外面攔截得緊, 見得道理分明, 方可正得心, 誠得意. 不然, 則聖人告顔子, 如何不道非禮勿思, 卻只道勿視聽言動? 如何又先道“居處恭, 執事敬”, 而後“與人忠”?“敬”字要體得親切, 似得箇“畏”字. <銖記先生嘗因諸生問敬宜何訓, 曰: “是不得而訓也. 惟‘畏’庶幾近之.” 銖云: “以‘畏’訓‘敬’, 平淡中有滋味.” 曰: “然.”> 榦(미상). *  15:142 “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至致知在格物.” “欲”與“先”字, 謂如欲如此, 必先如此, 是言工夫節次. 若“致知在格物”, 則致知便在格物上. 看來“欲”與“先”字, 差慢得些子, “在”字又緊得些子. 履孫(65때). *  15:143 大學言‘物格而后知至, 止天下平.’ 聖人說得寬, 不說道能此卽能彼, 亦不說道能此而後可學彼. 只是如此寬說, 後面逐段節節更說, 只待人自看得如何. 振(미상). *  15:144 蔡元思問: “大學八者條目, 若必待行得一節了, 旋進一節, 則沒世窮年, 亦做不徹. 看來日用之間, 須是隨其所在而致力: 遇著物來面前, 便用格; 知之所至, 便用致; 意之發, 便用誠; 心之動, 便用正; 身之應接, 便用修; 家便用齊; 國便用治, 方得.” 曰: “固是. 他合下便說‘古之欲明明德於天下’, 便是就這大規模上說起. 只是細推他節目緊要處, 則須在致知·格物·誠意迤邐做將去”云云. 又曰: “有國家者, 不成說家未齊, 未能治國, 且待我去齊得家了, 卻來治國; 家未齊者, 不成說身未修, 且待我修身了, 卻來齊家! 無此理. 但細推其次序, 須著如此做. 若隨其所遇, 合當做處, 則一齊做始得.” 僩(69이후). *  15:145 大學自致知以至平天下, 許多事雖是節次如此, 須要一齊理會. 不是說物格後方去致知, 意誠後方去正心. 若如此說, 則是當意未誠, 心未正時有家也不去齊, 如何得! 且如“在下位不獲乎上”數句, 意思亦是如此. 若未獲乎上, 更不去治民, 且一向去信朋友; 若未信朋友時, 且一向去悅親, 掉了朋友不管. 須是多端理會, 方得許多節次. 聖人亦是略分箇先後與人知, 不是做一件淨盡無餘, 方做一件. 若如此做, 何時得成! 又如喜怒上做工夫, 固是; 然亦須事事照管, 不可專於喜怒. 如易損卦“懲忿窒慾”, 益卦“見善則遷, 有過則改”, 似此說話甚多. 聖人卻去四頭八面說來, 須是逐一理會. 身上許多病痛, 都要防閑. 明作(63이후). *  15:146 問: “知至了意便誠, 抑是方可做誠意工夫?” 曰: “也不能恁地說得. 這箇也在人. 一般人自便能如此. 一般人自當循序做. 但知至了, 意誠便易. 且如這一件事知得不當如此做, 末梢又卻如此做, 便是知得也未至. 若知得至時, 便決不如此. 如人旣知烏喙之不可食, 水火之不可蹈, 豈肯更試去食烏喙, 蹈水火! 若是知得未至時, 意決不能誠.” 問: “知未至之前, 所謂愼獨, 亦不可忽否?” 曰: “也不能恁地說得. 規模合下皆當齊做. 然這裏只是說學之次序如此, 說得來快, 無恁地勞攘, 且當循此次序. 初間‘欲明明德於天下’時, 規模便要恁地了. 旣有恁地規模, 當有次序工夫; 旣有次序工夫, 自然有次序功效: ‘物格, 而后知至; 知至, 而后意誠; 意誠, 而后心正; 心正, 而后身修; 身修, 而后家齊; 家齊, 而后國治; 國治, 而后天下平.’ 只是就這規模恁地廣開去, 如破竹相似, 逐節恁地去.” 㝢(61이후). *  15:147 說大學次序, 曰: “致知·格物, 是窮此理; 誠意·正心·修身, 是體此理; 齊家·治國·平天下, 只是推此理. 要做三節看.” 雉(미상). *  15:148 大學一篇卻是有兩箇大節目: 物格·知至是一箇, 誠意·修身是一箇. 才過此二關了, 則便可直行將去. 泳(66때). *  15:149 物格·知至, 是一截事; 意誠·心正·身修, 是一截事; 家齊·國治·天下平, 又是一截事. 自知至交誠意, 又是一箇過接關子; 自修身交齊家, 又是一箇過接關子. 賀孫(62이후). *  15:150 自格物至修身, 自淺以及深; 自齊家至平天下, 自內以及外. 敬仲(62때). *  15:151 或問: “格物·致知, 到貫通處, 方能分別取舍. 初間亦未嘗不如此, 但較生澀勉强否?” 曰: “格物時是窮盡事物之理, 這方是區處理會. 到得知至時, 卻已自有箇主宰, 會去分別取舍. 初間或只見得表, 不見得裏; 只見得粗, 不見得精. 到知至時, 方知得到; 能知得到, 方會意誠, 可者必爲, 不可者決不肯爲. 到心正, 則胸中無些子私蔽. 洞然光明正大, 截然有主而不亂, 此身便修, 家便齊, 國便治, 而天下可平.” 賀孫(62이후). *  15:152 格物·致知, 比治國·平天下, 其事似小. 然打不透, 則病痛卻大, 無進步處.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這裏縱有未盡處, 病痛卻小. 格物·致知, 如“知及之”; 正心·誠意, 如“仁能守之”. 到得“動之不以禮”處, 只是小小未盡善. 蓋卿(65때). <方子錄云: “格物·誠意, 其事似乎小. 然若打不透, 卻是大病痛. 治國·平天下, 規模雖大, 然若有未到處, 其病卻小, 蓋前面大本領已自正了. 學者若做到物格·知至處, 此是十分以上底人.”> *  15:153 問: “看來大學自格物至平天下, 凡八事, 而心是在當中, 擔著兩下者. 前面格物·致知·誠意, 是理會箇心; 後面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心之功用.” 曰: “據他本經, 去修身上截斷. 然身亦是心主之.” 士毅(미상). *  15:154 自明明德至於治國·平天下, 如九層寶塔, 自下至上, 只是一箇塔心. 四面雖有許多層, 其實只是一箇心. 明德·正心·誠意·修身, 以至治國·平天下, 雖有許多節次, 其實只是一理. 須逐一從前面看來, 看後面, 又推前面去. 故曰“知至而後意誠, 意誠而后心正”也. 子蒙(미상). *  15:155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至‘致知在格物’, 詳其文勢, 似皆是有爲而後爲者.” 曰: “皆是合當爲者. 經文旣自明德說至新民, 止於至善, 下文又卻反覆明辨, 以見正人者必先正己. 孟子曰: ‘天下之本在國, 國之本在家, 家之本在身.’ 亦是此意.” 道夫(60이후). *  15:156 問: “‘古之欲明明德於天下’, 至‘致知在格物’, 向疑其似於爲人. 今觀之, 大不然. 蓋大人, 以天下爲度者也. 天下苟有一夫不被其澤, 則於吾心爲有慊; 而吾身於是八者有一毫不盡, 則亦何以明明德於天下耶! 夫如是, 則凡其所爲, 雖若爲人, 其實則亦爲己而已.” 先生曰: “爲其職分之所當爲也.” 道夫(60이후). [[파일:KakaoTalk 20240605 154354490.jpg|섬네일|주자어류 15-156 그림]] <ref>중화서국본 314쪽의 그림을 참조할 것</ref> * ivp56ccap4rgi76xihut98lvvaw5v09 색인: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pdf 252 91953 347558 340551 2024-12-20T06:30:32Z Aspere 5453 347558 proofread-index text/x-wiki {{:MediaWiki:Proofreadpage_index_template |종류=book |제목=[[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 |언어=ko |권= |저자=大韓聖書公會 |번역자= |편집자= |삽화가= |학교= |출판사= |위치= |연도=1956 |정렬 키= |ISBN= |OCLC= |LCCN= |BNF_ARK= |ARC= |출처=pdf |그림=1 |진행 상황=C |쪽별 색인=<pagelist 1=표지 2=용어 3=1 32=뒷표지 /> |목차= |너비= |CSS= |머리말= |꼬리말= }} [[분류:현대 한글 문헌 프로젝트]] nr9s9ystwjnxxbgqjdnmm5pdcpv0rc8 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 0 92216 347557 343874 2024-12-20T06:29:53Z Aspere 5453 347557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세상의빛 | 다른 표기 = | 부제 = 마태의 기록한 복음 | 부제 다른 표기 = | 저자 = 대한성서공회 | 편집자 = | 역자 = | 이전 = | 다음 = | 설명 = 1956년 출판한 [[마태오의 복음서]] 번역본으로 여러 사진을 같이 수록하였다. }} {{기본 레이아웃|레이아웃 2}} <pages index="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pdf" from=1 to=32 /> == 각주 == {{각주}}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업무상}} {{PD-미국-미표시}} [[분류:1956년 작품]] [[분류:성경]] lbxxin9l34hils0hcrk49a37fm1ic4o 위키문헌:관리자 선거/Aspere/2 4 94620 347542 347498 2024-12-20T03:04:31Z Jeebeen 7783 /* 의견 */ 답변 347542 wikitext text/x-wiki === [[위키문헌:관리자 선거/Aspere|Aspere]] === {{사용자7|Aspere}} * '''추천인''': 자천 관리자 임기 종료(2025/01/01)가 임박함에 따라 연장하고자 관리자 선거에 재출마합니다. [[위키문헌:관리자 선거/Aspere|지난번 선거 문서]]와 [https://xtools.wmcloud.org/ec/ko.wikisource.org/Aspere 관리를 포함한 활동 기록]을 참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용자:Aspere|Aspere]] ([[사용자토론:Aspere|토론]]) 2024년 12월 12일 (목) 02:05 (KST) ==== 질문 ==== * ==== 의견 ==== * {{의견}} 위키문헌의 공동체 규모도 충분하다고 생각되는데 위키백과처럼 상임관리자 해 주시면 안 되나요? 개인적으로 이렇게 주기적으로 공동체의 합의를 얻는 것도 조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요. --[[사용자:Jeebeen|Jeebeen]] ([[사용자토론:Jeebeen|토론]]) 2024년 12월 19일 (목) 12:45 (KST) :: 저도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습니다만... 현재 문헌에 사무관이 없어서 메타에 권한 신청을 일일이 해야 하는데 거기서 항상 기간을 지정해서 부여해줍니다. 현실적으로 메타에서 요구하는 사무관을 둘 수 있는 커뮤니티 조건(10~15명)은 달성하지 못하고 있어서 현재로서는 어떻게 방법이 없습니다. --[[사용자:Aspere|Aspere]] ([[사용자토론:Aspere|토론]]) 2024년 12월 19일 (목) 14:16 (KST) :: 다시 확인해보았는데 일단 [[m:Steward requests/Permissions/Minimum voting requirements#Permanent Administrator|메타의 상임관리자 기준]]은 만족할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신청할 때 언급은 해 보겠습니다. 기대는 안 하긴 하는데... --[[사용자:Aspere|Aspere]] ([[사용자토론:Aspere|토론]]) 2024년 12월 19일 (목) 14:24 (KST) :::"자신감있게 신청하십시오" --[[사용자:Jeebeen|Jeebeen]] ([[사용자토론:Jeebeen|토론]]) 2024년 12월 20일 (금) 12:04 (KST) ==== 투표 ==== ===== 찬성 ===== # {{찬성}} 그동안의 활동을 검토했을 때 충분히 신뢰도가 높습니다. --<span style="font-size:12px;">𝑬𝒖𝒆𝒓 </span>[[사용자:Raccoon Dog|<span style="color:#E00000;">𝐏𝐚𝐮𝐥𝐢</span>]] ([[사용자토론:Raccoon Dog|talk]]) 2024년 12월 12일 (목) 13:08 (KST) # {{찬성}} 반대할 사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용자:YellowTurtle9|YellowTurtle9]] ([[사용자토론:YellowTurtle9|토론]]) 2024년 12월 15일 (일) 03:56 (KST) # {{찬성}} --[[사용자:Namoroka|Namoroka]] ([[사용자토론:Namoroka|토론]]) 2024년 12월 18일 (수) 12:03 (KST) # {{찬성}} [[사용자:ZornsLemon|Z.Lemon]] ([[사용자토론:ZornsLemon|토론]]) 2024년 12월 18일 (수) 18:35 (KST) # {{찬성}} --[[사용자:Jeebeen|Jeebeen]] ([[사용자토론:Jeebeen|토론]]) 2024년 12월 19일 (목) 12:45 (KST) ===== 반대 ===== # ===== 중립/보류 ===== # ===== 무효 ===== * ==== 결과 ==== <!-- 선거가 종료되기 전까지는 이 틀을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관리자 선거 결과|찬성= |반대= |중립=}}--> 3yrjbgcxjlhwcc23e0u8q9fpr33m9zz 347549 347542 2024-12-20T06:07:59Z 오래오래 17631 /* 찬성 */ 347549 wikitext text/x-wiki === [[위키문헌:관리자 선거/Aspere|Aspere]] === {{사용자7|Aspere}} * '''추천인''': 자천 관리자 임기 종료(2025/01/01)가 임박함에 따라 연장하고자 관리자 선거에 재출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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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 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 〔27:1-3〕 == {{머리글자 장식|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 유다의 죽음 〔27:3-10〕 ==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 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ref>스가랴 11:12-13, 예레미야 32:6-15, 18:2-3</ref>저희가 그 정가된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파일:세상의빛 사진 64.jpg|400px|right|thumb|안토니아 망대안 마당에 매우 큰 돌들로 로마인이 깐 박석이 있는데 이를 리도스추로톤이라 한다. 이것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던 브리도리움이었으리라고 한다.]] ==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함 〔27:11-14〕 ==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며 총독이 물어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 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 예수 혹은 바라바 〔27:15-26〕 == 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총독이 재판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라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히워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히워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파일:세상의빛 사진 65.jpg|200px|right|thumb|어떤 돌에는 아직도 안토니아보루에 주둔하던 로마군인들이 장난하던 꼬누판이 그려져 있다.]] == 병정들이 예수를 희롱함 〔27:27-31〕 ==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no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5305wjzb751vddoyhx9suzknwzatexu 국회본회의 회의록 (한글 텍스트화)/제15대 0 94863 347544 347518 2024-12-20T06:00:25Z Aspere 5453 347544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 회의록 | 부제 = 제15대국회 | 설명 = [[w:대한민국 제15대 국회|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 회의록 중 제209회 회의까지를 국회사무처에서 한글로 변환한 것. {{위키백과|대한민국 제15대 국회}} | 이전 = [[../제14대|제14대]] }} {{참고|국회본회의 회의록/제15대}} {{보조 목차|title=회기별 분류 |comment= | * [[/제179회|제179회]] (1996년 6월 5일 ~ 1996년 7월 4일) * [[/제180회|제180회]] (1996년 7월 8일 ~ 1996년 7월 27일) * [[/제181회|제181회]] (1996년 9월 10일 ~ 1996년 12월 18일) (정기회) * [[/제182회|제182회]] (1996년 12월 23일 ~ 1997년 1월 21일) * [[/제183회|제183회]] (1997년 2월 17일 ~ 1997년 3월 18일) * [[/제184회|제184회]] (1997년 7월 1일 ~ 1997년 7월 30일) * [[/제185회|제185회]] (1997년 9월 10일 ~ 1997년 12월 18일) (정기회) * [[/제186회|제186회]] (1997년 12월 22일 ~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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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 회의록. {{위키백과|대한민국 제16대 국회}} | 이전 = [[../제15대|제15대]] | 다음 = [[../제17대|제17대]] }} {{보조 목차|title=회기별 분류 |comment= | * [[/제212회|제212회]] (2000년 6월 5일 ~ 2000년 7월 4일) * [[/제213회|제213회]] (2000년 7월 5일 ~ 2000년 7월 25일) * [[/제214회|제214회]] (2000년 7월 31일 ~ 2000년 8월 29일) * [[/제215회|제215회]] (2000년 9월 1일 ~ 2000년 12월 9일) * [[/제216회|제216회]] (2000년 12월 11일 ~ 2001년 1월 9일) * [[/제217회|제217회]] (2001년 1월 10일 ~ 2001년 2월 8일) * [[/제218회|제218회]] (2001년 2월 9일 ~ 2001년 2월 28일) * [[/제219회|제219회]] (2001년 3월 2일 ~ 2001년 3월 31일) * [[/제220회|제220회]] (2001년 4월 2일 ~ 2001년 4월 30일) * [[/제221회|제221회]] (2001년 5월 2일 ~ 2001년 5월 31일) * [[/제222회|제222회]] (2001년 6월 4일 ~ 2001년 6월 30일) * [[/제223회|제223회]] (2001년 7월 6일 ~ 2001년 8월 4일) * [[/제224회|제224회]] (2001년 8월 6일 ~ 2001년 8월 31일) * [[/제225회|제225회]] (2001년 9월 1일 ~ 2001년 12월 9일) * [[/제226회|제226회]] (2001년 12월 14일 ~ 2002년 1월 12일) * [[/제227회|제227회]] (2002년 2월 1일 ~ 2002년 2월 28일) * [[/제228회|제228회]] (2002년 3월 4일 ~ 2002년 4월 2일) * [[/제229회|제229회]] (2002년 4월 3일 ~ 2002년 5월 2일) * [[/제230회|제2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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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오래오래" /></noinclude>[[파일:세상의빛 사진 66.jpg|500px|center|thumb|서북쪽에서 예루살렘 동북쪽 모퉁이와 감람산을 바라봄. 어떤 이들은 전경(前景)에 갈바리가 있다 함.]] == 십자가에 못 박히심 〔27:32-44〕 ==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 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파일:세상의빛 사진 67.jpg|left|thumb|성묘 예배당의 한 부분인 고통의 기도실로 올라가는 층층대]] == 예수의 죽음 〔27:45-50〕 ==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 하더니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릐 엘릐 라마 사박다늬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 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그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 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파일:세상의빛 사진 68.jpg|right|thumb|옛 예루살렘 거리를 걸어 가는 두 여인]] == 성전 휘장이 찢어짐 〔27:51-56〕 ==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한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 예수의 장사 〔27:57-61〕 ==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리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젿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문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no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98byf28u9cukjx34cv37ums3lhx0jup 페이지: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pdf/31 250 94872 347552 347534 2024-12-20T06:18:38Z Aspere 5453 347552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오래오래" /></noinclude>[[파일:세상의빛 사진 69.jpg|right|thumb|예루살렘성 북쪽에 있는 동산안에 바위를 파고 만든 무덤]] == 무덤을 지킴 〔27:62-66〕 == 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에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너희가 파수순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파일:세상의빛 사진 70.jpg|right|thumb|그리스도를 묻었다고 하는 자리에 지은 성묘예배당. 전면은 십자군시대에 된것.]] == 부활 하심 〔28:1-10〕 == {{머리글자 장식|안}}식일이 다하여 가고 안식후 첫 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 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각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 할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 파숫군의 보고 〔28:11-15〕 == 여자들이 갈제 파숫군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론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28:16-20〕 ==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nop}}<noinclude><references/></noinclude> qh0g3qbm5s49x81471gkxswhb8iue4q 페이지:세상의빛 마태의 기록한 복음.pdf/32 250 94873 347553 347536 2024-12-20T06:24:41Z Aspere 5453 347553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오래오래" /></noinclude>{|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 style="width: 100%; text-align: center; margin: 0;" |- | colspan="2" |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작게|마태 4:16}} |-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1.jpg]]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2.jpg]] |- | 산위에 세운 도시, 페싸드 || 제 일 세기의 로마인의 등잔 |- | colspan="2" | 산위에 있는 성이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작게|마태 5:14-15}} |-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3.jpg]]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4.jpg]] |- | 예루살렘에서 발견한 상고 등경 || 로마에 있는 유대인의 무덤에 있는 등경(주후2세기혹3세기) |- | colspan="2" |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작게|마태 5:16}} |}<noinclude><references/></noinclude> 5a4cabm4amqqmbjmalpviq5960fr20n 347554 347553 2024-12-20T06:25:59Z Aspere 5453 347554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오래오래" /></noinclude>{|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 style="width: 100%; text-align: center; margin: 0;" |- | colspan="2" |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작게|마태 4:16}} |-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1.jpg|200px]]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2.jpg|200px]] |- | 산위에 세운 도시, 페싸드 || 제 일 세기의 로마인의 등잔 |- | colspan="2" | 산위에 있는 성이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작게|마태 5:14-15}} |-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3.jpg|200px]] || [[파일:세상의빛 뒷표지 4.jpg|200px]] |- | 예루살렘에서 발견한 상고 등경 || 로마에 있는 유대인의 무덤에 있는 등경(주후2세기혹3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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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이 완료된 옛한글 문헌을 보고 옛한글을 포함하여 원문 그대로 타이핑하는 활동입니다. 옛한글로 작성된 문헌을 텍스트화하여 옛한글 문헌의... 347562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 [[파일:언간독.djvu|page=16|300px|center]] <center><small>[[언간독]], 국립중앙도서관 소장</small></center> <p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0.9rem;">'''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는 스캔이 완료된 옛한글 문헌을 보고 옛한글을 포함하여 원문 그대로 타이핑하는 활동입니다. 옛한글로 작성된 문헌을 텍스트화하여 옛한글 문헌의 공유, 연구에 기여해 보세요!</p> <p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0.9rem;">활동에 참여하시고 일정 분량 이상의 기여를 하신 봉사자께는 소정의 봉사 시간을 부여합니다.</p> ==개요== * 운영자: [[w:백:협회|사단법인 한국 위키미디어 협회]] * 모집 기간: 2024년 12월 -2025년 1월 * 활동 기간: 2025년 1월 - 3월 * 선발 인원: 20명 내외 * 참여 대상: 옛한글로 작성된 문헌에 관심이 있는 성인 ==일정== {| class="wikitable" ! 오리엔테이션 | '''주의''': 오프라인과 온라인 오리엔테이션 중 하나에 필수 참여 (이전 봉사 참여자는 면제 가능) * 온라인: 2025년 1월 <!-- * 오프라인: 5월 17일 금요일 16:30 또는 5월 18일 토요일 15:00 /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도서관 지하2층 문화소강당 * 온라인: 5월 19일 일요일 21:00 (KST) --> |- ! 봉사 활동 | 2024년 12월 중 |- ! 활동 검토 | 2025년 4월 |- ! 활동 시간 부여 | 2025년 5월 |} == 활동 == *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문헌목록|문헌 목록]]'''에 제시된 옛한글 문헌 중 하나를 선택하여 페이지별로 내용을 타자합니다. * 문헌 하나를 마무리 지은후 운영자에게 연락하여 새 문헌을 선택하고 활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 봉사시간 부여 == * 활동 시간대: 온라인 봉사이기 때문에 정해진 활동 시간 없음 * 봉사 시간 부여 (행정안전부 1365 자원봉사 포털과 연계됨) ** 1일 최대 4시간, 총 60시간 * 문헌의 난이도에 따라 아래와 같이 봉사 시간 부여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규칙|규칙]]''' 참고) ** 난이도 상 - 3,000 바이트 당 1시간 ** 난이도 중 - 4,000 바이트 당 1시간 ** 난이도 하 - 8,000 바이트 당 1시간 보다 자세한 산정 기준은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규칙|봉사활동 규칙]]'''을 참고하세요. ==주의 사항== * 반드시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해야 봉사 시간을 인정합니다. (이전 봉사 참여자는 면제 가능) * 한국어 위키문헌의 [[위키문헌:정책과 지침|정책과 지침]]을 준수하여야 하며, 활동 중 차단될 시 봉사 시간은 인정되지 않습니다. * 봉사 활동 도중에 시간을 입력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 ==참가 신청== * 문화체육관광부 '''[문화품앗이]'''를 통해 신청 (회원가입 후 로그인 필수) * 신청방법 참고: [https://csv.culture.go.kr/cmm/fms/FileDown.do?atchFileId=FILE_000000000012375&fileSn=0 문화품앗이 이용가이드] 11페이지 --> [[분류: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 2024년 상반기| ]] 5ydhofmbuz79lwqn7eux5x7lzzgdkas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문헌목록 4 94877 347563 2024-12-20T08:23:21Z Motoko (WMKR) 14454 새 문서: == 작업할 문헌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class="wikitable" |- ! 난이도 !! 문헌 이름 !! 분야 !! 원문 파일 !! 선택 여부 |- | 상 || 정속언해 || 윤리서 || [[색인:正俗諺解.djvu]] || |- | 상 || 천문학 || 과학 || [[색인:天文學.djvu]] ||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class="wikitable" |- ! 난이도 !! 문헌 이름 !! 분야 !! 원문 파일 !! 선택 여부 |- |... 347563 wikitext text/x-wiki == 작업할 문헌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class="wikitable" |- ! 난이도 !! 문헌 이름 !! 분야 !! 원문 파일 !! 선택 여부 |- | 상 || 정속언해 || 윤리서 || [[색인:正俗諺解.djv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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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기준이 다릅니... 347571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__NOTOC__ == 문헌 선택 == 옛한글 봉사활동에서 첫번째로 작업할 문헌을 선택할 때는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주최자와 연락을 통해 미리 논의하여 결정합니다. 먼저 신청하신 분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의 문헌을 완료한 후, 새 문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난이도 별로 봉사시간 부여 기준이 다릅니다. 참가자 분의 역량에 맞는 단계를 선택하세요. ; 난이도 안내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한문원문 문장과 한글언해 문장이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한문 1자와 한글 1자가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옛한글만으로 기록된 문헌 == 활동 인정 기준 ==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가 같이 있는 경우,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를 모두 타자한 경우'''에만 유효한 활동으로 인정합니다. * 예) 한문 원문 50자, 한글 언해 200자가 번갈아가면서 있는 경우, 둘다 작성해야 인정. * 한자 한글이 섞여있는 문헌에서 한글만 골라 작성한 경우,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에 해당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간주하여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작성중인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문자''가 있는 경우, 검정색 사각형으로 표시해주세요. ( ■ ) * 사각형으로 표시한 문자나 오타는 한 글자당 3바이트로 계산해서 기여 바이트 계산에서 차감합니다. 옛한글 깨짐 현상 방지를 위해 모든 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모든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뒤에 '''<nowiki>{{옛한글쪽 끝}}</nowiki>'''을 입력합니다. * 모든 문자가 한자라면 생략가능합니다. *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및 '''<nowiki>{{옛한글쪽 끝}}</nowiki>''' 틀은 기여산정시 유효한 바이트로 계산됩니다. == 봉사시간 기준 == 하루 최대 4시간, 최대 60시간까지 인정 ;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span style="color:#CC0000">3,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span style="color:#CC9900">4,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span style="color:#336600">8,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봉사시간 환산 * '''[[특수:내기여]]'''에서 자신이 기여한 페이지의 바이트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표시되는 바이트를 기준으로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 전날 기여한 바이트에서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에 따라 요구되는 바이트 수<ref>즉 상, 중, 하 각각 3,000, 4,000, 8,000 바이트</ref>만큼 차감되면서 1시간씩 부여받고, 남은 바이트는 다음 날로 넘어갑니다. * <span style="color: #ff0000;">1일 한도<ref>상, 중, 하 각각 12,000, 16,000, 24,000 바이트</ref>를 넘겼다면 4시간만 부여받고, 초과된 바이트는 다음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span> * 여러 날에 걸쳐서 기여하셨더라도 기준 바이트를 넘으셨다면 봉사시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난이도가 다른 문헌을 여럿 진행하신 경우, 앞의 문헌에서 남은 바이트는 뒤의 문헌 기준으로 환산하여 적용하여 드립니다. ==봉사시간 부여 예시 == {| class="wikitable" |+ 일일 봉사시간 기준표 (난이도 별, 바이트) |- ! 봉사시간 !! 상 !! 중 !! 하 |- | 0 || 0 || 0 || 0 |- | 1 || 3,000 || 4,000 || 8,000 |- | 2 || 6,000 || 8,000 || 16,000 |- | 3 || 9,000 || 12,000 || 24,000 |- | 4 || 12,000 이상 || 16,000 이상 || 32,000 이상 |} * "일일 활동" 또는 "전일에서 넘어온 잔여 바이트"를 합쳐 1일 활동 기준을 넘길 경우, 초과분에는 봉사시간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 ;예시1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기여했는데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여 봉사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2 || 0 || 29,500 || -24,000 || 3 || 5,500 |- | 12/23 || 5,500 || 32,000 || -37,500 || 4 || 0 |} 12월 22일에서 넘어온 5,500바이트와 12월 23일 활동 바이트의 합은 37,500바이트이므로 일일 기준을 초과하여 누적되지 않습니다. ---- ;예시2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하여도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4 || 0 || 17,500 || -16,000 || 2 || 1,500 |- | 12/25 || 1,500 || 26,500 || -24,000 || 3 || 4,000 |} 봉사시간 산정 기준 3시간 분량 이내로 활동하면 초과분으로 인한 봉사활동 시간 손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 ;예시3 - 난이도 중 문헌을 이틀에 걸쳐 13,000바이트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8 || 0 || 6,000 || -4,000 || 1 || 2,000 |- | 12/29 || 2,000 || 7,000 || -8,000 || 2 || 1,000 |} 12월 29일은 7,000바이트를 기여하였으나 전일에서 넘어온 바이트와 합쳐 9,000바이트가 되어 봉사시간 2시간 부여 ---- ;예시4 - 난이도 상 문헌을 여러 날에 나누어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31 || 0 || 2,500 || 0 || 0 || 2,500 |- | 1/1 || 2,500 || 2,000 || -3,000 || 1 || 1,500 |- | 1/4 || 1,500 || 2,500 || -3,000 || 1 || 1,000 |} 날짜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동안 기여한 분량이 봉사시간 1시간 기준을 넘긴다면, 그 날짜에 봉사시간을 부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예시5 - 난이도 중 문헌을 기여한 후, 난이도 하 문헌을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비고 |- | 1/7 || 0 || 7,000 || -4,000 || 0 || 3,000 || 난이도 중 → 하 |- | 1/12 || 4,500 || 3,000 || -6,000 || 1 || 1,500 || 3,000 →4,500<ref>중 : 하 = 4,000 : 6,000 = 1 : 1.5</ref> 으로 조정 |- |} 난이도를 변경하여 문헌을 선택한 경우, 기존 문헌의 남은 바이트를 다음 문헌에서 이어받으실 수 있으며, 봉사시간 기준 바이트에 맞추어 환산합니다. ---- ====해설==== {{각주}} i2qb7yuud4rsjvjzby2dd418p7jcqrp 347573 347571 2024-12-20T09:04:04Z Motoko (WMKR) 14454 /* 문헌 선택 */ 347573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상반기}} __NOTOC__ == 문헌 선택 == 옛한글 봉사활동에서 첫번째로 작업할 문헌을 선택할 때는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주최자와 연락을 통해 미리 논의하여 결정합니다. 먼저 신청하신 분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의 문헌을 완료한 후, 새 문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난이도 별로 봉사시간 부여 기준이 다릅니다. 참가자 분의 역량에 맞는 단계를 선택하세요. ; 난이도 안내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한문원문 문장과 한글언해 문장이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한문 1자와 한글 1자가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또는 궁체로 작성된 필사본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옛한글만으로 기록된 문헌 == 활동 인정 기준 ==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가 같이 있는 경우,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를 모두 타자한 경우'''에만 유효한 활동으로 인정합니다. * 예) 한문 원문 50자, 한글 언해 200자가 번갈아가면서 있는 경우, 둘다 작성해야 인정. * 한자 한글이 섞여있는 문헌에서 한글만 골라 작성한 경우,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에 해당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간주하여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작성중인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문자''가 있는 경우, 검정색 사각형으로 표시해주세요. ( ■ ) * 사각형으로 표시한 문자나 오타는 한 글자당 3바이트로 계산해서 기여 바이트 계산에서 차감합니다. 옛한글 깨짐 현상 방지를 위해 모든 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모든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뒤에 '''<nowiki>{{옛한글쪽 끝}}</nowiki>'''을 입력합니다. * 모든 문자가 한자라면 생략가능합니다. *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및 '''<nowiki>{{옛한글쪽 끝}}</nowiki>''' 틀은 기여산정시 유효한 바이트로 계산됩니다. == 봉사시간 기준 == 하루 최대 4시간, 최대 60시간까지 인정 ;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span style="color:#CC0000">3,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span style="color:#CC9900">4,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span style="color:#336600">8,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봉사시간 환산 * '''[[특수:내기여]]'''에서 자신이 기여한 페이지의 바이트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표시되는 바이트를 기준으로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 전날 기여한 바이트에서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에 따라 요구되는 바이트 수<ref>즉 상, 중, 하 각각 3,000, 4,000, 8,000 바이트</ref>만큼 차감되면서 1시간씩 부여받고, 남은 바이트는 다음 날로 넘어갑니다. * <span style="color: #ff0000;">1일 한도<ref>상, 중, 하 각각 12,000, 16,000, 24,000 바이트</ref>를 넘겼다면 4시간만 부여받고, 초과된 바이트는 다음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span> * 여러 날에 걸쳐서 기여하셨더라도 기준 바이트를 넘으셨다면 봉사시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난이도가 다른 문헌을 여럿 진행하신 경우, 앞의 문헌에서 남은 바이트는 뒤의 문헌 기준으로 환산하여 적용하여 드립니다. ==봉사시간 부여 예시 == {| class="wikitable" |+ 일일 봉사시간 기준표 (난이도 별, 바이트) |- ! 봉사시간 !! 상 !! 중 !! 하 |- | 0 || 0 || 0 || 0 |- | 1 || 3,000 || 4,000 || 8,000 |- | 2 || 6,000 || 8,000 || 16,000 |- | 3 || 9,000 || 12,000 || 24,000 |- | 4 || 12,000 이상 || 16,000 이상 || 32,000 이상 |} * "일일 활동" 또는 "전일에서 넘어온 잔여 바이트"를 합쳐 1일 활동 기준을 넘길 경우, 초과분에는 봉사시간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 ;예시1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기여했는데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여 봉사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2 || 0 || 29,500 || -24,000 || 3 || 5,500 |- | 12/23 || 5,500 || 32,000 || -37,500 || 4 || 0 |} 12월 22일에서 넘어온 5,500바이트와 12월 23일 활동 바이트의 합은 37,500바이트이므로 일일 기준을 초과하여 누적되지 않습니다. ---- ;예시2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하여도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4 || 0 || 17,500 || -16,000 || 2 || 1,500 |- | 12/25 || 1,500 || 26,500 || -24,000 || 3 || 4,000 |} 봉사시간 산정 기준 3시간 분량 이내로 활동하면 초과분으로 인한 봉사활동 시간 손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 ;예시3 - 난이도 중 문헌을 이틀에 걸쳐 13,000바이트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8 || 0 || 6,000 || -4,000 || 1 || 2,000 |- | 12/29 || 2,000 || 7,000 || -8,000 || 2 || 1,000 |} 12월 29일은 7,000바이트를 기여하였으나 전일에서 넘어온 바이트와 합쳐 9,000바이트가 되어 봉사시간 2시간 부여 ---- ;예시4 - 난이도 상 문헌을 여러 날에 나누어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31 || 0 || 2,500 || 0 || 0 || 2,500 |- | 1/1 || 2,500 || 2,000 || -3,000 || 1 || 1,500 |- | 1/4 || 1,500 || 2,500 || -3,000 || 1 || 1,000 |} 날짜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동안 기여한 분량이 봉사시간 1시간 기준을 넘긴다면, 그 날짜에 봉사시간을 부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예시5 - 난이도 중 문헌을 기여한 후, 난이도 하 문헌을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비고 |- | 1/7 || 0 || 7,000 || -4,000 || 0 || 3,000 || 난이도 중 → 하 |- | 1/12 || 4,500 || 3,000 || -6,000 || 1 || 1,500 || 3,000 →4,500<ref>중 : 하 = 4,000 : 6,000 = 1 : 1.5</ref> 으로 조정 |- |} 난이도를 변경하여 문헌을 선택한 경우, 기존 문헌의 남은 바이트를 다음 문헌에서 이어받으실 수 있으며, 봉사시간 기준 바이트에 맞추어 환산합니다. ---- ====해설==== {{각주}} 174gvkvf6zuh75ppslkqzxxhig4asvu 347578 347573 2024-12-20T09:13:07Z Motoko (WMKR) 14454 347578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 __NOTOC__ == 문헌 선택 == 옛한글 봉사활동에서 첫번째로 작업할 문헌을 선택할 때는 '''오리엔테이션 이후에''' 주최자와 연락을 통해 미리 논의하여 결정합니다. 먼저 신청하신 분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의 문헌을 완료한 후, 새 문헌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난이도 별로 봉사시간 부여 기준이 다릅니다. 참가자 분의 역량에 맞는 단계를 선택하세요. ; 난이도 안내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한문원문 문장과 한글언해 문장이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한문 1자와 한글 1자가 번갈아가면서 기록된 문헌 또는 궁체로 작성된 필사본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옛한글만으로 기록된 문헌 == 활동 인정 기준 ==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가 같이 있는 경우, '''한문 원문과 한글 언해를 모두 타자한 경우'''에만 유효한 활동으로 인정합니다. * 예) 한문 원문 50자, 한글 언해 200자가 번갈아가면서 있는 경우, 둘다 작성해야 인정. * 한자 한글이 섞여있는 문헌에서 한글만 골라 작성한 경우,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에 해당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간주하여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작성중인 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문자''가 있는 경우, 검정색 사각형으로 표시해주세요. ( ■ ) * 사각형으로 표시한 문자나 오타는 한 글자당 3바이트로 계산해서 기여 바이트 계산에서 차감합니다. 옛한글 깨짐 현상 방지를 위해 모든 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모든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뒤에 '''<nowiki>{{옛한글쪽 끝}}</nowiki>'''을 입력합니다. * 모든 문자가 한자라면 생략가능합니다. *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및 '''<nowiki>{{옛한글쪽 끝}}</nowiki>''' 틀은 기여산정시 유효한 바이트로 계산됩니다. == 봉사시간 기준 == 하루 최대 4시간, 최대 60시간까지 인정 ;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 * <span style="color:#CC0000">난이도 상</span> - <span style="color:#CC0000">3,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CC9900">난이도 중</span> - <span style="color:#CC9900">4,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span style="color:#336600">난이도 하</span> - <span style="color:#336600">8,000 바이트</span> 당 1시간 ; 봉사시간 환산 * '''[[특수:내기여]]'''에서 자신이 기여한 페이지의 바이트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표시되는 바이트를 기준으로 봉사시간을 산정합니다. * 전날 기여한 바이트에서 난이도 별 봉사시간 기준에 따라 요구되는 바이트 수<ref>즉 상, 중, 하 각각 3,000, 4,000, 8,000 바이트</ref>만큼 차감되면서 1시간씩 부여받고, 남은 바이트는 다음 날로 넘어갑니다. * <span style="color: #ff0000;">1일 한도<ref>상, 중, 하 각각 12,000, 16,000, 24,000 바이트</ref>를 넘겼다면 4시간만 부여받고, 초과된 바이트는 다음날로 넘어가지 않습니다.</span> * 여러 날에 걸쳐서 기여하셨더라도 기준 바이트를 넘으셨다면 봉사시간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 난이도가 다른 문헌을 여럿 진행하신 경우, 앞의 문헌에서 남은 바이트는 뒤의 문헌 기준으로 환산하여 적용하여 드립니다. ==봉사시간 부여 예시 == {| class="wikitable" |+ 일일 봉사시간 기준표 (난이도 별, 바이트) |- ! 봉사시간 !! 상 !! 중 !! 하 |- | 0 || 0 || 0 || 0 |- | 1 || 3,000 || 4,000 || 8,000 |- | 2 || 6,000 || 8,000 || 16,000 |- | 3 || 9,000 || 12,000 || 24,000 |- | 4 || 12,000 이상 || 16,000 이상 || 32,000 이상 |} * "일일 활동" 또는 "전일에서 넘어온 잔여 바이트"를 합쳐 1일 활동 기준을 넘길 경우, 초과분에는 봉사시간이 부여되지 않습니다. ---- ;예시1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기여했는데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여 봉사시간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2 || 0 || 29,500 || -24,000 || 3 || 5,500 |- | 12/23 || 5,500 || 32,000 || -37,500 || 4 || 0 |} 12월 22일에서 넘어온 5,500바이트와 12월 23일 활동 바이트의 합은 37,500바이트이므로 일일 기준을 초과하여 누적되지 않습니다. ---- ;예시2 - 난이도 하 문헌을 이틀에 걸쳐 하여도 초과 바이트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4 || 0 || 17,500 || -16,000 || 2 || 1,500 |- | 12/25 || 1,500 || 26,500 || -24,000 || 3 || 4,000 |} 봉사시간 산정 기준 3시간 분량 이내로 활동하면 초과분으로 인한 봉사활동 시간 손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 ;예시3 - 난이도 중 문헌을 이틀에 걸쳐 13,000바이트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28 || 0 || 6,000 || -4,000 || 1 || 2,000 |- | 12/29 || 2,000 || 7,000 || -8,000 || 2 || 1,000 |} 12월 29일은 7,000바이트를 기여하였으나 전일에서 넘어온 바이트와 합쳐 9,000바이트가 되어 봉사시간 2시간 부여 ---- ;예시4 - 난이도 상 문헌을 여러 날에 나누어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 12/31 || 0 || 2,500 || 0 || 0 || 2,500 |- | 1/1 || 2,500 || 2,000 || -3,000 || 1 || 1,500 |- | 1/4 || 1,500 || 2,500 || -3,000 || 1 || 1,000 |} 날짜가 이어지지 않더라도 그동안 기여한 분량이 봉사시간 1시간 기준을 넘긴다면, 그 날짜에 봉사시간을 부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 ;예시5 - 난이도 중 문헌을 기여한 후, 난이도 하 문헌을 기여 {| class="wikitable" |- ! 날짜 !! 전일에서 넘어옴 !! 당일 기여 !! 바이트 차감 !! 봉사시간 !! 남은 바이트 !! 비고 |- | 1/7 || 0 || 7,000 || -4,000 || 0 || 3,000 || 난이도 중 → 하 |- | 1/12 || 4,500 || 3,000 || -6,000 || 1 || 1,500 || 3,000 →4,500<ref>중 : 하 = 4,000 : 6,000 = 1 : 1.5</ref> 으로 조정 |- |} 난이도를 변경하여 문헌을 선택한 경우, 기존 문헌의 남은 바이트를 다음 문헌에서 이어받으실 수 있으며, 봉사시간 기준 바이트에 맞추어 환산합니다. ---- ====해설==== {{각주}} o8krn83p3s3gtlhw3nul8udwbwydhhb 위키문헌: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도움말 4 94880 347579 2024-12-20T09:13:35Z Motoko (WMKR) 14454 새 문서: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 ==옛한글 지원 폰트 설치 == * 1단계: 나눔 옛한글 폰트 파일 다운로드 ([https://hangeul.naver.com/2014/archaicword 링크]) * 2단계: 컴퓨터에 설치 ([https://support.microsoft.com/ko-kr/office/글꼴-추가-b7c5f17c-4426-4b53-967f-455339c564c1 윈도우], [https://support.apple.com/ko-kr/guide/font-book/fntbk1000/mac 맥]) ==옛한글 입력 방법== === 웹 입력기 === * [https://ohi.p... 347579 wikitext text/x-wiki {{옛한글 문헌 전자화 프로젝트/2024년 하반기}} ==옛한글 지원 폰트 설치 == * 1단계: 나눔 옛한글 폰트 파일 다운로드 ([https://hangeul.naver.com/2014/archaicword 링크]) * 2단계: 컴퓨터에 설치 ([https://support.microsoft.com/ko-kr/office/글꼴-추가-b7c5f17c-4426-4b53-967f-455339c564c1 윈도우], [https://support.apple.com/ko-kr/guide/font-book/fntbk1000/mac 맥]) ==옛한글 입력 방법== === 웹 입력기 === * [https://ohi.pat.im/?ko=2-KSX5002&y=1 온라인 한글 입력기] * 옛한글 입력이 안 된는 경우에는 한글키에서 영문키로 변환해 보세요. === 날개셋 입력기 === * [http://moogi.new21.org/prg4.html 날개셋 한글 입력기 설치] [[파일:2023하반기 옛한글 OT - 5B2 날개셋한글입력기 설치.webm|섬네일|왼쪽|날개셋 한글 입력기 설치 및 설정]] {{clear}} ==반복 부호 == ;〻 한글 반복부호 ;々 한자 반복부호 {{clear}} ==주의 사항== * 옛한글 깨짐 현상 방지를 위해 모든 페이지의 시작 부분에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모든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 뒤에 '''<nowiki>{{옛한글쪽 끝}}</nowiki>'''을 입력합니다. ** 모든 문자가 한자라면 생략가능합니다. ** '''<nowiki>{{옛한글쪽 시작}}</nowiki>''' 및 '''<nowiki>{{옛한글쪽 끝}}</nowiki>''' 틀은 기여산정시 유효한 바이트로 계산됩니다. * "미리 보기"를 클릭하시어 입력 상태를 확인하시고 "문서 게시"를 클릭하여 저장해 주세요. egkyxkbc1pssehlbyxu6nb2evmttger 국회본회의 회의록/제22대/제419회 0 94881 347580 2024-12-20T10:53:09Z Reepy1 4362 새 문서: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 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 국회 본회의 | 설명 = [[w:대한민국 제22대 국회|대한민국 제22대 국회]] 제419국회의 회의록. {{위키백과|대한민국 제22대 국회}} }} {{보조 목차|title=회의별 분류 |comment= | * [[/제1차|제1차]] (2024년 12월 11일) * [[/제2차|제2차]] (2024년 12월 12일) * [[/제3차|제3차]] (2024년 12월 13일) * [[/제4차|제4차]] (2024년 12월 14일... 347580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 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 국회 본회의 | 설명 = [[w:대한민국 제22대 국회|대한민국 제22대 국회]] 제419국회의 회의록. {{위키백과|대한민국 제22대 국회}} }} {{보조 목차|title=회의별 분류 |comment= | * [[/제1차|제1차]] (2024년 12월 11일) * [[/제2차|제2차]] (2024년 12월 12일) * [[/제3차|제3차]] (2024년 12월 13일) * [[/제4차|제4차]] (2024년 12월 14일) }}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 [[분류:제22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419]] iveo5y1r9b1ouaw8xt5px5zqt44li5k 347582 347580 2024-12-20T10:56:14Z Reepy1 4362 347582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 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 국회 본회의 | 설명 = [[w:대한민국 제22대 국회|대한민국 제22대 국회]] 제419국회의 회의록. {{위키백과|대한민국 제22대 국회}} | 이전 = [[국회본회의 회의록/제22대/제418회]] }} {{보조 목차|title=회의별 분류 |comment= | * [[/제1차|제1차]] (2024년 12월 11일) * [[/제2차|제2차]] (2024년 12월 12일) * [[/제3차|제3차]] (2024년 12월 13일) * [[/제4차|제4차]] (2024년 12월 14일) }}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 [[분류:제22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419]] jqo7bkv2dlu8vxeq4djtbv618qhe8lx 347583 347582 2024-12-20T11:16:41Z Reepy1 4362 347583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 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국회 본회의 | 설명 = [[w:대한민국 제22대 국회|대한민국 제22대 국회]] 제419국회의 회의록. {{위키백과|대한민국 제22대 국회}} | 이전 = [[국회본회의 회의록/제22대/제418회]] }} {{보조 목차|title=회의별 분류 |comment= | * [[/제1차|제1차]] (2024년 12월 11일) * [[/제2차|제2차]] (2024년 12월 12일) * [[/제3차|제3차]] (2024년 12월 13일) * [[/제4차|제4차]] (2024년 12월 14일) }}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 [[분류:제22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419]] 3k3k0yn72vu90h7yq92qh25cv91y44a 색인:국회회의록 22대 419회 4차 국회본회의.pdf 252 94882 347585 2024-12-20T11:30:18Z Reepy1 4362 새 문서: 347585 proofread-index text/x-wiki {{:MediaWiki:Proofreadpage_index_template |종류=book |제목=제419국회 제4호 국회본회회의록 |언어=ko |권= |저자= |번역자= |편집자= |삽화가= |학교= |출판사= |위치=서울 |연도=2024 |정렬 키= |ISBN= |OCLC= |LCCN= |BNF_ARK= |ARC= |출처=pdf |그림=1 |진행 상황=C |쪽별 색인=<pagelist /> |목차= |너비= |CSS= |머리말= |꼬리말= }} f7059xdjovhohr5asj143y585ia4fm6 국회본회의 회의록/제22대/제419회/제4차 0 94883 347586 2024-12-20T11:35:58Z Reepy1 4362 새 문서: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국회 제4차본회의 }} <pages index="국회회의록 22대 419회 4차_국회본회의.pdf" from=1 to=13 />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 [[분류:제22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419-4]] 347586 wikitext text/x-wiki {{머리말 | 제목 = 국회본회의회의록 | 부제 = 제22대국회 제419회국회 제4차본회의 }} <pages index="국회회의록 22대 419회 4차_국회본회의.pdf" from=1 to=13 /> == 라이선스 == {{PD-대한민국}} [[분류:제22대국회 국회본회의 회의록|419-4]] nfj6o96jecfj5taiucxryo3203sv066 페이지:국회회의록 22대 419회 4차 국회본회의.pdf/13 250 94884 347587 2024-12-20T11:36:23Z Reepy1 4362 /* 교정 안 됨 */ 새 문서: ◯본회의장 의석표 347587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Reepy1" /></noinclude>◯본회의장 의석표<noinclude><references/></noinclude> 2m5i6dgpl6gmtn1lpowwcmqjqpval65 페이지:국회회의록 22대 419회 4차 국회본회의.pdf/1 250 94885 347588 2024-12-20T11:37:01Z Reepy1 4362 /* 교정 안 됨 */ 새 문서: 제419회국회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제4호 (임 시 회 의 록 ) 국 회 사 무 처 2024년12월14일(토) 오후 4시 의사일정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상정된 안건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347588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Reepy1" /></noinclude>제419회국회 (임시회) 국회본회의회의록 제4호 (임 시 회 의 록 ) 국 회 사 무 처 2024년12월14일(토) 오후 4시 의사일정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상정된 안건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 1 (16시05분 개의) ◯의장 우원식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4차 본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보고사항은 회의록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사항은 끝에 실음) 안건 상정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길로 향할지 마음 졸이는 시간입니다. 그 러나 길은 늘 국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강 합니다. 오늘 의원님들께서 받아 들 투표용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역사의 무 게이고 민주주의의 무게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16시07분) ◯의장 우원식 의사일정 제1항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을 상정합니다. 박찬대 의원 나오셔서 이 안건에 대하여 제안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찬대 의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원식 국회의장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입니다.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 대한민국헌법이 유린당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멈추 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께서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국회 앞으로 한달음 에 뛰쳐나와 맨몸으로 계엄군 차량을 막아섰습니다. 국회를 봉쇄한 경찰에 항의하며 국 회의원들과 보좌진의 국회 진입을 도왔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다시 뛰도록 심폐소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f7zz8468dt9wby9dd1f8wbd987ahxa0 347589 347588 2024-12-20T11:42:58Z Reepy1 4362 347589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Reepy1" /></noinclude>{{nop}} ---- {| style="width: 100%; margin: 0 auto; text-align: center;" |- | {{더크게|제419회국회}}<br />{{더크게|(임시회)}} || {{더더더더크게|'''국회본회의회의록'''}}<br />{{더크게|{{색상|blue|(임시회의록)}}}} || {{더크게|제 4 호}} |} {{오른쪽|{{더크게|국회사무처}}}} ---- '''2024년12월14일(토) 오후 4시''' ---- {{들여쓰기/s|2}}'''[[의사일정/제419국회/제4차 본회의|의사일정]]'''{{들여쓰기/e}}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 {{들여쓰기/s|2}}'''상정된 안건'''{{들여쓰기/e}}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 1 ---- {{오른쪽|(16시05분 개의)}} '''◯의장 우원식'''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4차 본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보고사항은 회의록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사항은 끝에 실음) 안건 상정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길로 향할지 마음 졸이는 시간입니다. 그 러나 길은 늘 국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강 합니다. 오늘 의원님들께서 받아 들 투표용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역사의 무 게이고 민주주의의 무게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16시07분) ◯의장 우원식 의사일정 제1항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을 상정합니다. 박찬대 의원 나오셔서 이 안건에 대하여 제안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찬대 의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원식 국회의장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입니다.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 대한민국헌법이 유린당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멈추 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께서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국회 앞으로 한달음 에 뛰쳐나와 맨몸으로 계엄군 차량을 막아섰습니다. 국회를 봉쇄한 경찰에 항의하며 국 회의원들과 보좌진의 국회 진입을 도왔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다시 뛰도록 심폐소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62rxg71ewz5tuu2164klfbbmws2cdcw 347590 347589 2024-12-20T11:44:10Z Reepy1 4362 347590 proofread-page text/x-wiki <noinclude><pagequality level="1" user="Reepy1" /></noinclude>{{nop}} ---- {| style="width: 100%; margin: 0 auto; text-align: center;" |- | {{더크게|제419회국회}}<br />{{더크게|(임시회)}} || {{더더더더크게|'''국회본회의회의록'''}}<br />{{더크게|{{색상|blue|(임시회의록)}}}} || {{더크게|제 4 호}} |} {{오른쪽|{{더크게|국회사무처}}}} ---- '''2024년12월14일(토) 오후 4시''' ---- {{들여쓰기/s|2}}'''[[의사일정/제419국회/제4차 본회의|의사일정]]'''{{들여쓰기/e}}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 {{들여쓰기/s|2}}'''상정된 안건'''{{들여쓰기/e}}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 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 1 ---- {{오른쪽|(16시05분 개의)}} '''◯의장 우원식''' 의석을 정돈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원이 되었으므로 제4차 본회의를 개의하겠습니다. 보고사항은 회의록에 게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른쪽|(보고사항은 끝에 실음)}} 안건 상정 전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어떤 길로 향할지 마음 졸이는 시간입니다. 그 러나 길은 늘 국민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강 합니다. 오늘 의원님들께서 받아 들 투표용지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습니다. 역사의 무 게이고 민주주의의 무게입니다. 한 분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1.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박찬대 의원·황운하 의원·천하람 의원·윤종오 의원·용혜인 의원·한창민 의원 등 190인 발의)(의안번호 2206448) (16시07분) ◯의장 우원식 의사일정 제1항 대통령(윤석열) 탄핵소추안을 상정합니다. 박찬대 의원 나오셔서 이 안건에 대하여 제안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찬대 의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우원식 국회의장과 선배·동료 의원 여러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박찬대입니다. 2024년 12월 3일 22시 30분 대한민국헌법이 유린당했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멈추 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께서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국회 앞으로 한달음 에 뛰쳐나와 맨몸으로 계엄군 차량을 막아섰습니다. 국회를 봉쇄한 경찰에 항의하며 국 회의원들과 보좌진의 국회 진입을 도왔습니다. 민주주의의 심장이 다시 뛰도록 심폐소생<noinclude><references/></noinclude> cc7k6gglg7ov5fbx01l1nhv1d28sonh